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 목 명: |
일본 문학과 문화 |
학 과: |
|
학 번: |
|
성 명: |
이 성 명 |
제 출 일: |
2002. 11. 20.( 수 ) |
담당교수: |
e-mail : thisname@hanmail.net
목 차
(3)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었던 우끼요에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공유(公有)의 미(美)” - 우끼요에(浮世繪)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 많은 관계를 가져온 나라는 당연, 중국과 일본 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세 나라는 많은 부분에서 비교가 되어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해,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우리나라는 일본과 비교할 만한 상대도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세계 전역에 굵직하게 뿌려져있는 그들 회사의 브랜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비단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측면 또한 일본이 월등히 우세하다. 애니메이션의 강국으로 군림하는 것과, 우리의 김치를 응용해서 서구의 입맛에 맞게 조절해 일본의 이름(기무치)으로 세계에 내 놓음으로써 일본음식의 세계화를 꾀하는 것 등은 그것을 잘 뒷받침해 준다.
과거 우리에게서 문화를 배워갔던 그들인데, 왜 이렇게 상황은 역전되어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반드시 얻고 싶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특정 국가가 미워서가 아니다. 다만 같은 하늘아래,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질적으로 떨어지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불쌍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繪)1)를 통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우끼요에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끼요에는 많은 사람들의 공유(公有)가 낳은 예술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공유(公有)의 미(美)”라는 것은 비단 ‘우끼요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모든 문화(예술)적인 요소에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문화의 위치를 굳힐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바로 “공유(公有)의 미(美)”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우끼요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끼요에라는 것은 에도시대 서민생활을 그렸던 풍속화이다. 원래 ‘우키요’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우키요’란, 내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무상하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 현세(現世)를 의미하며 여기에는 불교적인 염세관(厭世觀)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무로마치 시대 말기를 기점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즉, “현대적이고, 그 시대에 잘 어울린다”는 뜻을 가지게 된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시대상의 차이 때문이다. 과거 민중들은 지배계층의 과중한 세금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다. 하지만 에도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사회적으로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부를 모으게된 상인계층은 그 수적 규모도 늘려가며 시대문화의 대중으로 등장하게 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러한 그들에게 현세는 더 이상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대중의 힘을 업고 등장한 ‘우키요’라는 것은 긍정적인 밝은 의미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다른 문헌에 의하면 우키요는 ‘호색적(好色的)이다’는 의미도 가진다.2) 왜 호색 적이란 말인가? 그것은 우끼요에의 주체세력이 죠닌이었기 때문이다.
전란의 센코쿠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소총부대에 의해 진압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러서 막부는 대단히 안정된 지배정권을 누리게 된다. 당시 죠닌은 상∙공업에 종사한 계층이었다. 당연 무사가 지배세력 이었고, 한편으로는 천황과 공가세력이 있었다. 그 밑으로 농민이 있었고, 이들은 국가경제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상∙공업 분야는 중요치 않았음으로 자연히 죠닌 계층은 천민이나 노예 마냥 생각되어 졌다. 그러나 1543년 포르투칼인에 의해 총 두 자루가 전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은 외국과 교류를 하게된다. 남만무역3)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밀무역도 일본의 상업발달을 촉진 시켰다. 이런 사회적 변화로 상인계층은 무역을 통해서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키워나간다. 조카마치란 영주 성 주위의 시장인데 여기서 그들은 무사들에게는 생필품을 제공하고, 농민에게는 농기구 판매를 하는 등, 점차 경제적으로 힘을 키워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1일 3식의 식문화가 일반화 된 것과 쌀밥을 먹게되는 것도 바로 이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죠닌들은 그 옛날 공가와 무가만이 향유했던 “문화”라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기초를 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강력한 막부체제 하에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무가를 능가하는 죠닌이 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무사들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넘쳐나는 부를 유곽 같은 곳에서 유흥비로 지출하게 되고, 이러한 이유로 죠닌의 문화는 상당히 성(性)적인 면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우끼요에를 말할 때 호색적이다는 표현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우끼요에를 통한 공유의 미는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인가?
우끼요에는 17C 중엽 히시카와 모로노부(1618~1694)의 육필화 “뒤돌아보는 미인도”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미인도라는 것은 유곽에서 벌어지는 유녀4)의 섹시한 포즈나, 가부키5) 연극배우, 또는 일반 서민여성을 대상으로 그려졌다. 미인도를 주로 그린 화가는 스즈키 하루노부이다. 그런데 그의 전체 우끼요에 작품 중, 30%가 춘화6)(Shunga)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대중이 그러한 그림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대중은 그저 먹고살기 급급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기 경제력이 향상된 죠닌계층은 의∙식∙주 해결 이외의 문화향유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가부키 연극을 관람한다든지, 유곽에서 유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었고, 누군가 예쁜 유녀를 그린다면, 그것을 자기도 가지고싶어 했을 것이다. 그 이전의 무로마치 시대 때, 무가들은 정원을 만들고 다실을 만드는 등, 정적인 미를 추구했었다. 그러나 죠닌들은 그들을 따라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관심분야를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누가 우끼요에 그림을 천박(淺薄)하다고 하는가? 그것은 죠닌계층을 천박하게 생각해서이지, 우끼요에 그림은 민중의 관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술이었던 것이다. 죠닌 계층은 주자학의 틀에 얽매인 공가와 무가들과는 달리, 아주 과감하게 자신들을 표출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끼요에 그림이 단지 춘화만을 다루었던 것은 아니다. 막말이 되면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후지산 36경”을 그리는 등, 자연을 대상으로 그린 것도 있었다. 또 도슈사이 샤라쿠는 가부키 연극배우들을 그렸다. 그는 배우들의 개성을 날카롭게 잘 파악해서 그야말로 사실적 묘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붓을 놓은 것을 보면 당시 서민(대중)들로부터 인기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끼요에라는 것은 수많은 죠닌들7)이 서로의 관심사를 같이 공유함으로써 이끌어낼 수 있었던 예술이었다. 제아무리 샤라쿠가 사실적인 묘사를 잘했다고 한들,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있는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뒤돌아보는 미인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끼요에가 처음부터 목판화로 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히시카와는 자신의 그림이 서민에게 인기가 크지게 되자 우키요 그림의 판화를 만들어 싼값에 그림을 대량으로 공급하였다. 이 제작방법의 특이함이 대중에게 급속도로 퍼질 수 있게 했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새로운 기법의 회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서민이 자신들의 요구를 상호 공유함으로써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모로노부가 “뒤돌아보는 미남도”를 그렸다면, 이러한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었던 우끼요에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우끼요에는 에도시대 서민생활을 묘사해, 죠닌들의 공유된 문화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공유의 길도 열고 있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가쿠 36경은 후지산의 모습을 36가지의 다양한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왜 같은 산을 여러 개 그렸을까? 하나의 사물이라 해도 여러 면에서 보면 그 느낌이 틀리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했을 때 진정한 사물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도 있다. 후지산은 일본의 대표적인 산이며, 일본인 모두의 마음속에 천황과 같은 존엄함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산이 우끼요에로 그려짐으로써 후지산은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기호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우끼요에 그림의 특징상 간결하고 필선이 뚜렷하여 누구나 한번만 보아도 무슨 그림인지 확연히 알 수 있으며, 또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지산 36경”에 영향을 받은 그림이 있다. 바로 “에펠탑 36경”이다. 이것은 우끼요에의 특징인 색체의 강렬함이 서구 화가들의 구미(口味)에 딱 맞아 떨어졌음을 암시한다. 즉 우끼요에로 인해 서양과 일본사이에 문화의 공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4) 고흐8)-죠닌 문화를 공유하다.
1854년 페리 내항을 계기로 일본은 서양과 본격적인 교류를 하게된다. 이 때 일본의 도자기들이 대거 유럽으로 유출되게 된다. 이들 도자기들은 우끼요에 그림이 그려진 종이로 포장되어 전해 졌다. 막말 이후 사회 혼란과 더불어 우끼요에의 유행도 사라지는 시기여서 우끼요에 그림은 그렇게 부담 없이 유럽으로 막 넘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모네9)는 구겨져서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우끼요에 포장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지금껏 자신들이 사실주의에 구속되어 어둡게만 그렸던 그림과는 그 인상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선명한 색체로 밝은 화면을 구성하는 우끼요에 그림은 고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흐의 초기 작품을 보면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보이듯이 너무나 어둡고 우울해 보인다. 그러나 우끼요에를 접한 고흐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고흐는 3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간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택해보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 고흐, 그는 만족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나는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16세 때 런던에서 화상점원으로 일한다. 그 때 하숙집 주인의 딸인 우슐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우슐라는 약혼한 몸이었다. 그럼에도 집념이 강한 고흐는 우슐라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집념이 강한 고흐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회의 룰(rule)을 따르지 못한 그의 행동은 바람직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결국 우슐라는 약혼자와 결혼하게 되고 그는 첫 실연을 겪는다. 후에 과부이자 네살박이 애엄마인 사촌 키 보스를 연모하게 되는 것과 병든 임신 창녀인 시엥을 사랑하는 등 비정상적인 사랑을 스스로 하게된다. 급기야는 그가 태도를 어떻게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40이 가까운 이웃여인 마고 베제만이 고흐에게 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베제만 가문에서 반대했다. 그러자 베제만은 독약을 마셔버렸다.
이렇게 고흐를 스쳐간 여자만을 생각해 봤을 때에도 그는 사회적응을 제대로 못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로 인해(자신이 스스로 원해서였든 아니였든간에) 그의 삶은 극도로 암울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그는 '감자 먹는 사람들(Les Mangeurs de pommes de terre)'을 완성한다. 굳이 밀레의 사실주의적 화풍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의 어두운 삶 자체가 그림으로 나왔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1880년 30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 1885년 초기 작(作),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한다. 1886년 파리에서 당시 유행했던 쟈포니즘(Japonism)에 끌리게 되고 특히 우끼요에 작품에 매료된다. 그 뒤 1888년 프랑스 아를10)로 이주하고 본격적으로 우끼요에와의 사랑을 시작한다. “아를의 도개교(跳開橋)”는 우끼요에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로 다리를 택한 것이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보여준 것과는 확연히 다른, 즉 우끼요에에서 나타나는 밝고 강렬한 색조가 유감 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우끼요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탕귀영감의 초상(1887)”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탕귀영감의 손과 자켓(Jacket), 그리고 모자의 윤곽선이 굵게 표현된 것은 둘째 치고라도, 배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우끼요에 그림들을 보게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탕귀영감이 들으면 기분 나쁜 말이겠지만, 이것은 일본의 우끼요에를 그리려고 한 것인지, 탕귀영감을 그리려고 한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그만큼 아를 시기에 있어 우끼요에는 고흐에게 소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를에서의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11)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것을 고흐가 공유의 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특정 엘리트(elite) 계층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아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무로마치 시대 무가들은 다실 안에서 자기 그룹끼리 행복해 하고 말았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거대 죠닌계층은 자신들의 힘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또 스스로 발전시켜 (육필화 → 목판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유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함을 내장하고 있는 예술인 데다가, 그 독특한 공유성으로 말미암아 유럽에서 하나의 화풍(인상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고흐는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이제까지 자기네들이 그린, 어둡고 칙칙한 그림이 이 세상을 진실로 표현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우끼요에’에서 펼쳐지는 원색의 밝은 세상이 고흐시대의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1775년 미국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 등을 생각해보면 고흐가 살았던 1880년대는 시민들에게 희망이 보이는 시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앞으로 그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감(感)잡은 고흐는 이것을 자기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공유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우끼요에가 그랬듯이 좀더 발전된 예술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갱과의 공동생활은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고, 결국 고갱과의 말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하지만 귀를 잘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거듭된 실연으로 인해 신경과민 증세가 있었을 것임으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다만 그가 훌륭한 문화(예술)을 공유하려다 생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성이 있다.
(가) 드뷔시12)
19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쟈포니즘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으며, 그 여파는 음악분야에도 나타나게 된다. 작곡가 드뷔시는 우끼요에를 직접보고 감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고흐 같은 인상파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새로운 음악을 생각하게 된다. 즉, 전통적인 수법에서 탈피하고 현실에서 얻은 인상을 주관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결국 드뷔시는 말라르메13)의 시(목신14)(牧神)의 오후)에서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다. 이 음악을 직접 들어보면, 초반부에는 여름날 오후 나른해 하는 목신의 모습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중반부에서 서서히 음악이 빨라지고 소리가 커진다. 초반부가 너무 조용하다 보니까 이 때쯤 되면 심장이 막 떨릴 정도이다. 음악을 잘 모르는 문외한(門外漢)이지만 바로 이 부분이 목신이 사랑의 신 비너스를 껴안는 대목이라는 것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과연 우끼요에에서 느껴졌던 강렬함과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
265년 간의 강호시대에 일본에서는 이처럼 우끼요에 화가들이 날뛰고 있었는데 같은 시대, 같은 직종의 사람인 우리의 김홍도(1760~몰년 미상)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지금껏 일본의 풍속화, 우끼요에를 조사해 오면서 왜 우리에게는 이러한 문화(예술)이 없었을까 낙심했었는데, 흥미 있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던 카부키 연극배우 그림의 대가, ‘도슈사이 샤라쿠’가 김홍도 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15) 샤라쿠는 1794년부터 약 10개월 사이에 140여명의 배우 초상화를 그리고 사라졌다고 하니,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설의 진위여부가 아니다. 일본의 우끼요에와 김홍도, 그리고 서양의 사실주의 사이의 관계를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샤라쿠는 주로 가부키 연극배우를 그렸으며 그 작품이 미화(美化)의 묘사가 아닌, 연기자의 역동적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일본이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화를 들여왔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고, 샤라쿠 역시 그 서양화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12번에 걸친 조선통신사 파견이 있었고 이 때 파견 인원이 약 5백명 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행렬에는 화원(畵員)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굳이 김홍도가 아니더라도 일본의 우끼요에는 조선의 풍속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았듯이 우끼요에는 자력으로만 성장해 타문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고, 애초에 타문화를 흡수(공유)해 자문화 함으로써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는 참으로 빠르게 변화해 가는 듯 하다. 하루가 다르게 경쟁적으로 출시하는 신제품들이 그러하고, 그러한 회사들의 합병이나 파산 등으로 인한 경제의 흐름도 예측을 불허할 정도이다. 특히 I. M. F 이후로는 우리들의 주된 관심사가 경제 쪽으로 흐르면서 실세 없이 변동하는 주식 시세만큼이나 우리들의 생활도 바빠 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잊고 지내는 것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사회라는 것은 결코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 송경아씨는 2002. 11. 1.(금)일자 한겨레신문(여론편)에서 예술인 복지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문화∙예술이란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것이며, 삶의 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전체의 것이기에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인위적으로 길러내 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공업제품을 만드는 시장경제논리로 예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예술가의 역할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정태춘의 노래를 서태지의 노래로 대체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기계제품을 생산할 때 큰 공차를 두어 Φ9.5㎜ 직경의 Shaft(축)이 없을 경우에는 표준화된 Φ10㎜ 직경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그녀는 위의 3가지 이유를 말하며 월수입 30만원도 되지 않는 현 우리사회 예술가들에게 최저임금(51만 4150원) 생활은 하게 해주어야 되지 않느냐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우끼요에를 통해 문화공유의 중요성을 인식한 지금, 우리는 이 말을 쉽게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예술가들에게 최저임금생활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 줄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끼요에의 죠닌계층이 그러했듯이 서로가 문화를 공유하려는 의지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에도시대의 작은 예술, 우끼요에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나에게 하나의 회화장르로만 남아 있지는 않다. 정열적인 수많은 죠닌계층의 관심, 그로 인해 가질 수 있었던 색체의 강렬함, 그리고 바다를 건너는 문화의 공유를 생각해 봤을 때, 우끼요에는 분명, 우리가 이 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엮어가야 하는 가를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이 시점에서 우끼요에의 실체를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다. 우끼요에는 많은 사람들의 공유(公有)가 낳은 예술이었으며, 그 예술의 속성은 “공유(公有)의 미(美)”였던 것이다.
※ 참고문헌
1. 일본문화사(이에나가 사부로 지음. 이영 옮김. 2002. 까치글방. p.173~229)
2. 일본을 강하게 만든 문화코드 16(윤상인외 15명. 2000. 나무와 숲. p.192~206)
3.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박경희 엮음. 1999. 일빛. p.258~359)
4. 일본 문화사(홍윤기 지음. 2000. 서문당. p.347~369)
5. 고흐가되어 고흐의 길을 가다.(노무라 아쓰시 지음. 김소운 옮김. 2002. 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