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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소공동체와 사도직 운동
강영옥 선생(서울 대교구)
- 차 례 -
1. 들어가면서
2. 사도직 운동
2.1 레지오 마리애
2.2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2.3 꾸르실료
3. 소공동체
4.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과의 관계 정립
4.1 소공동체에 대한 공감대 형성
4.2 평신도의 자발성
4.3 권위주의의 청산
4.4 사도직 단체들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방향
4.5 소공동체의 심화
5. 나가면서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와 사도직 운동
1. 들어가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선교사의 전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신앙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들을 일부 유학자들이 서구 문화와 사상[西學]을 통해 극복해 보려 시도하였고 그것은 신앙 생활로 이어졌다. 만인 평등사상을 지닌 천주교 사상은 당시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뒤흔드는 매우 새로운 사상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위정자들은 천주교가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00여 년 동안 박해를 가하였다. 기나긴 박해 시기 동안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빈곤 상태로 내몰리거나 목숨마저 내어 주기를 주저치 않았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신앙관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성장률을 자랑하고 있으며 활기찬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모습들은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열성적인 신앙 활동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평신도가 주축이 된 사도직 운동은 195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 안에 등장했다. 1953년에 시작된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안에 전개된 사도직 운동으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꾸르실료, MBW(Movement for Better World), ME(Merrage Encounter), 성령 쇄신 봉사회, 지속적인 성체 조배회, 마리아 사업회(포콜라레)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도직 운동은 한국 천주교회를 활기차게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지향하는 평신도의 역할과 위상도 그러한 사도직 활동을 통해 정립될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사도직 운동과는 별도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소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외적으로 놀랄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내적으로는 사귐, 나눔, 인격적 만남이 점점 어려워져 ‘친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비판들이 일어났다.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교회상을 모색하기 위한 작업과 더불어 새로운 사목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리하여 서울 대교구의 경우 1992년부터 2000년대 복음화와 소공동체 활성화를 통한 새로운 사목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모습을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이상(理想)으로 현대화시켜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지난 15년간 소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과의 관계 정립 문제이다. 소공동체는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반모임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또 다른 단체 활동처럼 여겨졌다.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속한 사도직 단체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면서 소공동체 모임은 의례적인 모임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소공동체 모임을 활성화하려는 본당일수록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는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와 소공동체간 마찰을 겪었다. 그러자 일부 본당 사목자는 소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지역으로 재편하거나 아니면 아예 없애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일들은 사목자와 평신도 간의 대립으로 치달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소공동체를 본당 안에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각 사도직 단체들과의 관계 정립이 우선적인 하나의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2002년 제2차 소공동체 전국모임에서는 레지오 마리애와 소공동체의 관계 정립을 위한 본당 조사 및 연구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 글은 그러한 문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쓰여지게 되었다. 즉,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21세기 교회 안에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되었다. 더불어 이러한 심포지엄 자리를 통해 언로(言路)가 막혀 있는 천주교회 안에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에 자유로운 상호 대화와 토론의 물꼬가 열리는 작은 시도가 되길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사도직 단체들의 특성들을 짚어 보기로 하겠다. 그 단체들을 통해 평신도 사도직이 어떻게 수행되어 왔으며 그 단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소공동체의 특성과 사도직 단체들의 특성을 대조해 살펴 보겠다. 사도직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은 어떤 공통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 검토해 보겠다. 마지막으로 21세기 교회상을 그려보면서 사도직 단체와 소공동체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현대 사회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미래 교회상을 사목자와 신자들이 공유할 수 있을 때, 교회 안에 내재한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서 새로운 전망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 사도직 운동
사도직은 본시 그리스도의 직무이며(1고린 1,1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직무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안수와 파견을 통해 계승되는데, 직무를 계승한 자들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단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예수의 사명과 사도의 사명을 구현한다(요한 20,21 참조). 교계적 사도직은 성품 성사에 의하여 계승되지만, 평신도 사도직은 성세 성사와 견진 성사에 근거하여 평신도들의 참여로 수행된다. 교계적 사도직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평신도 사도직은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참여하며 세상 안에 복음 정신을 실천하는 것으로 수행한다. 따라서 평신도 사도직은 교계(敎階)에 의하여 주어진 위임(mandatum)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일상 생활 안에서 더욱 깊고 생생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교회 모든 사도직의 원천과 기원은 그리스도이므로 평신도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와 평신도의 산 일치에 달려 있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4항 참조).
역사 속에서 사도직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래서 사도직 단체들도 매우 다양하다. 교회 사도직의 일반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단체가 있는가 하면, 어떤 단체는 특별히 복음화와 성화를 목적으로 삼고, 어떤 단체는 현세질서의 그리스도화를 목적으로 추구하며, 어떤 단체는 자선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한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19항 참조). 사도직을 수행하는 단체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발기하여 운영해 나가기도 하고, 교회의 권위자가 영적 목적을 지향하는 사업 중에서 특정한 것을 선택하여 특별히 추진시키는 경우도 있다.
한국 천주교회 안에 활성화되어 있는 사도직 단체들도 각 단체마다 고유의 목적과 활동이 있다. 사도직 운동은 어느 한 측면을 특수한 방식으로 생활화 하려는 신자들의 모임이며 특수한 영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직무를 따르는 점에서 사도직 단체들은 서로 공통 분모를 가진다. 소공동체 역시 그리스도의 직무를 따르는 일이라고 할 때, 사도직 단체와 소공동체는 서로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 글에서는 비교적 역사가 오래되었고 전국적인 규모를 가졌으며 소공동체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사도직 운동으로 레지오 마리애, 빈첸시오회, 꾸르실료에 한정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꾸르실료 운동에 뒤이어 MBW, 포콜라레, 성령 세미나, ME 등 다양한 사도직 운동이 더 전개되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겠다.
2.1 레지오 마리애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1953년 도입된 이래 급속한 성장을 이루면서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큰 축을 형성해 왔다. 레지오 마리애는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1958년 진출)와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1978년 진출)를 중심으로 현재 27만 여명의 행동 단원과 3만 500여개 쁘레시디움의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레지오 마리애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한국 전쟁 직후 교회는 전교를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당시 광주 교구장 서리였던 현 하롤드 주교는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활성화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교회 성장을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 발전 초창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듯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초대 신자들의 불타는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전교의 사명을 이행함에 있어서 소극적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성직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관한 모든 사도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이 신비체의 참된 지체로써 교회 사업에 있어서 달리 대치할 수 없는 그 중요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현 하롤드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시기에 이미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한국 초기 천주교 평신도들의 영성을 살리기 위해 레지오의 도입을 꿈꾸고 있었다. 현 주교는 평신도들을 조직하고 교육하기 위한 틀로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였다. 1953년 목포에서 3개의 쁘레시디움으로 시작된 레지오 마리애는 1956년 전국적으로 소개되었고,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여 1965년경에는 8백여 개의 쁘레시디움이 생겨났다. 1979년 광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세나뚜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200만 신자화를 위한 민족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1986년부터 300만 신자화를 위한 민족 복음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그러한 성장세가 갑자기 둔화되고 1992년 말을 기점으로 레지오 단원들의 성장률이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레지오 마리애는 정체 상태에 들어선다. 통계를 보면 행동 단원 증가율이 점차 감소하다가, 2002년 9월에 28만 5468명에 달하던 행동 단원이 2003년 3월 현재 27만 2258명으로 집계돼 6개월 만에 단원 1만 3210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수천 명 이상 늘던 단원 수가 한국 레지오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명 이상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자 한국 레지오는 자체적으로 성장 둔화 현상에 대한 원인 분석을 시도하였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서울 세나뚜스는 1992년도에 단원 개인의 성화 부족을 그 원인으로 진단한 후 단원에 대한 교육과 피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허윤석은 자신의 석사 논문에서 조직 성장의 불균형성에서 왔다고 진단하였다. 즉, 레지오는 매우 빠른 속도로 한국 교회 내에서 양적 급성장을 하였는데, 같은 기간 한국 신자의 증가율은 크게 향상되지 않아 조직의 불균형이 생겼다는 것이다. 협조 단원의 수가 행동 단원 수의 두 배 이상이 되어야 조직이 균형을 잡을 수 있는데, 1984년 이후 활동 단원의 수가 협조 단원보다 많아짐으로써 균형이 깨졌고, 기도와 성화 부족으로 말미암아 레지오 성장이 둔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그의 분석은 단원들의 기도 부족 및 영성 고갈에서 성장 둔화의 원인을 찾고 개인의 성화를 통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2003년 한국 레지오 도입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서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레지오 마리애의 간부들은 이제 그 성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각 교구 레지오 마리애 임원들은 우선 성장만을 거듭해 오면서 그 거대한 조직 운영에 맞갖은 영성의 심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새로운 교회상 구현에 발맞추지 못했고, 성서 공부에 소홀했던 점도 지적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의견들을 정리해 보면, 1) 개인의 성화 부족, 2) 레지오 간부들의 자질 및 지도력 부족, 3) 교회 사목자와 지도자들의 관심 부족, 4) 소공동체와의 마찰, 5)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활동, 6) 개인 위주의 풍조 속에서 단체 조직력의 약화 등이다.
레지오 마리애 관계자들은 단원들의 정신 재무장을 통한 활동의 활성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기도와 봉사활동에 머무는 활동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교회 안팎의 현안 해결에 적극 나서는 활동 영역 확대와 전문화, 단지 ‘선교의 도구’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감시자 또는 견제 기구’로서 다양한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하고 사회 공동선 실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러한 제안들이 과연 현재의 레지오 마리애 틀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레지오 마리애가 앞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레지오 마리애의 성장 과정이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맞물려 있고,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 가장 성공한 사도직 단체로 볼 수 있다. 그 어떤 사도직 운동도 레지오 마리애처럼 성공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에 따르면 레지오 마리애의 주된 목적은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더프는 처음에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과 양식을 나누어 주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 않지만,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을 찾아 선교해야겠다는 각성과 더불어 레지오 마리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더프의 선교 이념은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서의 선교’, ‘선교 활동을 통한 성화’, ‘마리아를 통한 선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선교 활동에 있어서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길을 모색했고 평신도들에게 선교 활동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선교 활동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레지오 마리애는 그 본래 목적을 달성한 매우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레지오 마리애는 지난 50년간 입교 권면, 방문 선교, 복지 시설 자원 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을 이루는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21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였고 한국 레지오 마리애도 어떠한 형태로든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을 통해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맥락(Context)이었지만, 이제 21세기 한국 사회는 레지오 마리애의 본래 목적과 활동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2.2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빈첸시오회는 가난한 이웃 안에 계시는 고통당하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형제적 사랑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실천하는 평신도 단체이다.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Frederic Ozanam, 1813-1853)은 1833년 프랑스 파리에서 ‘자선 협의회’를 세워 동료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1835년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로 개칭하였으며, 1845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평신도 단체로 승인 받았다.
한국 빈첸시오회는 1955년 충주 교현 본당 주임 보어(Borer, 玉保乙) 신부가 시작하였고, 1961년 1월 29일 총 이사회로부터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교구 이사회(청주, 1963년; 서울, 1967년; 마산, 1971년)가 생기고 1975년 전국 이사회가 창립되었다. 지금은 14개 교구 이사회가 조직되어 있고 전 교구 산하 488개 협의회에 활동 회원 5,734명과 명예 회원 29,946명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 빈첸시오회는 규모가 큰 사도직 단체는 아니지만,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 가운데 뿌리내리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해 왔다. 빈첸시오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활동으로 삼는다. 회원들은 본당별, 지구별, 교구별로 환자 방문과 입원 주선, 극빈자 가정 방문과 물적 지원, 교도소 재소자 및 사회 복지 시설 방문, 가출 청소년 지도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고 1989년부터 간병인회를 만들어 간병인들을 성모 병원에 파견하였다. 1996년에는 행려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 ‘성 빈첸시오 사랑의 집’을 서울에 개설하였고, 행려자를 위한 단기 이용 시설, 알콜 중독자 선도, 북한 동포 돕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곤경에 처한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
회원들은 우선 본당 사목 활동에 대한 일반적 봉사에 협조하고 본당을 거점으로 사회 안에서 고통 받는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빈첸시오회의 조직은 본당 안에 구성된 협의회를 기본 조직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남성, 여성, 혼성, 청소년 협의회가 있다. 지구 단위의 지구 이사회를 비롯하여 교구 이사회, 전국 이사회가 있으며 이들은 파리에 있는 총 이사회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이룬다. 매주 1회 회합을 갖는 협의회에서 기도와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협의를 한다. 회원은 매주 회합에 참석하고 직접적인 만남으로 애덕을 실천하는 활동 회원과 일정한 회비를 납부하는 명예 회원으로 나뉜다.
빈첸시오회의 영성은 빈첸시오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뵙는 것이며,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한 일들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 25,40-45)라는 주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 빈첸시안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길만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과 함께 가난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인격적인 접촉을 하면서 영신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빈첸시오회의 본질이며 근본 성격이다. 회원들은 가난한 형제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어 준다. 즉,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주거나, 푼돈을 나누어 주거나, 방문을 하거나, 함께 대화를 나누는 등 곤경에 처한 이웃을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성심껏 한다.
빈첸시오회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 요소인 가난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으로 드러내는 사도직 단체이다. 그런데도 레지오 마리애와 비교할 때 사도직 단체로서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빈첸시오 전국 이사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한병은은 세상을 복음화 하기 위해 먼저 교회 자신의 복음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나라 본당의 1년 예산 중 몇 퍼센트가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쓰여지고 있는지, 교회가 가난함을 충분히 드러나지 있는지를 반문하면서, 현실적으로 약한 자, 학대받는 자, 고통 받는 자 측에 교회가 서 있는지 돌아보라고 말한다. 빈첸시오회의 활동은 본당에서 본당 사제와 평신도 대표들의 절대적 후원과 관심이 필요한데, 실제로는 그러한 후원을 얻기가 대단히 어렵고 오히려 외면당하거나 기피당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교회의 신자 수는 늘었지만, 복음적 삶의 실천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가난한 자와 한 편에 서라는 복음적 권고가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빈첸시오회가 한국 교회 안에 성장할 수 없지 않았을까 반성하게 된다. 한병은은 본당 내 레지오 마리애와 빈첸시오회와의 협동 활동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는 사도직 단체 간의 연대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2.3 꾸르실료
꾸르실료 운동은 1949년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는데, 한국에 전수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직후인 1967년이었다. 후안 에르바스 주교를 중심으로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은 처음에는 성직자가 주도하는 경향을 가졌다. 그러다가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이 일깨워지면서 꾸르실료 운동은 평신도와 성직자가 서로 협력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에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던 1960년대 한국 교회 안에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의식이 없었고 대체로 신자들은 소극적이고 타성적이며 수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도직 수행은 성직자나 수도자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고, 신자들은 계명 이행과 개인적인 기도 생활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었고 곧 신자 재교육의 장으로 그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꾸르실료가 교회 내의 지도자 단기 양성 코스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교회의 성장과 함께 꾸르실료 운동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회 내의 각 단체 책임자, 임원 및 사목위원등 대부분의 평신도 지도자와 성직자, 수도자들이 꾸르실료를 체험하고 교회 내에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꾸르실료는 그리스도교 정신과 생활을 사회 속에 구현하려는 신앙 쇄신 운동이다. 이상, 순종, 사랑의 실천을 창설이념으로 하는 이 운동은 개인의 성화와 교회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꾸르실료는 조직이 아니라 운동이며, 그리스도인을 훌륭한 주님의 사도로 만들기 위해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꾸르실료 운동은 3일의 꾸르실료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내적 변화로 이끌리는 회심의 여정이다. 즉, 자기와의 만남(하느님 체험)을 통한 정화의 길, 하느님과의 만남(회심 체험)을 통한 조명의 길, 이웃과의 만남(소명 체험)을 통한 일치의 길을 걷게 된다. 영성 형성의 3단계를 거치면서 하느님 사랑을 인식하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구체적 응답의 삶으로 초대받는 과정을 통해 꾸르실료의 영성이 형성된다.
3박4일의 교육을 받은 꾸르실리스따들은 신앙과 삶의 변화를 체험하였고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꾸르실료 교육의 효과에 대해 서울 27차 꾸르실료에 참가하였던 장대익 신부의 말을 빌어보면,
“3박 4일 동안 얻은 체험 한 두 가지 말해 볼까 한다. 첫째 3박 4일의 꾸르실료 교육이 매우 감격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까지 내 사제 생활은 제 시간에 미사 드리고, 별로 준비 없이 강론을 하고 예비 신자 교리는 수녀님께 맡기고 성사를 청하는 사람에게 그저 기계적으로 거행해 주고 혼배와 장례를 지내 주는 등 일종의 교회라는 체제 속에 ‘공무원’격의 생활을 반복해 왔음이 사실이었다. 사실 신부님이라는 명칭보다 사제 생활의 내용이 문제이며 사제는 사회와 고립되어 이색적인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생활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가 요구하는 참된 사제상인 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타성적인 사제 생활을 타파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꾸르실료 교육은 하느님의 큰 은총이었다. 이번 꾸르실료에서 나는 이제부터 ‘벼슬하는 신부’나 ‘신자들을 다스려 보려는 신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참된 사제 생활을 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꾸르실료 교육을 받은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들은 수동적이고 타성에 젖었던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었다. 꾸르실료를 통해 신앙심이 깊어졌고 특히 사도직 활동 자체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많은 꾸르실리스따들이 이 단기 교육 코스를 이수했고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회 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꾸르실료 운동은 전국에 걸쳐 크게 성장하였고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는 급성장하였고 꾸르실료 운동 역시 꾸르실리스따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때를 같이하여 냉담 신자와 냉담 꾸르실리스따가 속출되는 공동화(空洞化) 현상도 나타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꾸르실료 운동은 다른 사도직 운동과 마찬가지로 정체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꾸르실료 영성 연구소장, 유양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꾸르실료 운동은 처음 10년(1967-1977) 동안 한국 모든 교구에 전수됐고 초기의 봉사자들은 꾸르실료의 모습을 소박하고 충실하게 전했다. 그러나 다음 10년(1978-1987) 동안에는 소위 토착화의 명목으로 개정과 수정을 단행하며 꾸르실료를 소위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양성이라는 교육의 장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꾸르실료 영성의 본질이 왜곡되는 괴도 이탈 현상이 발생되었다. 남은 10년(1988-1997 및 현재)의 전반기는 특별한 여과 없이 전 10년의 꾸르실료의 모습대로 관성에 의한 동일한 지향으로의 세월이었으나, 후반기는 세계 협의회 의장국 피선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전환점이 되어 꾸르실료의 카리스마를 재확인하는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유양수는 꾸르실료의 본질이 개인의 성화이며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의 교육인데, 역사적 과정 안에서 토착화한다는 명분으로 꾸르실료 본래의 영성을 벗어나 평신도 지도자 양성 단기 코스로 변질되었음을 지적한다. 꾸르실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본래의 소명 의식에 강조점이 있으며 소명을 깨달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차영준은 “현재 많은 꾸르실리스따들이 배출되었지만 실천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막연히 투입됨으로써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지 방황하다가 주저앉은 상황이다. 앞으로 꾸르실료의 실천적 삶을 우선 구역과 반에서부터 시작해 그곳에서 실천적 뿌리가 깊어질 때 우리는 비그리스도적인 환경에 투입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한다. 단기간 영성 교육을 받은 후 그것을 삶으로 이어갈 실천의 장이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 꾸르실료가 35년 역사를 지녔고 꾸르실리스따가 10만 명을 넘어섰지만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 속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유양수는 삼천년기 새로운 도전 앞에서 꾸르실료가 감당해 나갈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3박 4일의 꾸르실료를 체험한 꾸르실리스따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3개월 이내에) 후속 프로그램을 이수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할 것을 제안한다.
둘째, 우리의 복음적 권고인 이상, 순종, 사랑의 덕목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꾸르실료의 구체적 삶의 영성(기도의 삶, 나눔의 삶, 핵심 그룹의 삶, 예수님 군사로서의 삶)을 제시해 줄 것을 제안한다.
셋째, 후속 프로그램에는 꾸르실료의 신원과 영성이 충분히 인식되도록 하는 내용이 구성되고 내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영적 수련의 내용이 내재되도록 구성되기를 제안한다.
넷째, 팀 회합과 울뜨레야의 진행 순서는 행사나 방법의 제시보다는 기도와 수련의 의미가 부각되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꾸르실료는 본래 영성을 충실하게 하면서도 구체적인 현실에서 꾸르실료 영성을 확산시킬 수 있는 장을 찾고 있다. 또한 외형적인 행사 위주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기도와 수련에 충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한국 교회 내의 사도직 운동은 1950-60년대에 시작하여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빠르게 성장하였고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사도직 단체들은 위기를 겪고 있다.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진단을 하고 대안을 마련해 보지만 큰 실효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도직 단체들은 성장 부진의 원인을 그동안 양적 성장에만 치중해 왔고 내적 영성의 심화를 소홀히 하였던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도 본래의 사도직 영성을 회복하고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직 운동이 위기를 겪던 1990년대에 소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변동과 관련이 깊다. 한국 사회는 한국 전쟁 이후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근대화의 과정을 겪었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가 촉진되었고 천주교회로 찾아오는 신자들의 수도 급격하게 늘었다. 사도직 운동은 이러한 천주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하였다. 그러나 점차 도시 본당들이 대형화되고 성직자 중심의 관료적인 조직으로 통제가 되면서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줄어들게 되었다. 도시 산업화에 따른 발전은 빈부의 격차와 계층간의 갈등을 낳았는데, 제도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반영되었다. 본당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사목 방침이 세워지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본당의 비대화와 내적 공동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가난, 나눔, 섬김의 삶을 외면하였고, 본당 신축, 신자들의 중산층화, 대화 단절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1990년대에 들어서면 한결같이 영성의 부족을 말한다. 신자들은 활동 위주의 신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영성의 내적 심화를 갈구하게 된 것이다. 성사 중심, 전례 중심, 성직자 중심의 사목이다 보니 사제들은 과다한 사목 업무에 시달리고 권위적인 자세로 임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타율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되고 사목자와 신자들 상호간 대화가 단절되고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만남으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고 냉담자도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러한 모순 현상이 교회 안에 드러나는 시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친교의 공동체”로서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소공동체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3. 소공동체
소공동체는 사도직 운동 혹은 사목적 전략이 아니다. 소공동체는 신심 단체 혹은 수도회 활동도 아니다. 소공동체는 교회 자체로 존재한다.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새로운 교회상을 지향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교회론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에 바탕을 둔 ‘친교의 교회론’이다. 친교는 “그리스도인 각자와 그리스도의 친교,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친교”를 뜻한다. 『교회헌장』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신비체’로 정의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며 표지’이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인데 즉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가 하나된 공동체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는 공동체로서의 모습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공동체가 제안되는 것이다.
소공동체는 교회의 쇄신과 새로운 방향의 사목을 요구한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가 주인이 되는 교회를 지향한다. 위로부터 하향식의 수직적인 교회 구조를 탈피하여 하느님 백성들이 서로 평등하게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수평적 교회로 나아간다. 교계 제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그 권위의 근거가 주어진다. 사목자들은 관리자나 교사가 아니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으로 변신해야 한다. 소공동체 사목은 단순히 교회가 대형화 되고 도시 본당이 비대해져서 신자들을 잘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소공동체는 현대 사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의지대로 가장 가난한 자, 가장 버림받은 자를 공동체 안에 받아들이고 공동체와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모여 그 사랑을 가난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칼 라너는 미래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미래의 교회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창의력과 자유로운 결합에 의하여 생겨나는 기초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억제하지 말고 촉진하면서 그것이 올바른 궤도를 달리도록 전력으로 경주해야 한다…그런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전승되어 온 복음의 메시지와 그리스도교로부터 유래하는 사도적 전승의 직무에 의하여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든 오늘과 내일의 교회가 과거에 비해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아래로부터 발생하는 동시에 복음의 부름과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메시지에 의하여 발생하는 그런 기초 공동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아직 분명하지 못하며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소공동체는 교회가 가야 할 하나의 새로운 길이요, 교회 역사의 새로운 전형이다. 소공동체는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와 쇄신을 목적으로 한다. 소공동체는 미래 교회의 밑그림이다. 소공동체는 21세기라는 새 술을 담기 위한 새 부대인 것이다.
4.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과의 관계 정립
소공동체를 교회의 미래상이라고 할 때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간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 하나의 과제로 떠오른다. 신자들은 소속감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던 단체 중심의 신앙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각 사도직 단체들은 자신의 역할과 중요성을 지키려고 한다. 여기서 오는 인식 전환과 관계 설정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월기 신부는 “그동안 많은 신자들이 레지오를 비롯한 다른 단체 활동도 많은데 소공동체 모임까지 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기존 단체는 단체대로 나름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이에 반해 소공동체에 대한 신자들의 의식이 부족한 만큼 이러한 난관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소공동체는 사도직 단체와는 구별된다. 사도직 단체들은 특수한 기능이나 카리스마를 드러내지만 소공동체는 교회의 다양성을 일치 안에 통합하고 드러낸다.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여러 가지 카리스마가 증진될 수 있고 다양한 카리스마를 하나의 공동체 안으로 통합할 수 있다.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한 각 사도직, 신심 단체들의 성장과 더불어 소공동체 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효율적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의 관계는 소공동체의 바탕 위에 사도직 단체들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 단체들과 어떻게 원활하게 협조하면서 서로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4.1 소공동체에 대한 공감대 형성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소공동체가 미래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사목자와 신자들이 공감하는 일이다. 초대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 서로의 삶과 신앙을 나누고 성장시키는 기초가 바로 소공동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새 천년기 한국 교회의 미래상을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에 대해 각기 다른 맥락에서 이해하므로 계속해서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 있다. 미래의 교회상에 대해 서로 공감할 수 없다면 소공동체는 결실을 맺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향하고 복음의 원천이 지시하는 교회상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교회의 본래 모습이며, 현대 사회 안에서 그러한 이상형은 소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하느님 백성 안에 형성되는 일이다.
4.2 평신도의 자발성
신자들의 자발성이 결여된 소공동체는 교계 조직의 하부 구조일 뿐이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 소공동체는 아직 대부분의 경우 사목적 편의를 위하여 구성된 본당의 하부 조직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소공동체가 시작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소공동체가 활성화 되지 못한 이유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사목자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소공동체의 본질은 평신도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은 사목자가 지시하고 평신도가 따라가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도직 운동들이 한국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평신도들의 각성과 적극적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번성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도 평신도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선교에 나서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얼마나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소공동체가 활성화되는 정도도 달라질 것이다. 아직도 신자들은 소공동체보다는 자율성의 폭이 넓은 기존의 사도직 단체에서 활동하길 더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한다. 소공동체가 활성화 되려면 평신도들이 스스로 “우리가 교회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직무를 실천하는 평신도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하겠다. 소공동체가 교회의 존재(Being)이고 사도직 단체들은 교회 안의 활동(Doing)임을 이해한다면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 사이의 관계 정립은 쉬워질 것이다.
4.3 권위주의의 청산
21세기 천주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로서 성직자의 권위주의가 지적된다. 특히 소공동체에서 성직자의 권위주의는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박기주 신부는 사제들의 권위주의가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므로 그 걸림돌을 치우는 일도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권위주의라는 걸림돌을 치우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결정권을 위임하고, 본당 차원의 의사 결정 과정에 평신도를 참여시켜야 하며, 소공동체를 자주적인 성숙한 공동체로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도직 단체와 소공동체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사제의 권위주의는 많은 폐해를 낳는다. 소공동체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제가 독단적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해체시키거나 지역으로 재편할 때,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교회는 권위적인 위계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표지이다. 사제는 사목자로서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하고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4.4 사도직 단체들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방향
앞에서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 활성화 되었던 사도직 운동으로 레지오 마리애, 빈첸시오회, 꾸르실료를 살펴보았다. 각 사도직 단체들은 나름의 목적과 영성 및 활동을 가지고 있다. 레지오는 평신도가 주체적으로 선교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하며, 빈첸시오회는 복음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중점을 둔다. 꾸르실료는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도직에 투신할 수 있도록 각성시킨다. 그러한 사도직 단체들이 지향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도직 단체들의 내용을 단순화시키면 다음의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주목적 | 조직 | 회합 | 영성 | 활동 | |
레지오 | 선교 | 1. 쁘레시디움 2. 꾸리아 3. 꼬미시움 4. 레지아 5. 세나뚜스 6.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 매주 1회 | 성모님의 깊은 겸손과 온전한 순명, 믿음의 덕을 따름. | 입교 권면 예비자 돌봄 교우 돌봄 어려움을 겪는 분 돌봄 레지오 확장 본당 협조 기타 사항 |
빈첸시오 | 자선 | 1. 본당 협의회 2. 지구 이사회 3. 교구 이사회 4. 전국 이사회 5. 총 이사회 | 매주 1회 | 가난한 사람 안에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발견 가난한 이웃 안에서 하느님 섬김 | 환자 방문 극빈자 가정 방문 교도소 재소자 방문 사회 복지 시설 방문 가출 청소년 지도 행려자 무료 급식소 및 단기 이용 시설 등 |
꾸르실료 | 교육 개인 성화 교회 쇄신 | 꾸르실료 (3박4일) 울뜨레아 | 하느님 사랑을 인식하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구체적 응답의 삶으로 초대받음 | 각자의 현장에서 활동 |
각 사도직 단체의 활동들은 소공동체가 실천 과정에서 제시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가 추구하는 영성이나 활동들이 현실적으로는 이처럼 서로 겹쳐 있다. 다만 소공동체는 이 모든 사도직 활동을 포함하지만, 각 사도직 단체들은 어느 한 부분을 특화시켜 집중한다. 소공동체는 교회의 존재(Being)이고 사도직 단체들은 교회의 활동(Doing)이라고 할 때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소공동체라는 큰 틀 안에 사도직 단체라는 활동들이 포함될 수 있는 관계이다. 소공동체는 각 사도직 단체의 활동들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할 것이며 사도직 단체들은 소공동체와 연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빈첸시오회가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없었는데, 본당의 소공동체들이 빈첸시오회를 뒷받침해 준다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실천이 훨씬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혹은 꾸르실리스따들이 실천의 장을 소공동체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사도직 활동의 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4.5 소공동체의 심화
소공동체는 복음 나누기를 중심으로 가정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지역 사회 안에서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을 한다. 그런데 신자들은 지금의 소공동체를 통해 영성의 심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형식적인 활동에 머문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소공동체 교육이나 조직, 기도, 영성, 활동 면에서 신자들의 만족도는 낮은 편이다. 복음 나누기는 성서 공부보다 깊이가 낮다고 여기고, 회합은 레지오보다 느슨하고 조직력이 떨어진다고 느끼며, 영성의 깊이도 꾸르실료나 빈첸시오보다 얕다고 생각한다. 즉, 소공동체에 대한 매력이 다른 사도직 단체보다 낮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자들 스스로 소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올 수 있도록 소공동체가 지향하는 내용이나 방식, 영성적 의미 등이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심화 과정을 기존의 사도직 단체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꾸르실료가 소공동체 지도자 교육에 도입될 수도 있을 것이고, 빈첸시오의 영성이나 활동이 소공동체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으며,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 방식은 소공동체의 실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사도직 단체들과 소공동체는 함께 협력하면서 미래 교회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5. 나가면서
한국 교회 내의 사도직 운동은 1950-60년대에 시작하여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빠르게 성장하였고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사도직 단체로서 레지오 마리애와 빈첸시오회, 꾸르실료를 살펴보았다. 평신도 사도직 운동은 한국 초대 교회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순교의 열정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 사도직 단체들은 위기를 겪고 있다. 사도직 단체들은 성장 부진의 원인을 그동안 양적 성장에만 치중해 왔고 내적 영성의 심화를 소홀히 하였던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도 본래의 사도직 영성을 회복하고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로 이행되는 한국 사회의 변동과 관계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본당의 비대화와 내적 공동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가난, 나눔, 섬김의 삶을 외면하였고, 본당 신축, 신자들의 중산층화, 대화 단절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신자들은 타율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되고 사목자와 신자들 상호간 대화가 단절되고 인격적 만남이 어려워졌다. 친교에 바탕을 두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할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위해 일부 사목자들을 중심으로 소공동체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는 소공동체 담론이 형성되고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목적 실천들이 제안되었다.
그런데 소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도직 단체들과 마찰이 생겨났다. 신자들은 사도직 단체에서 활동하길 선호했고 사목자들은 소공동체 사목을 활성화하기 위해 소공동체 위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 간의 갈등이나 대립이 조장되었고 사목자와 신자들 사이의 의견 대립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을 모색해 보았다. 신자들이 소공동체를 또 하나의 사도직 단체로 인식할 경우 그 마찰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소공동체가 복음의 원천에 충실하면서도 현대 사회 안에서 본래 교회상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임을 이해한다면 소공동체와 사도직 단체들간의 관계 정립은 쉬워질 수 있다. 소공동체는 앞으로 가야 할 교회의 모습이고 사도직 단체들은 그 틀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소공동체가 21세기 미래 교회상이라는 공감대를 먼저 형성하는 일이다. 그 다음으로 소공동체가 활성화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은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이어받아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한다. 소공동체의 활성화는 그러한 평신도 사도직을 얼마나 세상 안에서 실천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해 있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사제들은 봉사자로서 거듭나야 한다. 교회 안의 지도자는 군림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모습 속에 지도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각 사도직 단체들의 영성과 특성이 소공동체의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겠다. 사도직 단체와 소공동체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소공동체라는 큰 틀 안에서 각 사도직 단체들의 특수한 기능이나 카리스마를 펼칠 수 있도록 상호 도와 주는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자들이 소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도록 소공동체의 영성을 심화시키고 그 활동을 넓혀나가는 작업들이 병행되어야 하겠다.
소공동체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이다. 소공동체는 미래 교회의 밑그림이다. 소공동체라는 밑그림 위에 각 사도직 단체들이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살리면서 복음화의 결실을 맺게 되길 기대한다.
첫댓글 오래전에 쓰신 글인데 한국천주교 사도직 실태조사에 대한 글 ...정말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하느님 백성 스스로가 제대로 교육되어 있어야 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것이란 기본과 본질이 튼튼한 바탕을 말합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이것이 허약해졌습니다. 아예 의식조차도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