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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라는 색의 향연보다는 산 너울이 더 멋졌던 가을날의 내장산
1. 일자 : 2012. 11. 3(토)
2. 장소 : 내장산(763m)
3. 행로 및 시간
[내장저수지(10:30) -> 서래탐방센터(10:50) -> 삼거리/서래약수(11:36, 불출봉 0.8km) -> 능선안부(11:45) -> (암릉지대) -> 불출봉(12:13, 622m) -> 중식(12:21-38) -> 고사목(12:42) -> (철계단) -> 망해봉(13:07, 679m) -> 연지봉(13:23, 670m) -> 까치봉(13:45, 717m) -> 소둥근재 갈림(13:57) -> 신선봉(14:26, 763m) -> 금선대(14:36) -> 금선대(14:36) -> 연자봉(15:03, 675m) -> 케이불카 탑승장(15:25) -> 내장사(15:46) -> 우화정(16:10) -> 매표소(16:30) -> 4주차장(17:10)]
4. 동행 : 홀로, 네팔산악회
< 내장산 산행을 준비하여 >
정읍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내장산은 해발 600-700m급의 기암괴석이 말발굽의 능선을 그리고 있는데, 암릉, 계곡, 폭포와 단풍으로 유명하며 월영봉,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장군봉 등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다. 내장산 서쪽에는 입암산(626m), 남쪽에는 백암산(741m)이 있어 국립공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풍이 아름다운 천혜의 가을 산이다.
장호 선생의 100대 명산기를 통해 산의 대강을 그려본다. ‘산 전체가 흡사 제비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이다. 머리를 까치봉으로 잡으면 몸통은 신선봉으로
이어지고 두 다리는 오른쪽으로 문필봉, 연자봉, 장군봉으로
뻗고, 왼쪽은 화양리와 봉덕리 사이의 줄기로 흐른다. 어깻죽지는
오른쪽에 연지봉, 망해봉이요, 왼쪽은 소죽임재와 새재가 된다. 오른쪽 날개가 불출봉과 서래봉으로 쳐지듯이 왼쪽으로는 백암산의 상왕봉과 백학봉이 떠맡게 된다.’ 지도와 비교해 가며 살피니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다. 고수의
눈썰미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산
전체의 조망은 북릉의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까지가 빼어나고
이후 봉우리의 풍경은 육산이라 단조롭다. 내장산의 가을을 대표하는 것은 핏빛처럼 붉은 단풍이다. 이곳에는
국내에 자생하는 15종의 단풍나무 중 11종이 서식하고 있다. 이들 나무가 빚어내는 색은 온 산을 비단처럼 수놓는다. 내장산 단풍은
잎이 7갈래로 작고 섬세하며 다른 산에 비해 유난히 붉다.내장사 주위에는 당단풍, 8부 능선 위에는
굴참나무(갈색), 단풍나무(빨간색), 느티나무(노란색)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색깔이 울긋불긋하다. 특히 내장사 앞에 있는 50-200년생
나무숲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다
산악회에서 제시한 길을 확인한다. 서래봉탐방센터를 출발 1시간 만에 능선안부 부근 서래약수에 닿고 이후 시계방향으로 불출, 망해, 연지, 까치, 선선, 연자봉을 3시간 30분에 걸려 돌아, 하산 길에 접어 들어 내장사와 단풍나무 숲을 지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6시간의 코스가 그려진다.
내장산이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 맑은 계류가 어우러진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내장사를 중심으로 서래봉에서 불출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장군봉에 이르기까지 산줄기가 말발굽처럼 둘러쳐져 마치 철옹성 같은 특이지형을 이룸. 내장사 부속암자인 원적암 일대에 있는 비자림이 특히 유명’ 이다. 흔히들 내장산하면 단풍을 우선으로 치고 산 자체의 매력은 크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단풍이라는 계급장을 빼고도 내장산은 충분히 매력 있는 산이다.
< 희망사항 >
4년 전 이맘때 ‘단풍의 진수’를 볼 수 있다는 일념 하에 큰 희망을 안고 길을 나섰다가, 오랜 가뭄에 색이 바랜 반쪽 단풍에 실망하고 주차난에‘산악회 버스 찾아 삼 만리를 경험한 고난’이 내 기억에 남은 내장산이다.
당시의 산행일기를 보고 있노라면 초보 티가 팍팍 난다. 글은 조잡하고 사진 구도는 촌스럽기 그지없다. 이번 산행은 코스도 서래봉과 장군봉이 제외되었지만 나름 종주 산행 길이니, 세련된 글과 풍광 좋은 사진을 더해 의미 있는 산행기록을 남기고 싶다.
계절이 단풍 관광의 최적기인지라, 길을 떠나기 앞서 인파와 주차 걱정이 앞선다. 단풍관광을 겸한 초보 참가자로 인해 일정 지연이 예상되고, 당일 내장사 매표소 앞 주차장의 극심한 혼잡으로 귀경 출발시간의 혼선이 우려된다. 산악회에서야 집객이 우선이기에 당일의 혼잡 상황을 알면서도 코스를 이리 잡았겠지만 호된 경험을 한 나로서는 걱정이 앞선다. 그저 일정대로 산행이 진행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산행의 횟수가 늘어나도 산에서 ‘정말 환상적인 단풍’을 본 기억이 없다. 계절이 이르거나 늦거나, 오랜 가뭄, 바람과 비 등이 단풍의 추억을 방해한 장애물이었다. 이번은 다를 것 같다. 잊지 못한 단풍의 향연에 취해 돌아 오고 싶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정읍 가는 길에 >
회사 출근보다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섰다. 양재역에서 커피 한 잔 하는데 전화가 온다. 어디 있느냐 묻는다. 아직 시간이 안 되었는데 하고 차에 오르니 빈 자석이 없다. 내팔의 여대장은 길이 붐빈다며 몹시 서두른다. 나로서도 나쁜 것이 없다.
7시 10분, 판교를 지난다. 무쩍 빠른 행보다. 어제 전화를 해와 탑승 장소를 복정에서 양재로 바꾸더니 다 이유가 있었나 보다. 10시에 산행을 시작하여 오후 4시에 귀경하자고 한다. 기쁜 말이지만 실제로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실제는 11시 산행 시작, 6시 10분 귀경 버스 출발, 집 도착 11시 20분 이었다. 헐! 욕심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새벽 잠이 부족했는지 얼핏 잠이 들었다 깨니 전라도 땅이다. 막 추수를 끝낸 들녘에 하얀 서리가 끼어 있다. 푸르름과 황금색이 엊그제였는데 서리라니. 아! 계절은 겨울로 향해 달려 가고 있구나. 왠지 허전해진다. 요즘 들어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9시 40분, 무렵 톨게이트를 빠져 나온다. 버스의 질주는 여기까지였다. 내장저수지를 지날 무렵 긴 정체가 시작되었다. 저수지 물 위로 은빛 여울이 잔잔하고, 물 너머 내장산의 줄기가 날 유혹하지만 길 사정은 내 마음과 같지 않다. 10시 30분, 버스가 잠시 멈춘 사이 일행들이 ‘제 뭐지?’ 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내린다. 차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바에야 걸어서 가자. 저수지를 끼고 난 산책로를 따라 워밍업을 한다. 햇살이 쏟아진다. 저수지의 물 빛과 하늘빛이 닮아 있다. 푸르다. 20분여의 발 놀림은 날 서래탐방센터 앞에 데려다 놓았다. 주위는 주차장소를 찾는 차와 그 차에서 내린 인파로 어수선하다. 어서 산 속으로 들어가자.
< 서래탐방센터에서 불출봉 >
10시 50분, 탐방센터 앞에 선다. 일행이 탄 버스는 어디쯤에 있을까? 대장에게 먼저 출발한다는 문자를 보낸다. 산에 들어오니 살 것 같다. 숲의 익숙한 향기가 코에 전해 온다. 그래, 난 역시 이곳이 어울려. ^^.
등산로 초입은 완만하다. 고도계를 두고 왔기에 시작 높이를 알 수 없지만 서래약수까지 족히 400미터는 치고 올라야 할 것이다. 먼저 길을 나선 단풍 관광객의 쉼이 잦아지면서 길은 정체를 반복한다. 겉옷을 벗어 던진다. 산은 만만치 않은 오르막으로 내게 입산의 자격을 묻는다. 얼마나 더 많은 산을 올라야 초반 힘겨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영원히 아닐지 모를 일이다.
< 내장 저수지에서 본 풍경 >
< 내려다 본 내장 저수지 >
한 차례의 오름 끝에 조망이 트인다. 지나온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 넓다. 그러나 왠지 인공의 냄새가 짙다. 좌측 멀리로 정읍시내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명산은 도시를 끼고 있는 법인가 보다. 10여분 더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삼거리나 나타난다. 좌측으로 400미터를 가면 서래봉이고, 우측은 불출봉 길이다. 거리는 900미터이다. 잠시 후 물리 말라버린 서래약수를 지난다. 지도상으로는 삼거리에서 바로 주 능선을 탈 줄 알았는데 계속되는 비탈에 당황이 된다. 하기야 약수는 능선 상에 있을 수 없으니 길 사정은 당연한 것이다. 지도와 산 길을 잃는 눈이 아직은 초보 수준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을 지나고 나서야 깨우치니 둔함이 이루 말 할 수 없다. 덤벙거림이 늘 싫다.
< 서래봉과 불출봉 사이 전망대에서 >
< 굽이치는 내장의 산줄기 >
주 능선에 들어섰다. 작은 전망대에 선다. 정상인 신선봉 방향으로의 산줄기가 시원하다. 산이 굽이치고 있다. 장쾌하다. 길은 인파로 북쩍인다. 더욱이 암릉지대가 시작된다. 좁은 길에 밧줄이 메어져 있어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내 차례가 왔다. 이 붐빔에도 아주머니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대고 웃어낸다. ‘천박한 하이 톤’이 처음엔 역겹게 다가 왔지만 차츰 익숙해져 간다. 그들에게도 오늘은 모처럼만에 나들이 일진데 좀 떠들면 어떠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속 좁은 인간이 조금씩 너그러워 지려나 보다.
작은 바위 위에서 굽어 보니, 저수지 위에 작은 섬들이 여럿 떠 있다. 마치 바다를 보는 착각이 든다. 작은 여유에 힘이 난다. 다시 철계단을 오른다. 정체가 익숙해진다. 잠시 샛길로 가 보아도 그리 빨리 가진 못한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불출봉에 도착했다. 4년 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바라다 본 봉우리에 이리 서 보니 작은 성취감이 느껴진다. 정상 암릉 위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다. 봉우리 한 켠에 서서 주위 조망을 하고는 이내 길을 나선다.
< 불출봉 가는 길의 암봉 풍경 >
< 불출봉에서 >
< 불출봉에서 신선봉 >
이제 망해봉 길이다. 예전엔 연자봉에서 왔는데 오늘은 불출봉에서 이다. 그 붐비던 인파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길도 평범한 능선 길로 바뀌어 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가을 단풍’을 위해 온 산이지만, 막상 능선 위에 서니 화려한 단풍은 없다. 솔직이 이야기하면 지난 주 관악산 만도 못하다. 굽어보는 풍경도 갈색이 주류다. 색의 향연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그래도 산 줄기의 장엄함은 어느 고산준령 부럽지 않다. 새삼 느끼지만 내장산은 단풍의 산이라기 보다는 산줄기의 너울이 멋진 산이다. 크게 움직이는 주름진 물결이 그만이다.
길에 여유가 생기자, 배가 고파온다. 적당한 식당자리를 찾다가 암릉 부근 뿌리가 뽑혀 쓰러진 소나무 옆에 자리를 잡는다. 소나무 그늘이 탐이 났던 것인데, 지나는 바람에 나무가 나를 덮칠까 겁이나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김밥과 김치가 있는 소박한 식사다. 김밥을 먹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소풍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인데 이제는 너무 흔해졌어’. 소풍 날 아침 어머니께서 싸 주시던 김밥은 당시 맛 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먹을 것이 풍부해진 지금, 왠지 풍요가 행복은 아니라는 마음이 든다. 나도 조금씩 늙어가나 보다.
식사를 마치고 걷는 길, 억새와 고사목이 있는 지역을 지난다. 가을의 정취로는 단풍보다 억새가 한 수 위다. 거기에 운치 있는 고사목까지 더해지니 아니 멋진 풍경이겠는가?
< 억새와 고사목이 있는 풍경 >
< 내장산의 산너울 >
길이 거칠어진다. 망해봉으로 가는 긴 철계단을 올라선다. 망해봉도 암봉이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좋은 경치는 험한 길에 대한 보답인가 보다. 계단에 올라 굽어보는 풍경에 지나온 길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암릉과 굽이 길이 보이고 저수가 저 만치 있고, 눈 맛이 그만이다.
< 산 너울과 지나온 풍경 >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망해봉 정상에 올랐다. 679미터, 정상석 대신 사진이 있는 입간판이 봉우리의 존재를 부각시켜 준다. 주위를 서성인다. 그냥 내려가기가 허전하다. 익숙한 정상석의 부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유선형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옛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암릉 길이다. 고도감이 느껴진다. 그러고는 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진다. 오르내림의 연속이다. 연자봉을 향하는 오르막은 힘겨웠다.
<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
여기까지는 와 본 경험이 있는 길이다. 미지의 길에 눈 길을 준다. 까치봉 방향으로 시원하게 능선이 펼쳐져 있다. 암봉은 아니지만 500미터에서 700미터를 넘나드는 능선이 길게 이어진다. 자!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여 놓자.
제비 산에 까치봉이라! 조금은 생뚱맞은 이름이다. 거리가 길지 않아 쉽게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름 길은 생각보다 길어 힘겨웠다. 높이도 700미터 대로 진입했다. 까치봉에서 바라보는 내장의 정수리 신선봉은 ‘오야’의 자태가 느껴진다. 크고 높고 웅장하다.
소둥근재 부근 전망대에 섰다. 카메라의 포커스가 제대로 잡힌다. 옅게 시야를 가리던 연무도 사라졌다. 사진은 구도와 빛의 게임임을 실감한다. 굴곡진 산이 넘실대며 흐르고 있었다. 주름이 깊게 패인 할아비의 모습이다. 푸르름에 갈색 톤이 더해져 가을의 정취를 만들어 가고 있다.
2시 무렵, 억새가 지천인 헬기장을 지난다. 이제 신선봉도 지척이다. 힘겨운 다리로 우람한 정상을 오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길이 조릿대가 있는 편한 길로 변한다. 산에서 걷는 조릿대 길은 그 푸른 색깔만큼이나 편안 환경을 제공해 준다. 정상을 오르기 전 숨을 골라 본다.
자주 목이 마르다. 엊저녁 배낭을 싸며 작은 병 두 개에 물을 담다가, 한 놈을 큰 병으로 바뀌었는데 잘 했다. 공기는 서늘해도 걸으면 땀이 난다. 이 긴 능선 길에 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이 엄습해 왔을 것이다.
산 어깨 길을 돌아 신성봉으로 향한다. 멀리서 볼 때보다는 덜해도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만만치 않다. 2시 26분, 드디어 신선봉에 닿았다. 사위가 다 발 밑에 있다. 시야에 거칠 것이 없다. 커다란 공터 한 켠에 정상석이 보인다. ‘사진 한 장’생각이 간절하지만 내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은 없다. 목소리 큰 아주머니들의 전유물이 된 정상석 대신 입간판을 배경으로 내가 이곳을 다녀 갔음을 알리는 흔적을 남긴다.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등산객과 행락객들 사이에서 풍경을 음미한다. 멀리 서래봉의 흰 암봉이 눈에 들어온다. 하산 길 내내 눈은 서래봉과 함께 할 것 같다.
< 내장의 정상, 신선봉에서 >
< 신선봉에서 내장사 >
정상에 올랐다는 우쭐함을 멀리하고 길을 내려선다.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위 전망대인 금선대가 있었다. 신선봉의 전경을 되돌아 보기에 그만인 장소이다. 그 밑으로 한 없이 고도를 줄여가는 긴 내리막이 있었다. 연자봉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서어나무가 대표 수종인 길을 걷는다. 대세 내리막이지만 오르내림은 있다.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가 내려서니, 멀리 너른 안부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인파와 섞인다. 좌측 길은 내장사로 하산하는 길이고, 계속 이어지는 길은 연자봉으로 향하는 오르막이다. 좌측으로 내려 가고픈 유혹이 든다. 순간의 유혹을 멀리하고 큰 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고 비탈을 오른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 다리에 작은 경련이 온다. 그래도 미련스럽게 길을 나아간다. 3시 무렵 연자봉-내장사 갈림을 지나고 연자봉으로 향한다. 연자봉, 제비의 꿈이 담겨있는 봉우리다. 또 하나의 봉우리에 올랐다는 감동보다는 이제 하산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먼저 찾아 든다. 이어지는 장군봉 방향으로는 한 길 한 번만 주고 하산 길에 나선다. 출발 후 4시간 30분을 내쳐 걷기만 했다. 잠시의 쉼의 여유가 사라져가는 내 등산행태에 내 자신도 불만이 늘어간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건너다 보는 풍경에 서래봉이 우뚝하다. 길이 진행되어 갈수록 암봉이 더욱 선명하다. 이곳 내장의 풍경에서도 가을과 단풍은 없었다. 풍경은 여전히 갈색 일색이다. 긴 철계단을 내려간다. 고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하산 20분 만에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했다. 길게 이어지는 케이블카 탑승 행렬과 음식점의 테이블로 주위가 어수선하다. 그 틈을 뚫고 길을 만들어 간다.
팔각정에 오른다. 서래봉과 장군봉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우화정이 보이고 부근의 단풍이 시선을 자극한다. 그래도 사진으로 본 한창 때의 화려한 단풍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올해는 비도 잦았고 최근 일교차도 심한데 단풍 색이 곱지 못한 것은 어인 연유인지 모르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장사를 목표로 발 길을 재촉한다.
< 전망대에서 본 서래봉 >
< 우화정 부근 풍경 >
3시 45분 무렵 내장사 경내로 들어선다. 다양한 이름의 절 집이 산재해 있다. 뒤편에서 접근해서 그런지 가람 배치의 멋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석탑 뒤 편으로 서래봉의 모습이 보인다. 그 바로 옆에 장막이 쳐진 공터가 보인다. 대웅전 터다. 지난 화요일 밤 내장사 대웅전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가슴 아픈 일이다. 문화재 지정 신청 예정일 만큼 수려하고 긴 역사를 지닌 건물이 누군가의 부주의 혹은 옳지 못한 행동으로 재 더미가 되어버렸다. 안타가운 일이다. 화재의 약한 목조 건물의 약점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절 집의 주인 건물은 대웅전이다. 하루 빨리 다시 천 년의 역사를 새길 웅장한 건물이 새워지기를 바래본다.
< 내장사의 단풍 >
내장사 절 집 주위로 화려한 색의 단풍이 마침내 보이기 시작한다. 산 위와는 자못 다른 풍경이다. 내장산은 자생하는 단풍나무의 식생이 다양하다. 국내에 서식하는 단풍나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목격된다. 이는 생태학상 중부기후와 온대남부기후가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기후와 토양과 우수한 수종들이 연출하는 색의 향연이 황홀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색색의 단풍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단풍은 기온이 떨어짐에 따라 엽록소 분해 과정에서 색소에 따라 붉고 노랗고 갈색으로 변한다. 짙은 붉은 색이 시선을 가장 먼저 끌지만 햇살을 머금고 잔잔히 모습을 드러내는 노란 단풍도 그에 못지 않다.
농익은 색색의 단풍을 보고 있으려니 문뜩, ‘내장산의 단풍이 아닌 내장사의 단풍이 바른 표현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산 위에서 색 고운 단풍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단풍은 내장사의 것이고, 내장산은 능선의 장엄함으로 기억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바탕 화려함을 뒤로 하고, 또 길을 나선다. 출입이 금해져 있는 절 집의 현판과 그 뒤로 이어지는 건물의 구도가 시선을 끈다. 그리고, 단풍에 화려함에 가려 있지만 열매를 하나 가득 담은 감나무의
자태가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 보게 했다. 가을은 단풍 말고도 멋진 것들이 참 많은 계절이다. 멋진 것은 화려함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잔잔한 일상 속에서도
깊은 가을의 참 맛이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감나무의 풍성함에서 다가 올 겨울을 본다.
< 내장의 또 다른 모습과 가을 >
< 에필로그 >
내장사에서 20여분 단풍터널 길을 걸어 매표소 입구에 도착했다. 국내 최고라는 단풍 길은 그러나 이름 값을 하지 못했다. 그저 인파에 섞여 떠밀리듯 걸었을 뿐이다.
대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5시까지 제 4 주차장으로 오란다. 화가 치민다. 아무리 악의는 없는 문자이지만, 상황을 보아가며 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 코스는 엄밀한 말하면 6시간 30분 길이고, 본인들의 판단 미스로 주차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현실을 반영하여 수정 시간을 애기해 주어야지, 자기들 편의에 맞추어 서두르라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화가 난다. 상황을 확인하려 전화를 했더니 불가피하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작은 배려가 아쉬운 순간이다.
4시 30분, 서둘러 가면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변경된 주차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하던 걸음거리가 빨라진다. 길가는 온통 축제를 빙자한 장사치들의 호객행위로 정신이 없다. 특히 각설이들이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물건을 사지 않자 본색을 드러내고 급기야만 지나는 손님에게 험한 말을 한다. 말투의 상스러움과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태도가 거의 조폭 수준이다. 부근의 똘마니들까지 나서 수준 낮은 작태를 부리고 있다. 이 좋은 축제의 장을 일순간 험악하게 만드는 그들은 분명 사회악이다. 그들 뒤편에 조직 폭력배의 그늘이 느껴진다. 오늘을 계기로 ‘각설이 패’가 낭만으로만 보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선의의 피해자에게 미안할 뿐이다.
산행 시작 전, ‘단풍은 배설이고 그 결과는 울긋불긋이다’라고 생각했었다. 수목들은 여름 내내 뿌리로는 물을 길어 올리고 잎으로는 광합성을 하면서 생장하는데, 휴지(休止)기에 들어 가기 전 잎들을 떨어낸다. 이 과정이 단풍이다. 나무에겐 비움의 과정인 단풍이 사람들에겐 고독, 낭만으로 비쳐진다.
가을의 낭만을 기대하고 내장산을 찾았지만 단풍에는 실망을 했고, 대신 내장산의 멋진 풍광을 가슴에 담고 귀경 길에 오른다.
어두워지는 버스 차장을 바라보다, 실제와 현실이라는 것의 갭을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변한다. 이름에 걸 맞는 내실이 없으면, 축제를 빙자하여 불편의 감수를 반복한다면, 내장산 단풍은 머지 않아 잊혀진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