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레스티지>를 보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마술의 핵심은 있던 물건을 사라지게 하고 없던 물건을 나타나게 하는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두 마술사가 필사적으로 추구하던 ‘순간이동마술’은 이 ‘있다/없다’ 마술의 궁극적인 경지였다. 그럼 왜 이런 ‘있다/없다’ 마술에 우리가 놀라고 매혹당하는 것일까? 유명한 인지발달연구자 장 삐아제(J.Piaget)에 따르면 그 마술이 우리가 쌓아올린 사유세계의 근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심리학계에 인지심리학 혁명을 불러왔던 J.Piaget
1896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학자 장 삐아제는 인식론철학과 발달심리학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크게 4단계를 거쳐서 성장한다고 보았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에 의존하는, 즉 감각에 속박되어 있는 시기이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는 언제나 보고 만질 수 있는 실물을 중시하며 산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그런 수준의 의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지금 어떤 물건을 보고 만질 수 있는지의 여부가 그 물건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같은 의미이다. 내가 볼 수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볼 수 없으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각과 움직임(만지기)에 의존해 세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이 단계를 감각운동기(sensory motor stage)라고 한다. 어떤 아이가 감각운동기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아이의 눈앞에 어떤 장난감을 가져다 놓고 그 장난감을 만지고 갖고 놀게 한다. 한참 그러다가 아이의 눈앞에서 그 장난감을 치운다. 만약 아이가 물건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고 없어진 물건을 찾는다면 아이는 이 단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처음부터 그 물건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면 아이는 여전히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 다음 단계도 여전히 감각으로부터의 탈출하고 관련이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이제 어떤 물건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는 특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단계에 속해있는지 아니면 벗어났는지를 판별하는 실험도 아주 간단하다. 예를 들어, 아이의 눈앞에서 똑같은 모양의 컵 두 잔에 물을 똑같은 높이로 따른다. 아이에게 어느 컵의 물이 더 많은지 물어봐서 두 컵에 담긴 물의 양이 똑같다는 대답을 얻은 다음, 한쪽 컵의 물을 좀 더 좁고 높은 컵으로 옮겨 따른다. 그리고 나서 어느 컵의 물이 더 많은지, 혹시 물의 양이 달라졌는지를 다시 물어본다. 만약 아이가 (물의 높이가 높아졌다거나, 컵의 지름이 작아졌다는 이유로) 새 컵에 담긴 물의 양이 달라졌다고 답한다면 아이는 여전히 이 단계에 속해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물의 양이 달라보일지라도 원래부터 물의 양이 같았기 때문에 계속 같다고 대답한다면 아이는 이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단계를 전조작기(pre operational stage)라고 부른다.
전조작기 다음에 오는 구체적 조작기(concrete operational stage)에서 우리는 최소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현혹당하는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그 물건에 대해서 상상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비슷한 장난감이나 그림을 보지 않고서는) 용이나 요정 같은 상상의 존재들을 떠올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두 개 이상의 감각을 조합해야 알 수 있는 ‘부피’(높이와 깊이의 조합), ‘밀도’(부피와 무게의 조합) 같은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민주주의나 인권, 자유 같은 이념도 받아들일 수 없고, 직접 보이지 않는 전자의 흐름 같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오로지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것에 의존해서 그 경험을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범위에 한해서만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감각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난 다음에야 우리는 형식적 조작기(formal operational stage)라고 불리는 제대로 된 추상적인 사고의 단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는 상상과 이념과 창의력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렇다면 왜 감각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느냐가 인지발달의 핵심일까? 왜냐하면 그것이 생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보고 느끼는 것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감각이 곧 생각이다. 굳이 생각을 따로 떼어놓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어떤 대상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사물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마음속에 심상을 떠올릴 수 있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보통 말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마술은 눈앞에 존재하던 물건을 사라지게 하고 없던 물건을 나타나게 만든다. 마술을 통해 우리는 감각운동기 시절에 경험했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접했던 바로 그 세계로 말이다. 실제로 감각운동기를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마술쇼를 봐도 놀라지 않는다. 모자에서 토끼가 나오더라도, 비둘기가 펑하고 사라지더라도 그냥 그럴 뿐이다. 놀랄 이유가 없다. 그 시기 아이들에게 그런 경험은 늘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만 감아도 있던 물건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사는 아이에게 토끼가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게 대수겠는가. 마술을 보고 놀라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상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식으로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감각운동기의 세계가 사실은 고차원적인 창의와 기술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두 주인공의 조언자역인 커터(마이클 케인)는 고차원적인 마술일수록 단순히 관객들의 눈을 속이는 단계를 넘어 관객들의 마음을 읽고 그 기대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술은 관객들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보다 한 수 앞서 나가는 연출의 기술이다. 그 끝에는 관객들의 순수한 놀라움이 있다. 관객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기술은 놀라움을 안겨주지 못한다. 예상과는 다른 결말에 허를 찔렸을 때 우리는 그 놀라움을 살짝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궁극의 놀라움 앞에서 우리는 감각운동기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앤지어(휴 잭맨)가 그렇게 갈망하던 순수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담은 관객의 눈빛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건 갓난아기 시절 이후 잊어버렸던 감각운동기의 세계를 다시 맛본 사람들의 눈이다. 대중 앞에서 강연이든 춤이든 노래든 무슨 퍼포먼스라도 펼쳐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눈빛의 대상이 되기를 꿈꾸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래도 유치찬란했던 두 인간...
영화에 등장하는 테슬라의 발명품을 보며 나는 그 기계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지극히 세속적인 용도의 예를 들자면, 거기에 다이아몬드나 금괴를 넣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앤지어는 분명히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바람직한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 환상적인 기계를 가지고 참으로 엽기적인 용도에 사용하고 만다. 적어도 나만큼의 지능은 있었을 듯한 그 친구가 그 놀라운 발명품을 가지고 고작 그따위 무지막지한 마술에 집착한 이유는 결국 관객들의 그 경탄어린 눈빛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테슬라를 향해 에디슨이 저질렀던 실제 사건들과 비슷하게 유치한 이 두 마술사간 라이벌전의 배경에는 관객들의 눈빛을 상대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욕망이 담겨있다. 그 욕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공감하는 사람들만이 이 영화의 마무리를 납득할 수 있으리라.
- 무비위크 2006. 11. 13 -
데이빗 보위가 연기한 니콜라 테슬라
테슬라 조수 역에는 골룸, 앤디 서키스
스칼렛 요한슨 그리고 마이클케인 까지 참 배역과 연출은 화려찬란한 영화였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포장술은 참 대단하다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