작년 가을, 처음으로 친정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갔다.
서울에서 사시는 오라버니 내외분과 종반들의 일정에 맞춰서
아직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형부까지 시간을 내신 그날은
가을이 누릇누릇 익어가는 토요일이었다.
폭염에 비례해서 드세기만 하던 매미들의 신명도 잦아들고
한껏 높아진 하늘 언저리에 빨간 고추잠자리들의 날개가
연신 가을을 날려대고 있었다.
출가외인이라 늘 시댁 문중 산소의 벌초만 따라다니면서
벌초꾼들의 식사를 챙기다보니 미처 아버지의 산소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거기까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리라.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꿈을 키우던 고향마을,
길목의 감나무와 강변의 자갈들과 낮은 집들을 지나
높은 선산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만나 뵈러 갔을 때에
오랜 세월의 불효도 괘씸타 않으시고 마치 두 팔을 벌리시듯
참나무를 가지째 흔들고 계신 아버지를 환영(幻影)으로 뵈었다.
이 높은 산에다가 아버지 모셔놓고 지금까지 찾아 뵌 것이
다섯 손가락도 꼽지 못할 회수였다는 생각에 너무도 죄스러웠다.
그때에 심었던 어린 도래솔이며 참나무들이 참 많이도 자랐구나.
세월의 키가 이렇게 높아지도록 아버지를 외면하고 살았단 말인가!
그리 먼 곳도 아니건만 어찌 이리도 무심한 세월을 흘리고만 있었는지…
(아버지! 당신께선 이리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기다리고 계셨나요.
막내를 그렇게도 귀여워하셨고 그만큼 염려가 떠나지 않으시던 아버지를,
더구나 막내를 못 잊어서 막내 생일날 조용히 눈을 감으신 아버지를,
이 못난 막내는 언제나 발등의 불만 툴툴 털다가 그 불 제대로 끄지도 못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효를 조금도 끄집어내지 못했음이 이렇게도 통탄스럽습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형부께서 능숙하게 작동시키시는 예초기의 칼날에
멋대로 자란 풀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오빠들과 낫으로 뒷정리를 하면서 나는 어느새 소풀 베러 다니던
철없던 소녀로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소는 내 담당이었지. 그 옛날 시골에서는 그랬다.
조금 과장하자면 아이가 걸음마를 배움과 동시에 일도 함께 배운다.
특히 소가 가장 큰 재산이었고 일꾼이었던 그 시절엔
소 키우기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은 필수였다.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에 쇠말뚝에 소를 매는 법, 푸는 법, 꼴을 베는 법,
작두에 꼴 썰기, 쇠죽 끓이기, 소를 몰기, 소를 몰 때의 용어까지도
빈틈없이 배웠다. 산에 풀 뜯기러 갔을 때 나무에 고삐가 엉키지 않도록
쇠뿔에 고삐를 감는 법까지 개인지도 없이도 아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학교가 파하면 앞개울에서 멱을 한바탕 감은 아이들이
다 함께 모여서 소에게 풀을 뜯기러 풀들이 무성한 깊은 산엘 간다.
쇠뿔에 고삐를 칭칭 감아서 풀이 지천으로 자란 산에다가 소 떼를 올려두고
평평한 골짜기에 모여서 신나게 놀다가 두어 시간쯤은 의무적으로 꼴을 벤다.
칡넝쿨도 걷어내고 바랭이 등 기름진 풀만 골라내서 베는 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잘 안다.
태산같이 베어놓은 풀들은 해가 지면 아버지나 오빠가
바소쿠리를 얹은 지게에다가 보기 좋게 담아서 집으로 지고 가시곤 했다.
놀이도 경쟁적으로 하지만 소풀 베는 것도 아이들은 치열하게 경쟁을 했다.
어른들의 칭찬이 그렇게도 맛있었던 그 시절엔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었다.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둠이 밀려올 때쯤 배가 부르도록 풀을 먹은 소들은
알아서 산 아래로 내려온다. 영특하게도 어린 주인들을 용하게 알아보고
어슬렁거리며 곁으로 오는 소들이 대견스러웠다.
배가 불룩해진 각자의 소를 앞장 세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하루가 저무는 것이다.
(아버지, 저 압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소를 맡아서 기르던 막내가 안쓰러우셔서
"희야. 소는 니 몫으로 남겨두마. 아무도 손 못 댄다."
노래처럼 말씀하시던 그 말씀, 아직도 제 가슴에
아버지의 생생하신 음성으로 남아 있고 그 소, 저의 학비는 물론이고
한번은 저의 수술비용으로, 또 한번은 저의 결혼 자금으로 쓰셨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셨음에도 한 동안 막내사위가 힘들었을 적에
제가 알면 받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아시는지라 팔지 않아도 좋을 소를 파시고
그 돈을 저 몰래 사위에게 건네 주셨다는 사실을 나중,
아주 나중에서야 듣고 울음을 속으로만 삼키던 저는 아버지께서
당뇨로 고생을 하신 힘든 세월을 조금도 덜어드리지 못했음이
아직도 마음 아픕니다. 사랑하는 막내의 집이라고 오셨다가
식이요법을 하시던 터라 평소에 좋아하시던 음식들을
이것도 못 드시고 저것도 드시면 안되었던 그 때의 아버지 모습은
저로 하여금 얼마나 가슴 저미는 순간을 끌어안게 하셨는지요.
젊은 날 화려한 물감으로 그렸을 많은 희망과 꿈들을 다 이루지 못하고
무덤 속으로 가셨을지도 모르는 산 속의 수많은 영혼들에게도
젊은 날의 초상은 건재할까요. 젊은 날 많은 허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날마다 욕심의 덤불을 키우다가 끝내는 얼기설기 얼크러진 견고한 덫과도 같은
욕심의 덤불에 갇혀서 인생의 막다른 길로 접어들게 됐을 때에
발버둥치며 허욕을 벗어버리려 기를 썼을,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옥죄어 오는
덫 속에서 결국은 헤어나지 못했을 많은 영혼들의 울음이 바람소리처럼
가을 산을 맴도는 것 같은데…
아버지! 당신의 젊은 날은 정녕 그들과 같지는 않으셨습니다.)
회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그리 큰 욕심이 없으셨으나
자식들의 예절 교육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셨다.
그 덕분에 내 기억 속의 젊음은 화려하지도 쉽지도 않았지만
은근한 흑백사진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힘이 들어도 어른은 섬겨야 하고, 남에게 양보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이 적더라도 나누어야 하고, 공손해야 하며 무릇 참된 인격이란
겸손이 바탕에 있어야 하고 인사성이 밝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기본 가르침이셨고 그 가르침에 나는 아름답고 참된 젊음을
심고 있었음이다. 그런데 늙지도 젊지도 않은 지금,
나는 왜 아버지의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수하지 못하는 걸까.
시대적인 현상 탓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킨다면 아마도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마음 속에 남아있는
젊은 날의 초상은 아름다운 빛깔로 지속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누릇누릇 가을이 익는다. 계절의 순환이 이리도 빨라
또 벌초때가 된 것이다. 작년처럼 올해도 아버지를 뵈러 가고싶다.
살아가면서 소중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게 아버지의 산으로 든든하게
곁을 지키던 소도 이젠 없고 그 소의 주인인 아버지도 이땅엔 안계시지만
다시 아버지의 따스한 음성을 들으러 가고싶다.
막내를 극진히 사랑하시던 아버지의 산과도 같으신 큰 몸짓을
가슴으로 안으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산소(酸素)처럼 당신에게 소중함을 제공하던 산(山)같은 소는
막내가 깡그리 거두어 가도록 배려를 해 주셨던 아버지께서는
가신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저에게는 너무도 큰 산이십니다.-
첫댓글가슴이 뭉클해지군요. 아버님의 유택이 늘 높게만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출가외인의 몸으로 정말이지 큰일 하셨습니다.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님이 보고픈 마음, 내일은 저도 벌초를 가야만겠습니다. 님의 옥고, '산과도 같은 큰 몸짓'-'너무도 큰 산임'을 깨우쳐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네. 백선생님, 성 선생님. 다 같이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세대는 벌초를 당연시해서 때가 되면 으례히 하고 있는데 앞으로가 걱정되네요. 좌택시 우버스 자리가 명당이란 우스개 소리도 어느새 옛날 얘기가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거들랑 한줌의 재로 남겨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가슴이 뭉클해지군요. 아버님의 유택이 늘 높게만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출가외인의 몸으로 정말이지 큰일 하셨습니다.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님이 보고픈 마음, 내일은 저도 벌초를 가야만겠습니다. 님의 옥고, '산과도 같은 큰 몸짓'-'너무도 큰 산임'을 깨우쳐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백천봉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시댁의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친정 아버지의 벌초에 참여를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분량만큼의, 아니 제 몫의 책임을 다하고 왔습니다. 백선생님께서도 다녀오셨는지요?
예, 오늘 다녀왔습니다. 아버님이 그리워 늦은 밤 한 잔 막걸리를 했습니다. 어느듯 7,8년 그세월이 눈 앞을 스칩니다. 고마운 글 감사합니다.
동 시대를 사는 분 같아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저도 어제 아내와 함께 부모님 묘소에 벌초를 하였는데 온 갖 상념들이 교차하더군요. 얼마전 '아버지의 나무'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가르침과 애틋한 정은 항상 큰 산처럼 남아 있습니다.
네. 백선생님, 성 선생님. 다 같이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세대는 벌초를 당연시해서 때가 되면 으례히 하고 있는데 앞으로가 걱정되네요. 좌택시 우버스 자리가 명당이란 우스개 소리도 어느새 옛날 얘기가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거들랑 한줌의 재로 남겨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