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신앙인들에게서 나치 치하의 독일 국민을 본다.
물론 나치의 선전과 통치술에 희생당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스스로 독단으로 빠져든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디 일반 국민들만 그런가?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를 만들고,
전쟁말기에는 독가스로 유대인들을 살상하도록 하는
명령서에 서명을 했던 아이히만을 보자.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가
모사드에 의해 이스라엘로 압송된 그를 본 세계인들은.
그가 "살아있는 악마"가 아닌
너무나 평범하고 나약하며 또한 성실한 사람인 것에 놀랐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였다면
평범한 관료나 시골학교 교사를 하기에
딱 어울리는 스타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변호한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유대계 미국인인자 저널의 편집장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고서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진부성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악마로서의 아이히만이 아닌
소시민적이고 평범한 아이히만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는 우리가 아이히만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죄는 무엇인가에 대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가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히틀러, 괴벨스 등)이 자살하고 없어서
우리는 아이히만에게 대신 화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를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아렌트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사유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성에 대해 사유하지 않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죄를 아이히만에게 묻는다.
저급한 신앙인들을 아이히만과 동일선상에 놓는 논지에 대해
비약이 심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독일이나 일본 모두 국민들이 우민화되었을 때만 가능한
< 전체주의 체제 VS 한국 기독교회>를 볼 때,
난 (국가적 권력의 유무 이외에는)도저히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국가권력에 간섭하고 있는 바
더이상 차이점이 없다고 여겨질 지경이다.
"난 (목사의)가르침에 충실했을 뿐이야"
"아무도 내게 그것이 독단이라는 점을 알려주지 않았어"
좀 심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내가 늘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생각하지 않을 바엔 차라리 나가 죽어라."
해악을 조장하는 죄,
해악을 알고도 모른체하는 죄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하지 않아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것은
-나중에 동정심을 받을지 말지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죄의 결과로 인한 폐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양식있는 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에 대한 의문'과
'정당성을 판단'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 자는
그러한 폐해와 죄악에 대해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ㅡ예수동아리교회 예동 파고라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