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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영] 금호문,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계동열성자대회 | 2001-07-08 오전 3:30:15 |
금호문-송학선 의거터 순종 서거 후 창덕궁 앞에는 슬피 우는 백성들이 연일 운집하였고 출입하는 요인들이 줄을 이었다. 서울 북아현(당시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출생은 서대문밖 천연동) 출신의 송학선(동생은 송이학선, 송삼학선)은 평소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던 차에 4월 28일, 총독 사이토가 창덕궁 성선제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비수를 품고 돈화문 서북쪽에 있는 금호문에서 기회를 엿보던 중 “저기 총독이 있다”라는 군중의 소리를 듣고 자동차에 뛰어 올랐다. 그는 상공회의소의 의원인 사토오를 총독으로 오인하고 찔러 중상을 입힌 뒤 옆에 탔던 경성부의원 다까야마를 찔러 즉사케하였다. 곧이어 그는 경찰과 격투를 벌였고 순사 두명을 부상케 한 뒤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27년 5월 19일 사형당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8・15광복과 함께 조직되었던 최초의 건국준비단체로 약칭 ‘건준’이라 한다. 1945년 8월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당시의 조선총독 아베는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일어날지도 모를 우리나라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와 앞으로의 한일관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일본과 협력할 수 있는 신망있는 우리나라의 민족지도자와 협력관계를 맺고자 총독부정무총감 엔도를 앞세워 협력대상자를 찾았다. 여운형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8월 15일 오전 8시를 전후하여 엔도의 관저에서 협상을 가졌다. 엔도는 자주적인 국내치안유지와 일본인들의 퇴거 때까지 그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등을 요청하였고, 여운형은 ① 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 3개월간의 식량 보급, ③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④ 학생운동과 청년조직에 대한 간섭 배제, ⑤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 것에 대한 간섭 배제 등 5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타결되자 여운형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우, 무경부장 권태석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여운형은 8월 16일 오후 1시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연설회를 개최하였고, 안재홍이 한・일 양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함으로써 건국준비의 대업을 시작하였다. 임용남의 집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준비사업 선전공작과 치안활동을 개시하였다. 처음 이집은 마포부자라는 이가 소유하고 있다가 임용상에게 팔렸으며 나중에 허정구씨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질때는 장안에서 최초로 스팀이 들어오는 집이었다고 한다. 건준이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만들어진 인민공화국의 사무실은 경복궁 저편 옥인동에 있는 윤덕영 집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8월 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위원회를 개최, 건국공작 5개항을 제시하였다. 즉, ① 어느 기간까지 자발적으로 자치수단을 강구하여야 한다. ② 자치수단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 ③ 자치수단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한다. ④ 모든 공사기관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속인원은 현 직장을 엄수하여야 한다. ⑤ 각 인원은 각기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공작에 협력하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다만 자치기관의 명칭은 ‘건국○○읍(면) 공안대’로 하되, 각기 지방유지가 중심이 되어 청년층・학도 등을 동원하든지, 종래의 경방단을 개편, 조직하여도 무당하다고 하였다. 건준이 이렇게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이들이 건국준비에 노력하였던 부분(이태준-해방전후)도 있으나 건준이 이전 1940년대 초부터 ‘건국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건국을 준비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8월 26일 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 총무부장에 송병무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9월 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을 보면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개항을 내세웠다. 위원회는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세워두었으나, 광복이전 여러 정당・정파 이외에 새로이 한국독립당・대한여자국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 등의 난립으로 행동통일이 어려웠다. 우파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송진우・김성수・김준연 등을 중심으로 한 국민대회준비위원회파와 김병로・백관수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강화・확대파로 분파되었다. 위원회는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전취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고 전국대회의 소집을 결정하였으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세력의 최용달・이강국 등의 반대공작으로 대회소집은 거듭 지연되었다. 전국대회의 제1차 소집일자를 8월 18일로 정하고 480명을 선정, 통지하였으나 지연되었고, 23일 전국적인 확대회의 대신 위원회가 추천하는 명사의 회합을 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25일 62명의 명단을 김병로・백관수・이인・김약수 등이 선정되었으나, 위원회에서는 독자적으로 73명의 명단을 첨가하여 135명의 회합으로 바꾼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하였다. 이 135명의 회합을 9월 2일에 소집하기로 예정을 잡았으나 다시 4일로 연기하는 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9월 1일에 부위원장 안재홍이 결별을 선언하고 조선국민당을 결성하였고, 정백・고경흠 등 간부들이 위원회의 승인도 없이 경성지부를 결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파계열에서 이렇게 건준에서 분열되어 나가는 것은 당시까지 서울에 진주하는 국가가 소련인줄 알았으나 이때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진주한다는 것을 알고 취한 행동으로 보여진다. 9월 4일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려 허헌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하는 등 집행위원회의 개편이 있었다. 개편 이틀 후인 9월 6일 위원회는 600여명으로 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서울 경기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여운형・허헌・김규식・김구・김성수・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조민식 등 55명을, 고문에 오세창・권동진・김창숙・이시영 등 12명을 각각 뽑고,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화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위원회는 9월 7일 해체되고 9월 11일 그 조각을 마쳤다. 이 조각명단에는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이들 조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청에서는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성명을 포고하였다. 그리고 이승만마저도 환국하여 주석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여운형(1886-1947) 조현연 (한국외국어대 강사) 몽양 여운형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몽양은 영원한 청춘이었고 싱싱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몽양을 따른 수많은 사람들은 몽양을 사랑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간혹 몽양의 정적들은 그에 대해 영웅주의자라거나 친일행위를 한 사람이라고 비방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단지 시기심의 발로이며 중상모략일 뿐이다. 몽양, 그는 너무도 인간적인 지도자였다. 그리고 험한 파도가 몰아친 해방공간 속에서 온 몸을 바쳐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해 일하다가 흉탄을 맞고 영원의 세계로 떠나갔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둠의 그늘속에서 그의 죽음을 쌍수를 들고 환영한 몹쓸 인간들에게는 커다란 이익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1914년 중국 남경에 도착해서 1929년 일경에 체포되어 송환되기까지 몽양의 중국시절은 그가 항일운동의 거목으로 자라나는 시기이자 후일 정치적 지도자로 발돋움하기 위한 밑거름이 된 시기였다. 특히 몽양은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에 공히 가입해 국공합작에 적극 협조하면서 해방과 독립에서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1919년 상해 임정의 외교부 차장과 의정원의장, 신한청년단 당수로서 몽양은 정치적, 외교적 활동에 중점을 둔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9년 7월 상해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3년 징역형을 언도받은 몽양은 대전형무소에서 약간의 형기를 남겨놓고 1932년 7월 27일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그 뒤 몽양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1936년 7월 5일 강제폐간될 때까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였다. 1943년 6월에는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명으로 1년형에 3년 집행유예를 언도받기도 했다. 출옥후 여운형은 향리에 은거하면서 앞날을 대비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44년 8월 10일 몽양이 주동이 되어 조동우, 현우현, 황운, 김진우 등 노장 독립운동가들이 2차대전의 종전을 예견하면서 일제의 패망과 이에 따를 조국의 광복에 대비할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 바, 이 항일지하조직체가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 이날 위원장에 추대된 몽양은 “우리는 이미 늙은 사람들이니 명예나 지위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밑거름이 됩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책임과 영예를 청년들에게 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일 것입니다.”라고 인사말을 하였다. 그리고 일체의 조직활동을 비밀로하고 불언, 불문, 불명의 삼대철칙을 엄수할 것을 결정하기도 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세를 확장한 결과 해방직전에는 맹원수가 약 1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몽양은 은거하고 있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포섭하여 1944년 10월 8일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하고 이로 하여금 건국동맹을 위한 보조활동을 하게 했다. 실제 활동지역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그 활동범위는 노동자, 농민의 권익투쟁은 물론이고 조국해방을 위한 여러가지의 투쟁형태, 즉 식량공출 및 기타 군수물자의 운반 방해활동, 청장년의 징용, 징병기피의 선동 및 방조활동, 그리고 징용, 징병의 근거서류인 호적부 등을 멸실하기 위한 재판소 및 기타 지방관공서의 방화 및 파괴계획 등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었다. 또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건국동맹의 지도부는 중국 연안의 무정과도 연락하여 조선의용군에 의한 해방전야의 유격전을 모색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에서는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정무총감 엔도오와 여운형 사이에서 일제의 항복선언 이후의 과도적 기간의 질서유지와 국가권력의 순조로운 이양을 위한 말이 오갔던 것이다. 여기서 전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시 석방,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배제 등 몽양의 조건제시에 대해 엔도오가 주저없이 수락함으로써 몽양은 중대책임을 맡게 되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몽양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날 저녁 그는 건국동맹원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국지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물론 건준에 대한 국민대중의 지지와 기대가 그만큼 컸음을 입증하는 사실이다. 8월 22일 몽양은 건준의 중앙기구를 12부 1국으로 개편하였고, 이어서 25일에는 국민대중에게 건준의 목적과 성격, 그 진로를 명시하기 위해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건준은 새로운 완전한 정부의 수립을 위해 산파적 역할을 담당하는 과도적 조직체이며, 따라서 건준은 ‘과거에 일본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던 반민족적 반동세력’만을 제외하고는 각계각층의 정치적, 사회적 지도자들을 모두 망라하지 않으면 안될 터이었다. 이에 따라 건준은 몽양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세력, 안민세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 이영, 최익한, 정백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장안파 공산주의 세력, 그리고 박헌영, 이강국, 최용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 등이 몽양을 중심으로 집결되었던 하나의 연합전선적인 정치단체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 이해와 전망의 불일치가 나타나고 그것은 곧 건준 내부의 혼란과 내분으로 드러났다. 결국 9월 6일 저녁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건준은 불과 20일이라는 짧은 그러나 다사다난했던 생애를 끝마치고 말았다. 건준을 토대로 정부형태로 수립된 인공의 탄생과정에서도 몽양이 주역을 맡은 것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몽양은 좌우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정치노선을 내걸었다. 인공이 귀국도 하지 않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출하는가 하면, 김성수, 조만식 등을 문교부장, 재정부장의 자리에 앉힌 데에는 몽양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렇지만 해방 후 두달 가까이 기세좋게 나가던 몽양은 점차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몽양이 광범한 국민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청년과 학생층의 지지와 애호를 받고 있었지만, 좌우익의 중간에 끼여 그리고 미군정으로부터 여러가지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특히 1946년 1월부터 벌어진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내용을 둘러싼 극한적인 좌우대립은 몽양의 정치적 입지를 점점 조여 들어갔다. 이 와중에서 박헌영은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좌익세력을 규합해 나갔고, 우익은 몽양을 더욱 경원시 하였다. 이에따라 몽양은 좌우의 틈바구니에서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몽양은 북에 있는 김일성과의 담판을 통해 사태수습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방안을 강구, 46년 2월 10일 두 사람간의 1차회동이 개최되었다. 모두 다섯차례에 걸친 몽양의 북한 잠행이 그 첫문을 연 것이었다. 3당합당과 정계은퇴선언 명망가로서 몽양의 인기는 국민들 사이에 확고했다. 그러나 굳건한 내부조직을 갖지 못했던 몽양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을 가진 박헌영을 상대하기가 벅찼다. 결국 몽양은 인공과는 별도로 <조선인민당> 결성을 주도하게 되었다. 1945년 11월 12일 창립된 조선인민당은 몽양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동맹세력을 모체로 하고 고려국민동맹, 인민동지회, 일요회 등의 단체를 흡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인민당의 지도이념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환언하면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적 사회주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민주당이 지주계급 내지는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기반한 계급정당이었고, 조선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전위로 자처하는 계급정당이었다고 한다면, 인민당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 양심적 자본가 등 전체 근로 국민대중의 이해에 복무하는 대중적 국민정당을 지향하고 있었다. 한편 3상회의 결정의 후유증은 1946년 중반기가 되면서 남한에 날로 복잡한 정세를 조성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던 1차 미소공위(46년 3월 20일)가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참가자의 자격’을 높고 입씨름하다 두달도 채 못간 5월 8일 무기한 휴회로 들어가고,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6월 3일에는 이승만이 이남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폭탄발언(정읍발언)을 했다. 이에 따라 남한은 좌우를 막론하고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개혁의 실시,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북한의 김일성이 확고한 기반을 만들어가면 갈수록 안정되어가는 것과는 크게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점차 심해져가는 미군정의 좌익탄압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좌익계열 3당인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통합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1946년 8월부터 본격화된 좌익 3당의 합당은 막상 시작되자 사분오열되면서,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벽에 부딪히게 된다. 8월 3일 인민당은 공산당과 신민당에 합당을 제의했고 이에 대해 양당은 일단 찬성의 뜻을 비쳤다. 그러나 합당절차와 방법을 둘러싸고 각 당마다 두파로 분열되어 3당 6파의 양상이 나타났다. 공산당은 대회파와 간부파로, 인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남조선 신민당은 적극파와 신중파로 분열되었다. 간부파, 좌파, 적극파가 신속합당을 주장하는 가운데, 박헌영은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46년 9월 4일 서둘러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40여일 늦게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를 10월 16일 만들었으며, 11월 1일 창당대회를 열어 위원장에는 몽양을, 부위원장에는 백남운과 강진을 뽑았다. 몽양은 “합당사업에서 박헌영측이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결국 각 당의 내분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합당사업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사로당의 창당을 적극 반대했고 창당대회에 참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편 남로당 준비위의 결성, 사로당 준비위의 결성, 사로당의 창당, 남로당의 창당과정에서 이루어진 내분과 분열, 그리고 특히 북조선 노동당의 사로당 부인결정은 몽양의 정치적 운명을 재촉했다. 사로당 관계자들 가운데 이탈자가 늘어났고 주요 간부들조차 자기비판서를 쓰고 남로당에 개별 입당하는 사태가 나타났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몽양은 남로당이 창당되는 11월 23일부터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급기야 12월 4일에는 ⌈좌우합작 합당공작을 단념하면서⌋라는 제목의 자기 비판서를 발표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1946년 1월 한달동안 3상회의 결정내용을 둘러싸고 좌우익 일각에서는 극한 충돌을 피할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몇차례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모두 무위로 끝났다. 이에 따라 좌익은 좌익대로 우익은 우익대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색조를 뚜렷이 하면서 자신의 진용을 정비해 나갔다. 우익진영이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결성한 후 하루뒤인 46년 2월 15일 좌익진영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민주의원의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 김규식이 취임했으며, 민전 의장단에는 몽양을 비롯하여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이 선출되었다. 이처럼 조직정비를 마친 좌우 양 진영은 세력확장에 힘을 쏟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남북 정치권 최대의 관심사였던 임시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1946년 3월에 열렸던 미소공위는 소위 협의대상 문제로 말미암아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이 문제를 둘러싼 미소간의 의견대립은 좀처럼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는 결국 결렬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남한 내의 정치적 혼란과 좌우익의 대립은 한층 격심해졌다. 이 무렵 몽양도 물론 미소공위의 진행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회의의 결렬이 확실해지자 몽양은 하나의 사후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좌우합작 운동의 추진이었다. 당시 정세하에서 몽양은 미군정과 대립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이룩해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는 미군정도 좌우합작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당시와 같이 격화된 좌우대립의 상황하에서는 한반도의 통일은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 명백함으로 몽양은 양극단을 제외한 좌우익세력을 총망라하여 통일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미군정 고문 버치의 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때문에 미군정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좌우를 합작시키기 보다는 조선공산당을 자극해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어쨌던 당시 좌우합작 문제는 남한의 정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진 것은 사실이었다. 1946년 6월 6일 민주의원을 대표하여 김규식과 원세훈, 그리고 민전을 대표하여 여운형과 허헌이 첫 회합을 가졌으며, 7월 21일에는 좌우합작기구가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이 무렵 합당문제와 좌우합작문제로 좌파는 남조선노동당과 사회노동당으로 분열, 몽양은 좌우합작의 열렬한 지지자인 강진과 백남운 등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좌우합작의 기반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와중에 열린 10월 4일의 회합에서 좌우 양측의 대표들은 좌측의 합작 5원칙과 우측의 합작 8원칙을 절충함으로써 합작 7원칙을 만들어냈다. 10월 10일 합작위원회 비서국을 통해 발표된 합작 7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삼상회의 결정에 의해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공위의 속개를 요청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상조건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여하며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며 민생문제를 급속히 처리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이를 심의 결정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검거된 정치운동자들을 석방시키는 동시에 남북좌우의 일체테러를 즉시 제지하게끔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대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 운영방법 등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연구, 입안하여 이를 적극 실시하도록 노력할 것등이다.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다수의 중간세력들은 이에대한 지지성명을 냈지만,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이승만, 한민당의 양세력은 이를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민당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기본정책으로 삼은 이승만 노선을 추종하면서 미소공위의 성공을 적극 방해하였다. 그들은 또 좌우합작위원회가 발표한 합작 7원칙이 토착지주들의 이익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극구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적극적 파괴공작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미소양군의 현지 당국자 사이에 있었던 공위 재개교섭이 진척되고, 마샬 미 국무장관과 몰로토프 소련 외상간의 서신교환을 통한 의견 접근이 이루어져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가 재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전처럼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것을 막고 성공적으로 추진시켜 통일임시민주정부의 수립을 조속히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중간파세력들을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집결시킬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공위파괴와 남한에서의 단정수립을 획책하는 우익세력과의 격렬한 대립항쟁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사업인 통일국가 수립을 향한 일념으로 정계로 다시 복귀한 여운형의 몫이었다. 떨어진 큰 별과 단정수립의 길 그러나 좌와 우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미소간의 냉전적 분위기가 불붙으면서 여운형의 중도좌파로서의 입지는 점차 부식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 좌우합작운동에 계속 헌신하던 몽양은 1947년 7월 19일 극악무도한 테러속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해방직후 정치적, 사회적 격동속에서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피로써 장식하면서 몽양은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측은 처음에는 그 배후를 박헌영과 김구로 몰고가다가 나중에는 단정을 지지하던 극우청년 한지근의 단독범행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당시에도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찰발표와 재판정의 판결에 남아 있는 많은 의혹과 더불어 사건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어둠속에 묻혀져 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소공위의 파탄속에서 단정의 길이 굳어짐에 따라 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와졌다는 사실이다. 즉 몽양이 피살됨으로써 좌우합작은 사실상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버렸고, 이후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이관절차를 밟아 단정의 길로 줄달음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돌연한 죽음은 단순히 한 자연인의 죽음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좌우합작운동과 통일독립 민주국가 건설작업에 막대한 타격을 준 사건으로 역사속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며, 그의 죽음을 사주한 어둠의 세력들은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단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기형, 『몽양 여운형』(실천문학사, 1988) 여운홍, 『몽양 여운형』(청하각,1967) 윤해동, “여운형 암살과 이승만,미군정”,『역사비평』,1989년 가을호 강준식, 『적과 동지 1-7』(한길사,1993)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1』(녹두,1993) 몽양은 45년 8월 18일부터 12차례의 암살위험을 겪었다. 1947년 7월 19일 몽양이 암살당하던 날 몽양은 명륜동동 정무묵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용중과 환담을 한 이후 계동집에 가서 옷울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갈 생각으로 명륜동 네거리을 향하여 차를 몰았다. 그날 오후, 서울운동장에서는 우리나라가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이 된 것을 경축하기 위한 영국팀과의 친선 축구경기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에 앞서 6월 23일, 국제올림픽위원회에는 우리나라의 회원국 가입을 결정하였다. 몽양은 당시 체육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한편 전화를 받은 장녀 난구는 아버지의 속내의・와이셔츠등의 옷들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그곳 경찰관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몽양의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몽양 일행이 어리둥절하는 찰나, 두 발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몽양의 거구가 풀썩 거꾸러졌다. 흉한 하나가 자동차 범퍼로 뛰어오르고 몽양을 향해 권총 두발을 쏘았던 것이다. 신변보호인 박성복은 권총을 빼어들고 범인을 추격하였고, 함께 탔던 고경흠은 피를 흘리는 몽양을 안고서 원남동 대학병원으로 달렸다. 흉탄을 맞은 지 2분도 채 못되어 워낙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에 차가 병원에 닿기도 전에 몽양의 맥박 고동은 멈추고 말았다. 흉한이 쏜 탄환 하나가 몽양의 등에서 복부를, 다른 하나는 어깨 뒤쪽에서 심장을 정통으로 관통하였다. 그때 시각이 오후 1시였다. 근농은 범인과 배후와 경찰관여 여부에 대하여 생각컨대 이 범행은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볼때 어던 개인의 고립된 의사와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모의와 음모에 의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것이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에는 경찰이 직접 관여하였거나 글허지 않으면 적어도 경찰이 그것을 묵인하였음이 확실하다고까지 느껴진다. 첫째로 형님이 총격을 당한 지 불과 몇 분 만에 신문사의 것이 아닌 모단체의 벽보가 나붙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둘째로 현장에서 범인을 추적했던 형님의 신변변호인 박성복이 진술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총소리와 함께 형님이 쓰러지자 박성복은 권총을 빼어들고 범인을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를 경관이 붙잡았기 대문에 범인은 근처의 집 담을 넘어 도주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경찰은 범인을 체포하기는 커녕 도리어 박성복을 검거하여 성북서에 유치하는 한편, 운전사 홍순태를 서대문서에, 그리고 그날 자동차를 동승하지도 않았던 다른 신변변호인 이제황을 동대문서에 유치하고 마치 그들이 매수를 당하여 모살이라도 한 것같이 심문을 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체포되었다고 하는 한지근은 19세의 미성년자라고 하였지마는 외관상으로나 또는 공판정에서 진술하는 그의 태도로 보아 20세가 훨씬 넘는 청년이었음이 틀림없으며, 얼마 후 필자에게 온 투서에 의하면 이 범인의 성은 한이 아니고 김이고, 그의 나이는 25세로서 김영철이라는 조종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범인의 체포장소도 처음에는 영락정 유풍상회라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신당동 304 신동운집이라고 발표됨으로써 일반의 의아심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1974년, 그러니까 사건 발생 27년 만에, 그동안 한지근의 단독범으로 매듭지었던 몽양의 실해사건의 공범자들이 나타났다.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15년이다. 따라서 사건 발생 27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공범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때 자수를 희망해온 사람은 김흥성・김영성 형제와 김훈・유용호 네사람이었다. 이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총지휘는 김흥성, 제1저격수는 한지근, 제2저격수는 김훈, 확인 도피책에 유용호와 김영성이었다. 이에 대해 김두한은 회고하기를 “우리나라의 백의사 사원 자격은 이북에서 월함한 동포로 북한괴뢰정권에서 가장 심한 학대를 받은 유족들로만 구성된 비밀결사조직이었다. 나는 남한 사람으로 단 한 사람의 고문이었다. 백의사는 결사대를 뽑았다. 당시 18세의 한지근 군이 선발되었다. 여씨를 사살하기 전날밤 나는 한군에게 권총을 수교하고 악수를 했다. 일본장교용 권총 한 자루를 내어주고 넘버를 내 수첩에 적어 놓았다. 얼마 후 나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에게 불려갔다. 그분은‘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주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19세라던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으로 나이는 21세, 고향은 평북 영변으로 20일 전 월남했었다.(“월간조선”, ‘정치테러리스트 김지웅’, 1982년 12월호) 옛 휘문중학교 운당장 뒷편에는 여운형의 자택이 있었다. 현재 반은 헐렸다. 나머지 건물은 현재 ‘안동칼국수’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맞은편 왼쪽) 이 집은 조선중앙일보사 해산 때 기증받은 뜻깊은 집으로, 예전에 질녀 여견구 여사가 살고 있었다. 휘문중학교가 헐리고 그 자리에 현대가 들어서느라 아무런 동의나 양해도 없이 집 밑에 10여 미터 쇠말둑을 열여섯개나 박아놓아 담벽 온돌바닥이 갈라지는 손상을 입고 상당부분이 잘렸다. 대문쪽 역시 서울시가 큰길을 내는 바람에 많은 부분이 잘려나가 50여 평이던 대지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담벼락이 휘문중학운동장하고 접하여 있어 공이 담을 넘어오면 몽양은 손수 주워주면서 학생들을 격려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식당 주인이 개축공사를 할려고 하는 것을 기념사업회에서 막고 있는 실정이다. 박헌영과 동창인 심훈의 친형인 심천품이 여운형과 한집 건너에 살고 있었으며 세집 떨어져 있는 곳이 홍증식의 집이다. 홍증식 홍증식은 1895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구한국 시대 궁내부 관리를 지낸 홍승범의 아들로서 이지용 백작의 처조카이다. 1905년 상경하여 보성소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보성중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다. 1914년 동경으로 유학을 갔으나 학비 부족으로 중도에 포기했다.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 거주하면서 이시영, 이회영, 이동녕과 교류했다. 1919년 3월 귀국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10월 동아일보사 영업국장이 되었다. 1923년 6월 꼬르뷰로 국내부 조직에 참가했다. 7월 신사상연구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후 꼬르뷰로 국내부의 신사상연구회 야체이카 책임자를 지냈다. 1924년 4월 동아일보를 나와 9월 조선일보사 영업국장이 되었다. 1925년 4월 조선일보대표 자격으로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식에 참석했고, 전형위원, 중앙집행위원, 조사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여했다. 이후 민전 자격심사위원, 중앙의원, 사무국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곳에 1945년 9월 8일 박현영의 재건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통합대회인 계동 열성자 대회가 열렸다. 계동 열성자 대회 1945년 8월 15일 서울계의 이영, 정백 화요계의 이승엽, 조두원, 조동호, 상해계의 서중석 등은 장안빌딩에 모였고, 다음날 조선공산당 결성을 마쳤다.(세칭 장안파공산당-종로의 장안빌딩) 8월 15일 같은 날 ML계의 최익한, 이우적, 하필원 등은 당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공산당 서울시당부 간판을 내걸었으나, 이들은 곧 장안파공산당과 제휴하였고, 같은 날 밤 경인지구에서 이정윤 등은 공산주의 협의회를 소집하여 조직문제 해결을 주장하였다. 한편 박헌영은 8월 16일 이후 서울에 와 20일 경성콩그룹과 화요계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일반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이라는 테제를 작성하였다. 박헌영의 재건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통합운동은 열성자대회로 나타났다. 9월 8일 약 6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박현영 지지를 결성하고 장안파 공산당의 소수 간부를 제외하고 재건준비위원회의 흡수를 결정했다. 홍증식의 집터를 보고 다시 돌아나와 북쪽으로 오르다보면 대동상업고등학교 입구 남쪽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살던 한옥자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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