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는 판소리의 서천에서 꽃피운 중고제 판소리와 여기에서 파생돼 분화 발전한 판소리의 여러유파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김성옥-김정근-이동백·김창룡으로 이어지는 중고제의 맥과 내년 개교할 ‘문헌서원 중고제 전승 프로그램 학교’에 대해 알아본다. ◇진양조의 창시자 김성옥 판소리에 진양조를 도입하여 판소리 역사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김성옥(1801~1834)은 강경 출신으로 좋은 성음을 가지고 있었다. 요절한 천재 명창으로 알려진 그는 계룡산 암굴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수련했는데 이 탓인지 무릎이 부어올라 앉은뱅이가 되었다 한다. 1940년 조선일보사가 간행한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익산 웅포에 와서 살던 처남이자 명창인 송흥록(1780년경~1863년경)이 종종 병문안을 왔는데, 어느 때 찾아가서, “근래는 병세가 어떠하며 과히 고적하지나 아니한가” 의 의미를 담은 말을 늦은 중모리로 부르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 대 김성옥은 병석에서, “고독의... 비애를... 느끼거니와 요즘은... 무릎이 몹시... 아프이 ” 라는 의미의 느린 장단으로 화답하였다. 느린 24박의 장단으로 대꾸한 선생의 음색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불구의 고초를 실었던 것이다. 12박을 두 배로 늘려 부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으나 송흥록은 그 소리를 듣고 벼락을 맞은 듯 눈을 번쩍 떴다.<조선창극사> 이 때까지 중모리만 있었지 진양조는 없었다. 송흥록은 이 소리를 처음 들은 후 일대의 신발견이라 칭송하고 이를 다년간 연마하여 이 장단의 완성을 보았다. 그의 동생이자 김성옥의 고수였던 송광록에 의해 진양조는 널리 퍼졌으며 김성옥은 진양조를 책택한 중고제의 시조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고제 상궁접의 창시자 김정근 순조~철종 대에 권삼득,?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신만엽, 박유전, 김제철 등 이른바 판소리 8명창이 활동했는데 일찍 타계한 관계로 김성옥은 여기에 넣지 않는다. 이 시기에 김성옥의 소리는 아들 김정근(생몰연대 미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강경에서 출생하여 서천 장항으로 이주했는데 그가 살던 곳이 오늘의 장항읍 성주리로 추정되고 있다. 다음은 <조선창극사>에 실려있는 김정근과 관련된 내용이다. “김정근은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의 아들로 충청도 강경에서 출생하여 철종, 고종 양대산에 ‘무숙이타령’으로 과히 명성이 있었다. ‘상궁접’이라는 곡조를 창시하였으니 조선 소리의 곡조는 김문[김성옥의 가계]에서 거의 다 되다시피 한 것이다. 문인으로는 현대 명창 이동백이 있다.” 상궁접은 느릿느릿하고 유연한 음조로 고아한 아취와 점잖은 품격이 느껴지는데 시조에 능통했던 김정근이 정가를 판소리에 수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근 외에도 중고제를 계승한 명창에 공주 출신의 김석창, 황호통, 박상도, 서천 한산 출신의 임창학, 정홍순 등이 있었다 한다. ◇이동백의 생애 | | | ▲ 이동백 명창 동상. 옛 원각사터인 서울시 중구 정동극장 앞마당에 창극운동을 주도했던 이동백선생을 기념하여 1999년 세움. |
명창 이동백(1866~1949)은 충청도 비인현 도만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 해에 부친을 여의고 백부 슬하에서 자랐다. 8세부터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했으나 소리에 흥미를 느껴 13살 때에 명창 김정근의 문하에 들어 본격적인 판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전북 순창의 판소리 이론가였던 김세종에게서도 5년간 공부했지만 혼자 소리를 연마 명창이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세 전후 그는 도만리 희리산 중턱에 굴을 뚫고 2년간 혼자 소리를 연마했다. 토굴에 든 지 100일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몸을 추스르고 다시 굴로 올라왔다 한다. 이렇게 하여 판소리에서 으뜸으로 평가받는 크고 구성진 ‘수리성’을 얻었다 한다. 득음을 한 이후 경남 진주 이곡사에 들어가 3년간 공부했고 창원 읍내에서 9년간 거주 했다. 이 때 경상관찰사 이지용의 부름을 받아 ‘적벽가’ 가운데 장판교 대전 한 대목으로 감동을 시키면서 이지용의 후원을 받게 된다. 46세에 서울로 올라갔고 고종의 총애를 받아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90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원각사(현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 창설에 참여했으며 김창환, 송만갑 등과 함께 원각사에 들어가 창극 공연에도 힘을 쏟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후 송만갑 등과 함께 지방 순회공연에 나섰으나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지방 순회 공연은 중단됐다. 1915년 서울 낙원동에 장안사와 연흥사라는 한국인 극장이 문을 열었는데 이동백은 송만갑, 김창룡, 한성준, 장판개, 강소향, 배설향 등과 규합하여 이들 한국인 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고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신파에 밀려 판소리와 창극의 흥행에 실패를 거듭하자 1933년 송만갑, 정정렬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 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 정립에 주력했다. 신파극의 영향을 받아 춘향가, 심청가 등을 새롭게 윤색하여 공연했는데 이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김창룡, 정정렬, 송만갑 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이동백은 1939년 부민관에서 은퇴 공연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1940년 조선음악협회가 창립되면서 이 아래에 방악부와 조선악부가 생기면서 조선성악연구회는 7년 만에 해체됐다. 김성옥-김정근으로 이어지는 중고제를 계승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명창 이동백은 일제 치하 판소리 쇠퇴기까지 겪은 한국 판소리사의 역사 그 자체이다.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다. 은퇴 이후 1949년 6월에 경기도 평택군 칠원리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창룡의 생애 | | | ▲ 김창룡 명창 |
근대 판소리 5명창으로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유성준을 꼽는데 김창룡(1872~1943)도 이에 들어간다. 그는 중고제의 창시제인 김성옥의 손자이자 김정근의 아들로 서천 장항 횡산리에서 출생했으며 이동백과 함께 아버지 김정근으로부터 소리를 배워 중고제의 맥을 이었다. 32세 때 서울에서 원각사가 조직되자 김창룡은 원각사의 이동백 등과 합류했으며, 이후 연흥사의 창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송만갑, 이동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창극 공연에도 참여했다. 그는 음반 취입을 많이 해 전하는 소리도 많이 이있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 했다 한다. 그의 음반은 판소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창극사>에는 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근(1940년 직전)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과 제휴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여 원로로서 음악 소장배 지도에 게을리 아니하며, 종종 라디오 방송을 한다. 자가법제의 법제를 계승한 만큼 고곡미가 다소 있고 천품 성대가 좋아서 며칠을 계속하더라도 상하지 않는 점은 장하다.” 1943년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향년 72세로 타계했다. ◇‘문헌서원 중고제 전승 프로그램 학교’ | | | ▲ 종천면 도만리 이동백 명창이 태어난 마을에 이동백 명창 생가지와 득음터 등을 잇는 답사코스가 있다. |
서천군은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중 이동백, 김창룡 명창을 배출한 고장임을 알려 옛 명성을 되찾고 지역주민의 판소리 교육과 향유를 위해 중고제 판소리 학교를 운영한다. 중고제 판소리 학교는 문헌서원에서 내년 1월 10일부터 내년 말까지 매주 토요일 운영되며, 청소년반(오전9시~오전12시)과 성인반(오후 1시30분~오후4시 30분)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중고제 판소리 학교를 이끌어 갈 박성환 중고제판소리연구원 대표에 따르면 이동백은 강장원(1909~1962), 정광수(1909~2003) 등에게 소리를 가르쳤는데 국립국악원 초대 민속단 판소리 단원이었던 그는 이동백의 장기였던 삼고초려 대목을 스승의 법제 그대로 잘 불러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강장원이 사망한 후 이동백 소리의 맥은 강장원의 동년배인 정광수로 이어졌다. 정광수의 소리를 현재 박성환 대표가 전승하고 있다. 공주 출신의 박성환 대표는 매우 특별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한 후 프랑스 유학 중에 우리 소리에 매료되었고 우리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 중도에 귀국하여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음악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판소리 연구 뿐만 아니라 ‘전주소리축제 제1회 창작판소리 사설경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늦깎이 소리꾼으로 중고제 판소리 전승에 정성을 쏟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