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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 환선굴 (태백) - 대이동굴지대 ♧환선굴이 있는 신기면 대이리 지역은 관음굴, 제암풍혈, 양터, 목세굴, 덕발세굴, 큰재세굴 등 6개의 동굴이 밀집되어 있는 동양최대의 동굴지역으로 "대이동굴지대" 라고 칭함
♧97. 10. 15 개방된 환선굴은 총 연장(추정) 6.2km에 개방구간 1.6km로 해발 820m에 위치한 경사복합형 석회동굴로 평균기온 10.2∼14.0℃, 습도 86∼96%, 수은 10∼13.3℃이며 동양최대의 동굴로 폭 100m가 넘는 중앙광장과 6개의 크고 작은 폭포, 환선굴의 상징인 옥좌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 178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음
♧대이리 지역은 중요 민속자료인 통방아, 너와집, 굴피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 일대를 "대이리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음
♧노선 삼척에서 진입시 - 삼척시에서 도계읍(태백시) 방면으로 38국도를 따라서 가면 미로면을 지나서 신기면 소재지에 으르러 안내간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진입하면 애이동굴지대(환선굴) 가는 길이다.(삼척에서 환선굴까지 약 30분 소요) -삼척시에서 신기면 까지 17km 약 20분 소요 -신기면 에서 대이리군립공원 주차장까지 9km 약 10분 소요 태백시에서 진입시 -태백시에서 신기면까지 25km 약 30분 소요 -신기면에서 대이리군립공원 주차장까지 9km 약 10분 소요
♧개방시간 -동절기(11월∼2월) : 09 : 00 ∼ 17 : 00 -하절기( 3월∼10월) : 09 : 00 ∼ 18 : 00 ※공원매표소에 1시간 30분전까지 도착
위치 :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일원
관리청 : 삼척시청 대이동굴지대 관리사무소(0397)70-3255, 관광개발과70-3544
♥대이동굴지대는 환선굴, 관음굴, 양터목세굴, 덕발세굴, 제암풍혈, 큰재세굴 등 6개의 동굴이 분포하며,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6개 동굴중 환선굴 내부개발에 대한 허가가 이루어져 97년 10월 15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환선굴은 총연장 6.2km로 추정되는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로 표고 730m지점의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폭 14m 높이 10m의 아치형 동구를 통해 다량의 동굴수가 유출되고 있다. 일반에게 공개되는 구간은 총 1,6m로서 2개소의 광장과 6개의 지굴을 포함하고 있다. 환선굴 내부는 국내의 다른 석회동굴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종유석은 물론 여러 단계의 형성과정을 거처 복합적으로 형성된 2차 생성물들이 집적되어 있어 동굴의 생성과정과 성장, 퇴화의 과정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중앙광장의 옥좌대와 동굴입구의 만리장성 그리고 지옥굴내의 버섯형 종유폭포는 세계 어느 동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환선굴만의 자랑거리이다. 환선굴내에는 10여개소의 크고 작은 동굴호수와 6개소의 폭포가 분포하고 있어 통로를 따라 가다 보면 마치 지하계곡을 탐방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특이하게도 환선굴은 바닥의 대부분이 종유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직경 40m의 거대한 중앙광장은 수만 명의 인원을 일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백사장이 펼처져 있다. 환선굴의 주 통로는 직경 15m이상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어 그 웅장함은 다른 동굴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며 까마득한 천장에는 우수한 종유석 군이 매달려 있고 용식구와 용식공이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고 곳곳에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낙수가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굴 내부는 연중 섭씨11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으며 천장과 벽면을 통해 스며드는 물방울의 양으로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천장과 벽면의 물방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영롱한 빛을 발하여 금광을 방불케 한다. 또한 굴 내에는 관박쥐, 붉은 박쥐, 노래기, 곱등이, 꼬리치레 도롱뇽, 새우, 플라나리아든 24종의 동굴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들 중 박쥐, 도롱뇽, 노개기, 곱등이는 개방구간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어 흥미를 더해 준다. 환선굴은 그 규모가 워낙 거대한 관계로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신비로운 볼거리들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수한 동굴 관광자원이다.
♥입장료
♥관람 소요시간 공원입구에서 동굴입구까지 : 30분(도보) × 2 동굴내부 관람시간 : 1시간 30분 ♥휴식일 : 97년까지 연중무휴 ♥여관 및 식당안내 인근 여관 (민박 포함)
인근 식당
■용연동굴(강원도 태백시) 동굴명 : 용연동굴(龍淵洞窟) 위 치 :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산47-69번지 개장일 : ’97. 10. 31. 동굴길이 : 843m 동굴특징 -동굴 주차장 : 동굴입구(관람객들을 위한 낭만의 옹연열차 운행) -전국 최고지대 건식 석회동굴(해발 920m) -전국 최초의 동굴 광장내에 환상적인 분수설치(5개소) -동굴내 각종생성물 다량보유 동굴산호, 평정석순, 유석, 커어튼, 동굴진주등) -진입로 1,2㎞의 계절별 볼거리가 전국최고(신선한 삼림욕, 단풍, 설경 및 설화) -타동굴내에서 만끽할수 없는 시원함과 색다른 종유석인 동굴산호 생성 -관람시간 : 하절기 - 3월1일 ∼ 10월31일까지( 09 : 00 ∼ 18 : 00 ) 동절기 - 11월1일 ∼ 2월28일까지( 09 : 00 ∼ 17 : 00) -매표사간 : 관람시간 종료 1시간 전까지 -연락처 : 담당 김선미 (0395)50-2648
♠동굴 이용료 현황(관람료는 열차탑승료 포함금액임)
♣용연동굴 찾아 오는 길 아름다운 우리 고장의 관광명소 용연동굴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동굴로서백두대갼의 금대봉 하부능선 태백시 화전2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희 용연동굴을 찾아 오시는 방법은
【열차이용시-태백역 하차】 시내버스 이용시 태백역 앞 터미널에서 용연동굴 주차장까지 이동(요금 ₩530) 택시 용시 태백역에서 용연동굴 주차장까지 이동(요금 ₩5,000)
【관광버스 및 자기차량 이용시】 ☞경북, 안동 봉화에서 찾아오시는 길(태백시내 진입) -태백시 동점, 장성 지역 및 태백시내를 경유 정선(고한, 사북)방면으로 직진 화전2동 사무소를 지나 "용연동굴 표지판" 앞에서 우화전하여 다리로 진입 ☞영월, 상동 방면에서 찾아오시는 길(태백시내 진입) -태백시 소도동을 경유하여 시내를 거쳐 정선(고한, 사북)방면으로 직진 화전2동 사무소를 지나 "용연동굴 표지판"앞에서 우회전하여 다리로 진입 ☞삼척, 도계 방면에서 찾아오시는 길(태백시내 진입) -삼척 도계읍을 거쳐 태백시 연화동(통리재)를 경유하여 시내로 진입 교통신호 사거리에서 우회전후 정선(고한, 사북)방면으로 직진. 화전2동사무소를 지나 "용연동굴 표지판"앞에서 우회전하여 다리로 진입 ☞강릉(인계)방면에서 찾아오시는 길 -태객시 사조동을 경유 화전1동 사무소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정선(고한, 사북)방면으로 직진 화전2동 사무소를 지나 "용연동굴 표지판" 앞에서 우회 전하여 다리로 진입 ☞정선(사북, 고한)방면에서 찾아오시는 길 -사북, 고한 경유 사리재를 지나 화전2동 진입 "용연동굴 표지판" 앞에서 좌회전하여 다리로 진입
대우금강산콘도 안내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239번지 (통일전망대 길목 해안가) 설명 : 콘도 주변에는 마차진리 해수욕장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무송정섬이 있으며, 틀히 콘도 전면에는 금강산, 해금강이 한눈에 보이는 해맞이동산이 있고, 통일전망대가 약 8㎞(약10분 거리) 전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면 관광지로는 부처님 진신 사리가 모셔저있는 신라의 고찰 건봉사, 철새 도래지인 화진포호와 화진포해수욕장 및 국내에서 최장기간 운영하는 알프스 스키장등이 있으며,봄에는 무공해 야생 산나물 축제가 벌어집니다. 도한, 1∼2시간대의 백담사, 십이선녀탕, 제4땅굴등 다양한 관광코스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설로는 225실의 객실에 해수사우나, 연회장, 나이트클럽, 한식당, 커피숍. 슈퍼, 노래방, 당구장, 해수풀장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동행안 청정해역에서 직접 유입하여 자연 그대로 데웟 사용하는 해수사우나는 미네랄, 염화나트륨, 칼슘, 마그네슘등 인체에 필수적인 화합물을 내포하고 있어 이들 원소들이 피부를 통하여 각 기능에 전달되어 피부미용, 관절염, 신경통등 병을 치료하는 주요성분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증명도 있습니다.
대우 금강산 콘도미니엄 단체상품(30인이상 적용) 예약 문의 : 본사 - TEL(02)543-3669, 콘도: TEL(0392)680-7800 1. 16평형
2. 30평형 (1인당)
♥식사메뉴를 이용하면 다양한 상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3. 해수 사우나와 식사 해수 사우나 단체 요금 - 4,000원 ※식사와 함께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식사메뉴 참조)
4. 학생(초, 중, 고, 대)여행(30평형)
※중식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5. 나이트 ※맥주 ₩3,000 안주 무료 (단, 과일 안주는 ₩10,000)
6, 연회장 ※무료 사용 (노래방 기계포함)
7.바다상품 1)낚시배
※장비 일절 대여해 드립니다. ※어획어종 : 배낚시 - 도다리,가자미, 광어 릴낚시 - 우럭, 꺽지, 돔, 참치, 놀래미 등 2)유람선
8. 기타 ※단체 행사시 기사 및 가이드는 객실 및 식사를 무료로 제공해드립니다. ※여행사 임직원이 객실만 원하실 경우 임직원 - 관리비 일반인 - 회원가 식사메뉴
♠ 양구군 관광안내(선사문화+안보관광+DMZ생태관광) 1.양구선사시대 박물관 우리양구에 오시면 푸른 산과 맑은 물 그리고 잘 보존된 자연생태 관광은 물론 여기에서 생산된 청정 농특임산물을 마음껏 드실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인류문화의 꽃을 피울 대망의 21세기와 다가올 통일시대를 대비해서 우리 군민 모두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꼭 한번 오시면 쾌적한 환경엣 성심껏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 상류인 하리 고인돌 공원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양구선사 박물관은 양구지역에서 출토된 신·구석기 및 청동기시대 유물 650점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어 한반도 중부내륙권에 형성된 선사시대 생활문화를 이해·연구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건물모습은 선사시대의 수혈주거지를 상징한 모형으로 되었다. ■제4땅굴 북한의 남침야욕 현장인 제4땅굴은 높이 1.7m 폭2m, 길이2,050m이고 출입구는 DMZ,남방 한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 3월 3일 발견되었다. ■을지 전망대 해발 1,047m의 DMZ철책 선에 세워진 을지전망대는 휴전선일대는 물론 금강산 비로봉 등의 비경을 직접 볼 수 있다. ■통일부 양구북한관 1996년 8월 14일 해안면에 개관된 복한관에서는 북한의 실생활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제4땅굴 및 을지전망대 방문절차 ·신청접수 : 양구군청, 각 읍면, 인제 서화초소 ·신청기간 : 당일 09:00∼15:00(신청접수처 신청기준) ·휴무일 : 매주 화요일 ·요 금 : 청소비:6∼12세 500원, 13∼64세 1,000원 제4땅굴, 을지전망대 각각 적용(30명이상 단체 관광지 30%감면) 시설이용료(주차요금) : 소형2,000원 / 대형(16인승이상)4,000원 ■ 양구선사박물관 관람안내 ·신청접수 : 양구선사박물관 ·개관시간 : 09:00∼18:00(동절기09:00∼17:00) ·휴무일 : 1월 1일, 설날, 추석, 매주 화요일 ·요 금 : 어른(25세∼64세) 770원 청소년 및 군인 (13세∼24세 및 하사관 이하 군인) 330원 어린이 (7세∼12세) 330원 단체관람 - 20명이상 20%감면 ■ 양구 관광안내 ·양구군청 관광경제과 : (0364)480-2251 ·양 구 북 한 관 : 480-2674 ·청 정 양 구 판 매 장 : 480-2675 ·직 연 폭 포 판 매 장 : 480-2676 ·양 구 선 사 박 물 관 : 480-2677
원주시와 치악산 1955년 9월 1일 시로 승격 인구 약 15만이며 6·25의 격전지이고 1군사령부가 있는 군사 도시이며, 치악산은 해발 1,228m로서 최고봉은 비로봉이다. 【전설】 치악산은 은혜 갚은 까치와 선비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려 이 산을 넘어 가는데, 때마침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까치를 칭칭 감아 죽이려 하였다. 이를 본 선비가 지팡이로 구렁이를 죽이고 까치를 살려 주었다. 어느 덧 날은 저물고 하룻밤 유숙할 곳을 찾던 중, 멀리서 불빛이 보이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드리니 소복한 어여쁜 색시가 나왔다. 하룻밤 신세질 것을 청하니 쾌히 승낙하여 방에 들러가니, 맛있는 음식과 술을 가져와 시장한 참에 많이 먹고 피로에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답니다. 잠결에 답답하여 눈을 떠보니, 큰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 혀를 날름거리며 막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네 이놈 네가 내 남편 구렁이를 죽였으니 너도 살아가지 못 하리라." 급한 선비가 이르기를 "살생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곳이 선비의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부디 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암구렁이 하는 말이 "내 남편 구렁이가 오늘 죽지 않았으면 오늘밤 자정에 부부가 같이 하늘로 승천하기로 되어 있는데, 네 놈이 원수로다. 하지만 한가지 살 길이 있다. 이 산 꼭대기에 상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오늘 밤 자정에 종을 울려 주면 나는 승천하고 선비는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자정은 가까워지고 종을 울려줄 사람은 없고, 선비는 죽을 때만 기다립니다. 마침 그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종소리가 울려오는 것입니다. '댕- 댕- 댕-'. 암구렁이는 몸을 스르르 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선비는 자기를 살려준 사람이 궁금하여 산으로 올라 종각에 가보니, 어제 자기가 살려준 까치가 머리로 종을 받어 종을 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도 은혜를 모르는 자가 많은데 하물며 미물인 짐승이 자기의 생명을 바쳐 은혜를 갚았으니, 이는 인간을 깨우치는 하나의 아름다운 전설이랍니다.
상원사 상원사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그러므로 삼복 더위에 문을 세 번만 열면 그 해는 더운 여름이었더라고 하며, 절은 100여 평의 암반에 세워졌으며 법당 앞 바위틈에 희귀한 계수나무 3그루가 있어 이 절의 풍치를 더해 준다.
구룡사 (강원도 원성군 소초면 학곡리) 비로봉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문무왕 8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지금도 창건 당시의 옛 모습이 남아 있고 대웅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지은 정교한 건물이며, 절 동쪽에는 구룡폭포가 있다. 의상대사가 절터를 잡을 때, 연못에 용 아홉 마리가 살았는데, 대사가 연못을 메우고 용을 쫓기 위해 부적을 한 장 써서 넣었더니 물이 말라 용은 도망가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때부터 구룡사라 불려졌다.
정암사 (강원도 정선군 동면) 자장율사가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청량산 운제사에서 기도하다 문수보살을 뵙고 치아, 가사, 폐엽경을 전수 받고 7년만에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용궁의 보석인 마노석을 선물하여, 배에 싣고 와 울진포에 당도하여 신통력으로 갈래산에 날라다 아무도 모르게 묻어 두었다가 후일 적멸보궁탑을 만들 때 사용하였고, 물길로 운반하였다 해서 수마노탐이라 하였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부처님 사리와 가사 등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등에 나누어 모시고 이곳에 절을 짓고 갈래사라 했으며, 용궁의 보석인 수마노석으로 탑을 세워 진신 사리를 봉안하고 구태민안을 기원하였으며, 불심의 표상으로 삼아 옛부터 스님이나 신도들의 기도 대상으로 전국 굴지의 순례지 인 것이다. 수마노탑은 보물 410호로 지정되었으며, 절 앞 작은 냇물에는 천연기념물 73호인 눈이 빨간 열목어 서식지이다,
강릉시 신라 선덕왕 때는 소경, 고구려 때는 하서강, 무열왕 때는 명주라 불렸는데 강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세종때 강릉부라 칭하게 된 후부터라 한다. 1955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동해 북부선이 개통된 후 본격적으로 발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민속 행사로는 강릉 단오제와 율곡제이며, 관광지로는 경포대, 오죽헌, 객사문, 경포대 해수욕장 등이 있으며, 감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경포대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며 고려 충숙왕(1326년)대 인월사 터에 창건한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년)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고종10년(1873년) 강릉부가 이직현이 중수하였다. 누각에는 제일강산과 경포대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제일과 강산은 각각 다른 사람이 써서 걸어 놓았다는데, 누가 봐도 제일이라는 글씨를 더 잘 쓴 걸로 알 수 있다.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경포호수는 한 폭의 그림 같으며, 달뜨는 밤에 벗과 술잔을 기울면, 달이 다섯 개가 뜬다고 합니다. 하늘에 뜬 달이요, 동해 바다에 뜬 달이요, 경포 소수에 뜬 달이요, 술잔에 뜬 달이요, 볏의 눈동자에 뜬 달이라. 절로 시가 나올 것 같다. 【전설】 지금의 경포 호수는, 옛날에는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노스님이 이 마을에 와서 집집마다 다니며 시주를 청하여도, 인심이 사나운 마을 사람들은 누구하나 시주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큰 기와집에 들러 시주를 청하였더니, 못된 시어머니가 시주대신 오물을 던졌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받아 가지고 나가니,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몰래 쌀을 퍼서 드리며 용서를 비니, 노스님은 며느리에게 지금 곧 나를 따라 오너라. 어떤 소리가 나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하는 찰라 천둥이 치고 억수같이 비가 내려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였다. 이때 며느리 뒤에서 시어머니가 살려 달라고 고함을 치니 마음씨 고운 며느리,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돌이 되었으며, 곳간에 쌓아둔 모든 곡식은 조개가 되어, 지금도 경포 호수에는 조개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죽헌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은 우리 나라 어머니의 귀감이 되는 신사임당이 1504년 태어나시고, 도한 조선시대의 위대한 경세가요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 선생이 1536년 태어나신 곳이다. 보물 16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둘레에 조죽이 무성하여 오죽헌이라 부른다. 신사임당은 중종7년(1504년) 진사 신명화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이원수에게 출가하여 4남3녀를 두었으며,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다. 특히 그의 그림은 풀, 벌레등을 잘 그렸는데, 장마에 그림이 누기가 차서밖에 말리려 내어놓았는데, 그의 벌레 그림을 보고 진짜 벌레인줄 알고 닭들이 쫗았다 한다.
율곡 이이 조선 준종31년(1536년)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셨으며,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였고, 호조, 변조판서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시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당파 싸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학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선조 17년(1584년)49세로 별세하시어 파주군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었다. 【전설】 하루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안고 마당에 있을 때,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며 이 아기는 큰 인물이 될 상인데 세 살 때 호환의 액이 있으니 애석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신사임당은 스님께 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간청한즉, 스님은 집 뒤에 밤나무 백 그루를 심으시오 하고는 가 버렸다. 과연 율곡 선생이 세 살 때, 한 중이 와서 큰 호랑이로 변하여 아기를 데려 가겠다고 하니. 사임당은 대경실색하여 꾸짖되 무슨 소리냐 밤나무 백 그루가 있는데 하였다. 호랑이와 같이 밤나무를 세어보니, 아흔 아홉 그루밖에 없었다. 한 그루는 말라죽은 것이었다. 이에 호랑이는 아기를 또 내어놓으라고 성화인데, 그대 마침 나무 한 그루가 나서며 나도 밤나무다 라고 외치며 백 그루를 채우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할 수 없이 중으로 둔갑하여 도망하고 말았다. 나도 밤나무다 나무는 밤은 안 열리지만 밤나무와 똑같이 생긴 나무로 오죽헌 뒷산 일대에 많이 있는 나무라 한다.
객사문 (강릉시 용강동) 객사문은 보물 제51호로서 궐패를 모시어 두고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관리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집으로서 고려 태조19년(936년) 인도식으로 세워진 것으로 고료시대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다.
방해정 원래 삼국시대 고찰인 인월사지로서 서기 1859년 토천군수 이봉구가 관직을 버리고 이 정자를 짓고 이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청학동 소금강 명주군 연곡면에 위치하며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하여 소금강이란 이름을 붙었지만 고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산정에는 아니 산성이 약 8㎞남아 있는데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 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재기의 꿈을 키웠던 곳이라 한다.
하조대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고려 말엽 하륜과 조준 두 사람이 은거하였던 곳이라 하여 두 분의 성만 다서 하조대라 부른다 한다. 조선시대 정종대 정자를 세웠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무너지고 바위에 새긴 하조대라는 글자만 있었는데 1939년 현북면 유지들이 현재의 육각정을 건립하였다. 【전설】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나라의 왕통이 더 지탱할 수 없음을 알고, 하륜과 조준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되겠다는 뜻을 품고, 경치 좋은 이곳에 와서 새 왕조 건립의 모사를 하여, 이곳에서 꾀한 그들의 혁명이 이루어져 뒷날 그들의 성을 따라 하조대라 불렸다 하기도 하고, 옛날 하조대 근처 하광정리에 하씨 성을 가진 훌륭한 총각이 있었는데, 이웃 조씨 가문에 혼기 찬 두 처녀가 있었다. 두 처녀가 모두 하씨 총각을 사랑하여, 한사코 양보를 하지 않아 그 해결책을 논의하였으나 당시의 관습이나 윤리가 함께 살 수 없어 낙심한 그들은 하조대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그 후 이곳을 하조대라 불렀다 하며 이곳 백사장에서는 그들의 넋인 양해당화가 더욱 붉게 피었다는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다.
3·8선 휴게소 3·8선은 민족상잔과 조국분단의 뼈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이전에는 3·8선이라는 글이 새겨진 돌의 북쪽은 북한 땅이었고, 남쪽은 우리 땅이었으나 1953년 7월 27일 만 3년 1개월 1일 만에 휴전이 되어 고성까지 우리 땅이 되었습니다. 휴게소 앞 바다를 보면 조그만 섬이 있는데, 생긴 보양이 꼭 거북이 같이 생겼다 하여 거북도 또는 한 마리의 새가 북쪽으로, 또 한 마리는 남쪽으로 날아가는 새의 형상으로 보여 조도라도도 부른다.
양양 고구려 때는 익현현, 신라 때는 익령이라 했던 것을 조선 태종16년(1416년)양양이라 하였고, 1895년 군으로 되었다가 1963년 속초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독립하였다.
남대천 연어 반드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는 연어는 남대천의 명물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연어는 몇 천킬로미터 떨어진 북태평양 베링해나 오오츠크 해에서 4∼5년을 살다가 10월달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산란을 한 후 죽는다는 데 멀리 북태평양에서 남대천까지 찾아오는 방법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냄새를 맡으며 찾아온다는 이야기도 있고, 별을 보고 방향을 찾아온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해마다 찾아오는 연어 수가 줄어들자 양양군에서는 만 대천에 올라오는 연어를 잡아 알을 짜내 인공 부화를 시켜 다른 고기에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 키워 방류시키는 일을 매년 되풀이 한 결과 80년대 들어서면서 매년 돌아오는 연어 수가 늘어나고 있다.
낙산사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작시나사는 신라 문무왕16년(676년)에 의상대가 세운 것인데, 창건 유래는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속에 머무신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7일 동안 기도 드렸더니, 천중과용중 등 8부의 시종이 그를 굴속에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 드렸더니. 수정 염주를 한 꾸러미 내어 줌으로 의상법사는 물러 나왔다. 동해의 용이 여의 보주 한 알 바치자 스님은 받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는데,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낙산에 올라가면 한 쌍의 대가 솟아 날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일 것이다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굴속에서 나와 낙산에 오르니 과연 대나무가 한쌍 솟아 나왔다. 그 자리에 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시니 바로 원통보전이다.
홍예문 조선 세조11년(1465년) 만든 것인 데 반월형의 문루로서 서쪽에서 진입하는 낙산사 입구에 세워졌으며, 화강암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 반월형의 문을 만들었는데, 고을 군수가 각각 한 개씩의 석재를 모아 만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홍련암 이 암자는 의상스님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굴 앞에 있는 반석에 앉아 밤낮으로 7일간 기도하였더니 별안간 바다 위에 홍련이 솟아 그 속에 관음보살이 현신 하여, 의상은 관음을 친견하였고, 빨간 연꽃이 솟았다 하여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으며, 석굴 위에 지어진 유일무이한 법당 양식으로 법당 마루를 열고 밑을 내려다보면 의상이 기도했던 보타굴이 보이며, 푸른 바닷물이 출렁거린다. 이와 같이 법당 바닥을 열수 있도록 한 것은 여의보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의상대 의상대사가 낙산사 창건 당시 매양 이곳에 와서 좌선했기에 1925년 이곳이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했다. 1936년 폭풍우로 무너진 것을 주지승이 재건하였다 하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동해의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니, 과연 관동팔경중의 하나이다.
7층석탑 (보물 499호) 원통보전 앞에 아담한 7층 석탑이 있다. 탑의 겉모양은 고려나 신라시대 양식과는 달리 조선시대 특유의 다층석탑이며 중요한 것은 조선 세조 13년(1467) 3층이던 것을 7층으로 조성하여 의상대가사 용으로부터 받았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동종 (보물 제479호) 조선 8대 예종(1469년) 제작. 높이가 158㎝, 구경 98㎝이다.
해수관음입상 관음상은 신라 호국사상을 살려 국태민안과 남북통일 기원하기 위하여 1972년 5월부터 1977년 11월 6일까지 5년여 동안 전북 익산, 호남 채석장에서 화강암을 반입해 연인원 1만3백 명을 동원5년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관음기도를 올린 조각가 권정환시에 의해 완성되었다. 화강암 750톤이 들었고 높이가 16m, 둘레가 3,3m이며, 관음상은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미간에는 백호를 박아 온 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며 방향을 동남향으로 건립하였다. 이것은 풍화를 방지하고 햇빛을 많이 받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설악산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은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 높은 산으로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해발 1,708m로 세 번째로 높으며 명산이다.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외설악, 내설악, 남설악으로 나눈다. 삼국사기에는 설악을 설화산 또는 설산이라 적고, 동국여지승람에는한가위에 눈이 오면 다음해 하지에 눈이 녹아 설 악이라 적었으며, 다른 기록에는 봉우리마다의 바위가 눈같이 희어서 설악이라 불렀다 한다. 산은 세 가지로 나눈다는데, 첫째, 육산 : 흑으로 이루어져 나무가 무성하다. 대표적인 산은 백두산. 둘째, 골산 :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경색이 수려하다. 대표적인 산은 금강산. 셋째, 웅산 : 연봉이 면면하여 산세가 웅장하다. 대표적인 산은 지리산. 설악산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섞어, 골짜기마다 폭포와 기암괴석이며 반달곰을 비롯하여 531종의 동물과 희귀식물인 에델바이스 및 758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조선 선조 임금때 명재상이었던 송강 정철은, 설악산이 명산이라 역절이 난다하여, 임금의 명을 받고 설악산의 혈을 찌르러 왔다가 갑자기 벼락과 천둥이 일어나니 혈을 찌르지 못하고 돌아가며 설악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고경이며, 봉은이 아니라 난은이라고 중얼거리며 과연 설악은 명산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울산 바위 이 암산은 일명 천후산이라고 한다. 둘레가 10리나 되며 높이는 950m, 계조암에서 808계단을 올라가면 설악산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며 동해의 파란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전설】 유달리 금강산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산신령은 봉우리를 1만2천 봉으로 하고 그 형체를 가지각색으로 하려고 전국의 각 산에다가 큰 바위를 모조리 금강산으로 보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경상도 울산 땅에, 이 고을에서는 내가 최고 큰 바위라고 뽐내는 울산바위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웃 친구 바위들에게 금강산에 최고 봉우리가 되겠다며 자랑을 늘어놓고 길을 떠났다. 남에게 뒤질세라 부지런히 걸었지만, 워낙 큰 덩치라 걸으니 더디었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북으로, 북으로 걸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기진 맥진한 울산바위는 지금의 울산바위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 다시 출발하려 하는데 금강산은 어제 밤으로 1만 2천 봉우리가 다 차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고향에서 친구들에게 자랑만 하고 온 울산바위는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그 자리에 눌러 앉으니 오늘날 울산임이 서 있는 자리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조선조 숭유 억불 시절 한 원님이 울산에 부임하였다. 설악산에 울산암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보복의 일환으로 설악산 스님들을 골탕먹이자는 계획을 꾸몄다. 지금이나 그 때나 외설악 일대는 신흥사의 땅이었다. 어느 해질 무렵 울산원님의 교자가 신흥사 앞뜰에 놓여졌다. 그는 대뜸 소리쳤다. 이 방자한 중놈들아. 우리 바위가 너희 설악산에 버젓이 있으니 올해부터는 바위 세를 꼭꼭 내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을 대는 폐찰을 면치 못하리라. 이후부터 신흥사는 매년 가을 해괴한 바위 세를 울산에 바쳤다. 이로부터 신흥사는 바위세 때문에 날로 기울어져 갔으며, 주지승의 얼굴은 날로 여위어 갔다. 그것을 본 한 동자승이 그 연유를 물었더니 스님은 네가 알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소승이 알면 안되나요? 혹시 대책이 강구될 지 모르니 말씀해 주세요, 주지승은 귀찮아하면서도 동자승에게 그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동자승은 뭘 그까짓거 가지고.......하면서, 울산 원님이 바위 세를 받으러 오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울산원님이 바위 세를 받으러 행차하였다. 동자승은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러잖아도 저 바위를 가져가라고 전하려고 갈 참이었습니다. 저 바위 터에 내년부터는 곡식을 심어 절 식량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깜짝 놀란 원님은 동자승의 계략에 질 수는 없었다. "좋다. 그러면 파갈 터이니 그 바위를 파 가게끔 새기를 태운 재로 묶어 놓아라." "좋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울산 원님이 떠난 후 동자승은 마을 청년들을 시켜 새끼를 꼬게 하고 그 새끼를 동해 바다 소금물에 절였다. 그런 다음 그 위에다 그름을 부었다. 이렇게 소금에 그름을 덮어씌운 새기로 울산 바위를 묶고는 그 위에 불을 질렀다. 새끼는 기름에 불이 붙어 훨훨 타 새까만 재와 같이 되었으나, 소금에 절은 속만은 튼튼했다. 다시 신흥사에 온 원님은 동자승의 기지에 의한 새끼줄을 보고 탄식했다. "네놈이 세월을 잘못 타고 나와 중놈 된 것이니 아깝구나" 하면서 울산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입니다.
계조암 계조암은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 자장율사가 건립하여 의상과 원효 두 스님에게 계승케 했다고 하여 계조암이라 불렀다 한다. 경내에는 석간수라는 바위틈에서 나는 약수가 있어 숨이 차서 산에 올라와 한잔의 약수를 마시는 그 상쾌하고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흔들바위 황소바위의 넓은 등허리에 앉아 있으며, 일명 소뿔바위라고도 부른다. 한사람이 흔드나 백 사람이 흔드나 똑같이 흔들린다.
와선대 옛날에 마고선이란 신선이 이곳에 누운 채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였다 하여 와선대라 이름이 붙었으며 그때 마고선이 누웠다는 자리가 남아 있다.
금강굴 해발 900m에 위치. 길이는 18m. 1200년 전 원효 스님이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는 곳이며, 굴속에는 관광객이 목을 축일 수 있는 약수가 있다.
신흥사 원래는 신라 진덕여왕 7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향성사라 불리다가 선조때 임진란으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인조 22년(1644년) 운서, 연옥, 혜원 세 스님이 꿈에 소림암에서 노인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삼재를 면하리라는 계시를 받아 지은 절이 현재의 신흥사이며, 6·25때도 그 노인의 말처럼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다.
권금성 해발 800m. 권금성에 오르면 약 80간이나 되는 큰 반석이 있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길이 2㎞의 산성이 있다. 【전설】 해발 800m의 높은 산 위에 있는 권금성은 높이가 2자, 둘레가 2㎞정도인데 어느 시대인가 병란때 권장사와 김장사가 한 마을에 살고 있다가 가족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급한 대로 산정에 가족을 올려놓고 보니 산성에 성이 없어 적과 싸우기에 퍽 불리하였다. 도 산정에는 성을 쌓을 돌이 없어 권장사 김장사가 의논하였다. 한사람이 내려가 돌을 던지면 한 사람은 던지는 걸 받아서 성을 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하루 밤에 성을 다 쌓았으니, 권장사 김장사 두 사람이 쌓은 성이라 권금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척산 온천(속초시 노학동) 지금부터 50년 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온천수가 자연 분출하여 피부병 환자들이 몰려 왔으나, 물량이 적어 제구실을 못하다 국토개발의 일환으로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지질조사 분석 시험 후 시추, 1969년 12월 30일 지하 250m에서 44.8℃ 용출. 그후 1973년 현 척산 온천 주인이 몇 차례 시추 후 지하 450m에서 53℃ 온천물을 얻는데 성공했다. 척산은 지세가 여할 상이라 여자가 개발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있고, 날개가 상한 암컷 학이 날아와 온천물에 앉았다가 날고 앉았다가 날아 상처를 아물게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천연 알칼리천이며, 나트륨이 다량 함유되어 세계적으로 희귀하며 피부병, 안질,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
영랑호 금강산에 비겨 손색없다는 설악산을 등에 업고 맑은 호수가 있으니, 옛날 영랑, 술랑, 안상, 남석 등 네 신선 혹은 화랑이 금강산에 놀다가 영랑만에 배를 띄워 놀았다 하여 영랑호라 불렸다 하며, 예로부터 원님이 부임하면 호수에 꽃배를 띄워 강원도의 예쁜 아가씨들과 연 삼일을 밤을 세워가며 가무를 즐겼다 한다.
속초시 신라 때는 수성군, 고려 때는 양양군에 속하다가 1940년 읍으로 승격, 1963년 1월 1일 시로 승격, 인구 약 7만에 달한다. 7만중 3만이 북한 사람이고 오징어 잡이의 이름난 항구다. 오징어 파시를 이루는 7월부터 12월까지는 속초 항이 불바다를 이루며, 오징어는 보통 30∼40㎝의 크기나, 미국 하버드대학교 박물관에는 78m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오징어도 있다고 한다.
도루묵의 전설 속초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도루묵은 생선 중에 별맛이 없고 값이 싼 고기었고 이름은 묵이라 불렸는데 임진왜란때 선조 임금이 피난을 왔을 때 밥상에 묵이 올랐다. 피난살이에 지치고 허기가 진 선조는 묵이라 불리는 생선이 참으로 맛이 있었으나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맛도 있고 빛깔도 은빛이 도니 은어라 부르라고 명하였다. 피난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임금은 피난 때 먹어본 고기가 생각이 나서 다시 먹어 보았더니 그전 맛이 아닌지라 은어라 지어 주었던 이름을 도루 묵으로 고쳐 부르도록 명하였다 하여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청간정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관동팔경중의 하나로 수십 척 벼랑 밑으로 하얗게 뻗힌 백사장이 멀리만 보이고, 청간정이란 현판을 고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 하며, 이 부근에 건봉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은 신라 법흥왕 대 창건한 절이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처음 출병한 곳으로서 해인사, 통도사 등과 나란히 견줄 만한 대찰 이었으나, 6·25로 폐허가 되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이 적힌 돌기둥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진부령 이 고개는 인제와 간성 사이로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이며, 향로봉, 마산사이의 안부를 넘으며 관동, 영서 지방의 교통에 있어 대관령, 추지령과 함께 3대 영으로 불린다. 고개 길이는 60㎞에 달하고, 해발 780m이다.
오색약수(양양군 서면 오색리) 이 약수는 약 500년 전 어떤 승려가 반석 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발견, 마셔 보고 약수로 판매되었고,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 하여 오색약수라 불렀다 하기도 하고, 약수터 부근 성국사라는 절에 한 나무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판다 하여 오색약수라 불렀다 한다. 수질은 탄산수이며 철분이 많아 위장병과 신경통, 빈혈에 특효하며 기생충 구제에도 좋다고 한다.
내설악과 남설악 설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외설악은 크게 알려진 흔들바위, 울산바위, 권금성, 신흥사가 있는 북쪽이며, 내설악은 대승폭고, 한계령 등이 있는 곳을 말하며, 남설악은 오색약수, 주전골, 오색골, 칠형제봉이 있는 남쪽을 말한다.
오색온천 일제 때는 고려온천이라 불렸고, 일제 때 온천을 개발한다고 폭약을 터트려 잡수가 섞여 수온이 24℃밖에 안 된다. 유황성분이기 때문에 피부병에 효력이 있다.
한계령 조선시대에는 오솔길로 도둑 떼가 들끓어 해가 지면 넘지 말라는 금표를 양양군 서면 오가리에 세워 둘 정도로 험했던 이 도로는 , 옛 고사에는 오색령이라 불렸고, 1966년 착공 1971년 12월 완공 6년간에 걸쳐 육군 제1102야전공병단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을 1979년 9월 20일부터 1980년 12월30일까지 롯데와 평화건설에서 확장 포장하여 오늘날 이렇게 좋은 도로가 되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해발970m로서 인제군과 양양군의 경계가 되겠고,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합쳐져 평지의 기온보다 7℃나 낮다고 하며 108계단을 올라 설악루에 오르면 멀리 동해 바다와 기암괴석, 산허리를 감싼 안개 등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하며, 이 도로를 만들다 희생된 7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비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대승폭포 이 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와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폭포 중의 하나이며, 높이가 88m이다. 옛날에는 한계폭포라 불렸으나 대승폭포라 불려지는 유래는 이러하다. 옛날에 부모를 일찍 여윈 대승이라는 총각이 이 고장에 살았는데 집이 시인 듯 모르게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절벽 위에서 대승아, 대승아 하고 들려왔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란 대승은,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 보니 어머니는 온데 간데 없고, 동아줄에는 커다란 지네가 매달려 동아줄을 쓸고 있었는데 거의 다 끊어져 있었다. 급이 오르느라 온몸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하며, 후세 사람들은 죽어서도 아들의 위험을 알려준 어머님의 외침이 메아리 친다 하여 이 폭포를 대승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장수대 옛날에는 이곳을 자양동이라 불렀는데 6·25때 이곳 설악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를 기념하고 장군들의 휴양소로 쓰기 위해 오덕준 장군께서 군단장 재임시 48평의 아담한 한옥 건물을 짓고 장수대라 명했다.
하늘벽 길이가 약 300m, 높이가 250m, 하늘을 깎아지른 듯 하다고 해서 하늘벽이라 부르며, 옛날 학이 깃들이고 있었다고 해서 학서암 이라고도 불렸다 한다. 독사가 학을 잡아먹으려고 절벽을 기어오르다 벼락을 맞아 독사의 피가 절벽에 묻어 붉은 색을 띈다는 전설이 있다.
옥녀탕 먼 옛날 대승폭포에, 달에서 온 옥선녀 12명이 하강하여 목욕을 즐겼는데 큰 지네가 이들을 괴롭혀 이곳까지 쫓겨왔으나, 이곳까지 따라와 해치려하자 옥황상제가 벼락을 내려 지네는 죽고 옥선녀는 승천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 선녀가 목욕탕으로 사용하였다는 웅덩이가 있어 관광객들이 손을 씻고 세수도 하면 젊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담사 서기 647년 신라 진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한계사로 불리다가 여러 번의 화재로 중건 운흥사 또는 심원사 등으로 개명되어 부르다, 서기 1783년 정조 임금때 백담사로 개명하였는데 1946년 소실, 지금의 건물은 1957년에 재건립 한 것이다. 【전설】 청정의 도장인 백담사는 원래 낭천(현재의 화천)에 비금사라는 이름으로 있었는데 그 산에 짐승이 많아 포수들이 짐승을 마구 잡았다. 이 까닭에 그곳의 산수는 부정하였지만 사람들과 주지스님도 그것을 모르고 샘물을 뗘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니, 그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이 하룻밤 사이 그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 한계사 터에 옮겨 버렸다. 이 사실을 모른 스님과 묶고 있던 길손이 아침에 깨어보니 절은 비금사기 틀림없는데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로는 시원한 폭포가 있는 등 주위가 달라져 그 까닭을 몰랐다. 절을 하룻밤에 옮기며 절구와 청동화로를 떨어뜨리고 왔는데 지금도 절구 떨어진 곳을 절구골, 청화로 떨어진 곳의 한계리 부근인데 이곳을 청동골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용대리 암자동으로 절을 옮기며 영취사라 고쳐 불러 보았으나 화재가 나고 또 가평으로 옮겨 우원사라 불렀으나 계속 화재가 나 절 이름이 잘못 되었기 때문인 것을 알고 고치려고 애쓰던 어느 날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담수를 세어보라고 일러주어 이 말에 암시를 받은 주지스님이 다음 날 청봉에서 절까지 담수를 세어보니 곡 백개였다. 그래서 백담사로 개명하니 전처럼 화재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세암 신라 선덕여왕13년(644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관음암이라 칭하다 조선 인조21년(1643년)에 설정스님이 중건하고 오세암이라 불렀다. 【전설】 고려대 명스님 설정이 다섯 살 난 조카를 데리고 이 곳에서 살았다. 겨울이 다가오자 스님은 눈이 내리 기전에 겨울 양식을 마련하려고, 양양쪽으로 떠나게 되었다. 암자에 혼자 두고 온 조카에게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거라. 내가 3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일러준 후 양양으로 고개를 넘어 떠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 눈이 많이 내려 산과 같이 쌓였다. 산 고개 길이 막혀 떠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양양에서 그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이 되어 눈이 녹은 후에 비로소 암자에 돌아오게 되었다. 암자에 돌아오면서 이미 어린 조카는 죽었으려니 하고 애통해 했는데, 암자에 당도하나 죽은 줄만 알았던 조카가 방에서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이른 새벽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목소리 마냥 창창하고 방에서는 향내 음이 그윽하더라고 한다. 반가움에 문을 활짝 열었더니 파랑새 한 마리가 관음봉으로 날아가고 어린 조카아이만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음에, "아가, 난 네가곡 죽은 줄만 알았는데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면서 조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자 어린 조카는 대답하기를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늘 찾아와서 젖을 주어 오늘까지 살아 왔어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설정 스님은 다섯 살난 어린 조카가 도를 얻었다 하여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 고쳐 불렀다 한다.
리빙스톤교 1957년 2월에 준공되었으나 아이빔에 목재를 깔아 가설하였다가 1970년 12월 새로 준공하여 길이 148m, 폭 7m 높이 7m 철근콘크리트로 되었다. 이 교량은 리빙스톤교라 불리게 된 것은 6·25당시 한·미 합동작전중 리빙스톤 중령이 이끄는 포대 병력이 작전상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그 해가 1951년이었다. 당시 홍수로 인해 강수량이 많은데다, 급류로 흐르는 이 지역에 다리가 없어 많은 인명과 장비의 손실을 보았으며, 이대 리빙스톤중령도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임종 직전, 부인에게 지금의 리빙스톤교 자리에 다리만 있었더라면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아쉬워하면서 이곳에 다리를 놓아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후 리빙스톤의 미망인이 남편의 유언을 받들어 공사비를 부담하고 한국군이 완성시켜 그 분의 얼을 길이 남기기 위하여 리빙스톤교로 명명하였다.
군축령 남면 남전리와 인제간의 횡단도로 확장공사 중 수많은 장병과 장비를 도원, 이 고장에 뿌리박아 놓은 거룩한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고개마루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삼척 영동 남부에 위치한 삼척은 1895년 조선 고종32년 부를 폐지하고 삼척군으로 되었으며, 영동지방의 유일한 중공업 지역이다. 주위에는 죽서루, 무릉계곡, 삼화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죽서루 (보물 제213호)(삼척시 성내리) 관동팔경의 제1루로서 서기 1275년 고려 충력왕 원년 간관 이승휴가 지었고, 누의 동편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명기 죽죽선이 놀던 집이 동편에 있어 죽서루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죽서루와 관동제 일루라는 현액은 서기 1711년 조선 수종 때에 부사 이성조가 쓴 글씨이다. 【전설】 이승휴가 벼슬을 하기 전 두타산 아래 구동에서 노모를 모시고 밭을 갈면서 공부를 하던 때, 오십천 바위 밑에서 낚시터를 물색하던 중 그만 다리를 헛 짚어 깊은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강변에서 나물을 뜯던 기녀 죽죽선이 그를 구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둘 이는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이승휴의 어머니는 기녀인 죽죽선과의 인연을 끊기 위해 송도로 이사를 가버렸다. 이승휴 노모의 강권에 못 이겨 사랑하는 사람과 에어졌던 죽죽선은, 날마다 오십천 바위에 올라 멀리 송도를 바라보며 애타던 여심을 끝에 종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체념하고, 이 오십천에 몸을 던져 아름다운 사랑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후 이승휴는 벼슬에 올라 마침내 충렬왕 원년에 이곳에 간관이 되어오자 옛정을 못 잊어 죽죽선을 찾았으나, 어떤 사람은 죽죽선이 오십천에 단애의 몸을 던져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장사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고도 하여, 이승휴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 주고 또 사라했던 죽죽선에게, 그가 빠져 죽었다는 오십천 절벽 위에 죽서루를 지어 주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동해시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합하여 1980년 4월 1일 시로 승격. 인구 약 10만에 달한다.
망상 해수욕장 강원도가 지정한 국민 관광지 2호이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써 백사장 길이가 약 20리에 달한다. 경치 좋은 이곳은 신라 때에는 화랑들이 무예를 익혔으며, 조선때는 송강 정철 선생께서 이 곳에서 강연을 했다고 한다.
두타산 삼화사 (동해시 삼화동) 삼화사는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1년(640년)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에 들어가 성역을 찾다가 두타산(해발1,353m)을 발견하고 창건한 것이라 하며, 이곳에는 삼층 보탑이 있는데, 3형제 약사 삼불이 서역에서 동해로 와 유람할 때 돌배를 타고 이곳에 흘러 들어와 큰형이 검은 연꽃을 가지고 묵련대에 오르니 삼화사요, 중형이 파란 연꽃을 가지고 청련대에 오르니 지장사요, 막내가 금연을 가지고 금련대에 오르니 영은사라 불렀다 한다. 몇 차례 화재로 중수를 거듭해 오다가 1907년 의병이 숨었다 하여 왜병이 불을 질러 대웅전 등이 불타 1979년 원래의 자리에서 약 300m 덜어진 무릉계반 위쪽으로 옮겨지었다.
무릉계곡 (동해시 삼화동) 해발 1,563m의 청옥산과 해발 1,404m의 두타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폭포와 장담을 이루어, 옥류같이 흐르는데 마치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황홀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른다.
태백시 태백시는 태백산권의 중심지인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하여 1981년 시로 되었으며, 인구가 약 11만5천명이다. 1936년 철도가 개통되고 무연탄을 채굴하면서 각종 관공서가 들어와 강원도의 유일한 중공업지가 되었으며, 약 30여 개의 광업시설이 있다.
미인폭포 (태백시 통리) 오봉산 골짜기와 백병산 골짜기가 한 계곡을 이루며 폭포를 이루니 상단은 좁고, 하단으로 내려오면서 넓게 퍼지니, 그 물줄기가 여인의 치마처럼 생겼다 하여 미인폭포라 불렀습니다. 【전설】 옛날 이 폭포 옆에 한 미녀가 살았는데, 아무리 좋은 신랑감이 나타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폭포와 더불어 사니 세월가는줄 몰랐으리라,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남 총각이 나타났는지라 그 처녀는 총각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 총각은 할머니, 할머니가 지금 농담하고 계십니까. 이에 놀란 그미인 처녀가 물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니, 쭈굴쭈룰 주름진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놀라고 슬픈 마음에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폭포에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이 폭포 모양이 치마 모양으로 생겼으며, 그때 미인 처녀가 폭포로 떨어져 죽은 모습을 지켜 본 총각은 그대로 돌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폭포 위에 우뚝 선 바위 동자석이라 부른답니다.
너와집 (삼척군 계읍신리) 중요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진호씨의 집이다. 너와집이란 얇은 참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인 집이며, 구조가 특이하여 외양간과 부엌, 방, 마루가 한 지붕 밑에 있으며, 이 집에는 옛날 수렵용으로, 쓰이던 창과 살피 등이 남아 있다.
황지 연못 해발 700m 고원에 있는 이 못은 세 못이 있는데 윗못은 둘레가 50m이며, 아랫 못은 30m 정도로서 전설에 의하면 황씨 성을 가진 농사꾼의 집이었는데 못으로 변했다 하며, 수량이 풍부하여 가물 때나 홍수 대에도 수량이 변하지 않으며,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는 삭고 있으며, 윗 못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굴이 있고,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며 약 천여 가구의 생활용수로 쓰이는 수원지이다. 【전설】 옛날 이곳에 황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하루는 노승이 와서 시주를 청했다 지독한 구두쇠인 황씨인지라 시주하기를 거절하였으나, 자꾸 조르는 통에 그만 화가 나서 오물을 바리에 넣어 주었다. 이를 본 황씨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쌀 한 되를 시주해 올렸더니, 노승은 그 며느리에게 집에 있으면 위험하니 지금 나를 다라 오너라, 또한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막상 뒤에서 뇌성 벽력이 일어나고 천지가 뒤흔들리니, 집에 계신 시부모님 생각에 스님의 당부를 잊어버리고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있던 자기 집은 물에 잠겨 못이 되었고, 며느리는 뒤를 돌아본 탓에 그 자리에 석불이 되어, 지금도 구사리 산상에 서 있으며, 그 역심 많은 황씨 성을 따라 이곳을 황지라 부른다고 한다.
태백산 청원사 이 사찰은 태백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약 17년 전에 함태광업에서 세운 절이다. 이 절에는 용담이라는 연못이 있어 황지와 함께 낙동강의 근원지로 알려져 있다.
구무소 (장성 동점동) 구무라는 말은 구멍이란 방언이고, 이 소는 글자 그대로 산에 구멍이 뚫리면서 만들어진 폭포이며 소이다. 【전설】 옛날 경북 안동에 있는 영호루를 건축시 거기 쓸 대들보를 이곳에서 구해 황지천에 띄워 운반도중 홍수가 일어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던 싸리나무 대들보가 산을 깨뜨리고 구멍을 뚫으니 그때부터 이곳이 폭포와 소가 되었다로 한다. 또 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어부가 그물을 쳐놓았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한참을 물 속으로 빨려가니 물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신을 잃어 버렸다. 깨어나니, 넓은 들과 고래등같은 큰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어부생각에도 이곳이 용궁이구나 생각하며 문간에 들어서니, 자기가 잊어버린 그물이 걸려있어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한 노파가 나타나서 여기는 인간 세상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고 하고 물이니 어부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이 말을 듣고 노파라 하는 말이, 이곳 용구의 왕자가 그물에 걸려 죽을 뻔하여 성이나 서 이곳에 걷어 놓았으니, 죽고 싶지 않으면 발리 도망가라 하므로, 갈 길을 모르니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빌었다. 이에 노파가 내 흰 강아지 한 마리를 줄 터이니 따라 가시고, 여기 이 떡은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흰떡을 주었다. 어부는 강아지를 따라 가면서 주변 구경도하고 배고프면 떡도 먹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물 밖으로 나왔는데, 구무소 앞에 보니 무당굿 소리가 났다. 그 곳에 가보니 어부의 두아들이 아버지가 죽은지 3년이 되었다며 3주기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강아지는 곧 죽어 관에 넣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으며, 흰 덕은 집에 깊이 깊이 간직하였더니 날이 갈수록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한다.
오대산 오대산은 태백산맥의 중추를 이루는 곳으로서 차령산맥의 교차점이 되어 최고봉은 비로봉으로서 해발 1,563m이다.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비로봉, 만월봉, 장영봉, 기린봉, 상왕봉의 5대 산봉우리에서 시작되는 계곡 물은 오대천을 거쳐 한강의 원천이 된다고 한다.
월정사 (평차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는 강원도내 조계종 본상으로서 선덕여황14년(645년) 당나라에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오대산에서 문수현신의 깨우침을 받고, 7년만에 귀국한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6·25참화로 부타버린 것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적광전 앞에는 팔각 9층 석탑이 있는데, 이 탑은 선덕여왕 14년(645년)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사리 37과를 봉안하였다하며, 탑의 높이는 15.2m 국보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밑에는 특이한 형태의 석조보살 좌상이, 불사리 탑을 향하여 정중하게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의 탑에 대한 경건한 공양의 자세로 보인다. 높이는 1.8m 보물 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원사 (평창군 진부면)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세조 임금과의 얽힌 이야기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국내 최고의 범종이 종각에 달려 있으며, 이 상원사의 동종은 현존하는 신라 2개의 범종가운데 경주 국립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과 함께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보물 중에 보물로서, 에밀레종은 크고 웅장함에 최고라면 상원사 동종은 음향에 있어 최고라 할 수 있으며 서기 725년 만들어진 이 종은 국보 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직후,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네 이놈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을 하다가 더럽다하며 침을 손등에 뱉었는데,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 보니 손등이 가려웠다, 그때부터 온 몸에 종기가 나고, 고름이 나는 등 견디기 어려워 명의와 온갖 약을 다 써도 효험이 없자 왕은 오대산으로 향했다. 월정사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세조는 계곡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주위 시종들에게도 자신의 추산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평소에도 어의를 벗지 않았던 세조도 하도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아서 시종들을 멀리하고 혼자 그곳에서 목욕하는데, 그때 한 조그만 동승이 숲 사이를 노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세조는 동자승을 불러 자기 등을 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던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 마시오. 그러자 동자승도 임금께 어디를 가시거나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 발설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마치자,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세조의 몸은 씻은 듯 나아 버렸다.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주위의 화공에게 명하여 동자승을 그리게 하였는데,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몇 번의 교정을 거쳐 실제와 근사한 동자승을 완성하고, 그것을 상원사에 봉안토록 명하면서 자기가 겪은 일화가 유포되도록 하였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고 본당의 오른쪽에 모셔진 목각 상이 바로 문수동자 상이라고 합니다. 그후 사람들은 세조가 의관을 벗어 나무에 걸었다는 길목을 갓걸이 또는 관대걸이라 부른다 하며, 그 후 상원사에서 불치의 병을 고친 세조는, 그 이듬해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세조는 곧장 법당으로 올라 예배를 올리고자 할 때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세조의 옷소매를 물고는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이상히 여긴 세조 임금은 병사들을 시켜 법당의 안팎을 뒤지게 하였더니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자객이 숨어 있었다. 왕은 자객을 참하고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에게 밭을 하사하였는데 그 밭을 묘전이라하며 지금도 상원사 뜨락에는, 돌로 다듬은 고양이 상이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세조 임금은 다시 상원사에 들렀는데 마침 상원사에 공양 시간이 되었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마주 앉아 공양 채비를 하였다. 그대 말석에서 어린 동자승이 발우를 잡고 이거사 공양하시오 라고 하였다. 모여있던 스님들의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렀는데, 세조께서는 웃으시며 오히려 그 동자승에게 삼품 벼슬을 하사함과 동시에 친히 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세조는 자기 병을 고쳐준 문수보살을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세상에는 이린 아이들에게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띠로 허리를 졸라매게 하는 습성이 생겼다.
적멸보궁 이 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14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오대산 지로봉 중턱에 불전을 짓고 정골사리를 봉안하여, 우리 나라4대 보궁이 되었으며, 보궁이란 불골을 모시는 절간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불사리는 지금 어디에 안장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다만 보궁뒤 1m 높이의 석탑을 본뜬 마애불 탑이 있을 뿐이다.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 1. 상원사 적멸보궁 2. 영월 사자산 법흥사 3. 양산 통도사 4. 정선 정암사 5. 설악산 봉정암
대관령 대관령은 강릉의 관문이자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이며, 해발 832m의 정상에 서면 아홉 굽이 아래 강릉과 명주 군이 눈 아래 보이고 푸른 동해바다와 병풍처럼 늘어선 산봉우리들이 천하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1911년 대관령 도로공사를 하여, 경기도와 강원도를 횡단하는 길이 뚫렸으며,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많은 발전과 관광도로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 중종임금때 고형산이라는 사람이 처음 이 길을 만들어서 교통이 편리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인조임금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주문진에 상륙한 적이, 대관령 길을 이용하여 단시일에 한양을 함락하기에, 크게 노한 인조임금께서는 이 길을 만든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 분을 풀었다고 한다.
영동고속도로 준공탑 휴게소 동쪽으로 108계단을 오르면 높이 10m 무게 163톤의 우리 나라 최대의 기념탑이다.
대관령 스키장 대관령은 해발 832m의 험준한 고개이고 그 길이가 13㎞에 달한다. 이 고개에서 횡계리까지 해발 100m의 완만한 경사가 천연적인 스키장의 적지라 하겠다. 고냉 지대이고 설 질이 좋으며 적설량이 풍부하여 매년 전국 스키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용평스키장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일대 해발 1,480m의 발왕산 기슭 32만평에 평에 펼쳐진 용평스키장은, 국내 최초로 리프트와 인공 조절기를 구비하였으며 서울의 유국개발이 1970년부터 개발 1975년 11월 개장하였다.
홉프 농장 홉프는 맥주의 원료로서 맥주의 특유한 향과 쓴맛을 내는 향료이다. 연간 강우량이 700㎜에 평균기온이 20℃를 넘지 않아야 잘되기 때문에 , 이곳 강원도 지방에 평창군과 횡성군 등이 적지이며 수익성이 높아 농가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요즈음에는 지리산 지역에도 시험 재배를 하고 있다.
이승복기념관(평창군 진부면 로동리) 1968년 12월 울진 삼척 지구에 침입한, 북괴 무장공비의 잔당들이 아군에 쫓겨 가다가, 평창군 계방산 두메산골 외딴집 이승복군의 집을 습격 그들은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동조할 것을 강요했으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외치는 승복군의 입을 찢고 돌로 쳐죽였으며, 승복군의 어머니와 두 동생도 무참하게 죽인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강원도는 어린 반공열사 이승복군의 넋을 길이 빛내고 널리 펴서, 온 국민의 반공의식을, 멸공 통일의 정신으로 삼고자 승복 군이 다니던 속사 초등 학교 계방 분교장 앞에 반공관을 세우고 유품 및 많은 반공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반공관 뒤에 승복군의 묘소가 있으며 유일한 생존자인 형은 공무원에 봉직하고 있으며, 그때 승복군의 담임 선생님은 승진하여 지금도 교단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관령목장 대관령 기슭 해발 800m 고지대에 위치한 삼양식품에서 경영하고 있으며 19㏊의 대지에 1,00두의 젖소와 1,000여두의 비육우가 유유히 풀을 뜯고 있다.
감자바위 팔도 인물평에 강원도 사람을 바위 밑에 앉은 돌부처라고 평한다. 그만큼 과묵하고 조용하다. 옛날 인제 총각과 원주 처녀가 결혼을 하였는데 첫날밤에 주고받은 자기 고향 자랑에 우리 고향에는 감자가 얼마나 큰지, 바위만 하다고 자랑하였다 하여, 강원도 사람을 감자바위라고 부른다는 일설도 있다.
영월소재지 영월은 신라 때는 나성이라 불리다가 고려대 와서 영월이라 칭하였고, 강원도 남부에 위치하며, 임산물 광산물 등이 많이 나며 태백산(해발1,561m)이 인근에 있다.
법흥사 (영울군 수주면 법흥리) 해발 1,350m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절은 서기 643년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수학중,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진신 사리와 가사 등을 진수 받아,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그리고 이곳 법흥사에도 봉안하였으며 경내에는 우리 나라 유일한 패엽경이 보존되어 있으며, 보물 612호인 징효대사 탑비가 있다.
장릉 (영월군, 읍 영흥4리) 사적 196호인 장릉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으며 조선 6대 단종의 묘소이다. 1452년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1455년 그의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청 냉포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때 사약을 받고 승하하셨는데, 버려진 옥체를 충신 엄홍도가 현 장릉에 매장하여 노산 묘라 했다가 숙종 24년(1968년) 단종으로 복위하여 장릉이라 부르게 되었고 매년 청명일에 단종 제를 올리게 되면, 능 앞에 우물이 있는데,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비가와도 물이 불어나지 않는 우물이, 이상하게도 물이 불어 넘쳐 흐른다 고하니 애통하게 돌아가신 단종 임금의 눈물이 아닌가 합니다.
청령포 (영월군 북면 경천리) 영월읍 북면 경천리 울창한 수림과 삼면이 남한가에 둘러싸인 절경지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유배되어 1457년까지 갇혀있던 곳이며 이곳 소나무도 슬픈 사연을 아는 듯 굽어서 큰다고 하며 금표비가 있다 금표비는 단종의 행동범위를 표시하는데 동서 300척 남북 39척이다.
금강정 (영월읍 영흥2리)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시중들던 궁녀들이 강물에 투신 자결한 낙화암이며, 정자 옆에 이들을 추모하는 민충사가 있다.
자규루 (영월읍 소재) 조선 세종 10년(1438년) 군수 신원근이 창건한 매죽루이다. 청령포에 유배 중이던 단종이 남한강에 큰 홍수가 나서 임시로 읍내 관풍헌 객사로 연금 되었는데, 항상 이 누각에 올라와, 자기의 불우한 신세를 비유하였다 하여 후일 자규루라 개칭되었다. 자 규 시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면 시름에 겨워 루에 오른다. 네울음 슬프니 내듣기 괴롭다.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이세상 모든 사람들아 춘삼월 자규루에는 아예 오르지 마소.
수양대군의 숙청 단종은 조선 5대 문종의 세자로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6대 임금이 되었다. 당시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이 어린 단종을 잘 보좌하였으나,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단종을 항상 질시하고 정인지, 한명희 등과 밀의를 거듭 왕위를 빼앗고자, 먼저 충신 김종서를 그의 집에서 무사들로 하여금 죽이게 하고 이어서 영의정 황보인과,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에 보내어 죽이게 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사육신의 순결 단종은 기질이 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처음에는 세조가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고, 창덕궁에 살게 하였는데 이대 단종을 보필하던 성삼문, 박팽연등 충신들이 상왕의 복위 운동을 은밀히 전개하다. 반역자 김질의 밀고로 발각, 노발대발한 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를 체포하여 국문을 가하니 가혹한 고문은 형용하기 어려웠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고 세조의 불의에 항거하니, 그들에 대한 처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고, 이에 유성원도 자결을 하니 이들이 후세에 알려진 사육신이며, 이들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에 있으며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
고씨동굴 (천연기념물 제219호)(영월군 하동면 진별리)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 남한강변에 있으며 읍에서 약 12㎞ 지점, 약 4억 년전에 형성된 동굴로서 임진왜란때, 이 부근에 살던 고씨 일족이 피난하여 무사했다 하여 고씨 굴이라 부르며 동굴 속에는 형형색색의 모습들이 장엄하고 웅장하며 엽새우, 참조개 등이 서식하고 있고, 고수동굴을 아기자기한 여자와 비교한다면 이곳 고씨 굴은 길며 장엄하여 남성에 비교한다고 한다.
춘천 1910년 도청소재지가 되면서 춘천 읍이 되었고 1949년 시로 승격 소양댐과 의암댐 또한 춘천댐이 3면을 둘러싸고 흘러 호반의 도시를 이룬다. 군인도시이며, 춘천 막국수는 전국에 소문나 있다
춘천 공지천의 유래 옛날 이곳에 두 사람이 도를 닦고 있었는데 살생을 금하라는 계율을 어기고 이 강의 고기를 잡아먹었더니 갑자기 배가 아프고 몸이 뒤틀려 토하기 시작하는데 한 사람은 고기 한 마리가 산 체로 꼬리를 치며 나와 강으로 달아나고, 한 사람은 꽁지가 없는 고기가 죽어 나와서 산 고기를 토한 사람은 도를 통했는데 죽은 고기를 토한 사람은 도를 통하지 못했다는 전설로 꽁지천으로 불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며 공지천이 되었다고 한다.
소양댐 1967년 착공하여 1973년 10월 15일 준공했다 흙과 자갈 모래 등을 다져만든 사력댐에서 상류 인제까지는 60㎞. 최대 수심이 118m이고 최대 저수량은 29억 톤, 드럼에 넣으면 145억 드럼으로서 우리 나라 4,000만 인구가 하루 한 드럼씩을 마셔도 1년을 더 먹을 수가 있으며, 수력 발전으로 20만㎾의 전기를 발전하며, 농업용수 공업 용수 및 한가의 수위 조절 등 다목적 댐이며, 이 댐을 만들기 위해 3개군 6개면 37개 부락이 수몰되었으며 배를 타고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창한 산림이 우거진 양쪽 산의 그림자가 물위에 어리어 그 경치는 천하일품이다.
청평사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약 15분쯤 가면, 오봉산 기슭에 아홉 가지 소리가 난다는 구성폭포가 있고, 지방문화재 51호로 지정된 청평사는 서기 973년 고려 광종 24년에 영현선사가 창건, 서기 1089년 이자현이 중건하고 청평사라 불렀는데 6·25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보물 164호인 회전문과 공주탑, 부도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전설】 중국 산동성, 성주 딸 사비공주는 천하절색이었다 중국 천지에 유명 장수들이 다 사모하였는데 이웃 성주의 아들이 상사병에 걸려서 죽어 뱀이 되었다. 어느 날 공주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다 상사뱀에 온 몸을 칭칭 감겼다. 사비 공주의 몸을 감은 빔이 며칠 지나도 풀어주지 않자 조정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무왕은 눈물을 머금고, 불력으로 상사뱀을 퇴치하라고 하며 몸종과 같이 먼 해동국에 보내니, 공주는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가, 당도한 곳이 오봉산 청평사이다. 사찰 입구로 오다 구성폭포에서 목욕을 하니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며 뇌성 벽력과 함께 문이 빙빙 도니, 상사뱀은 스르르 몸을 풀고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날씨는 다시 맑아졌다. 그때 문이 빙빙 돌아 뱀이 죽었다고 회전문이라 이름지어졌다.
철원 강원도 서부에 위치해 잇는 철원 6·25당시 치열한 격전지이며, 평야를 끼고 있어 농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근래에 제2땅굴로도 잘 아려진 곳이며, 6·25당시 유명한 격전지 백마고지, 김일고지, 아이스크림고지 등이 철원평야 부근에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되새겨 본다.
제2땅굴 1975년 3월 19일 두 번째로 발견되었고 그 규모가 1땅굴의 2배 정도이며 중부전선 철원 북방 약 13㎞지점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땅굴은 분계선 약 1.1㎞를 넘어왔고 높이 2m 상단부2.1m 하단부2.2m의 둥근 아치형이며 이 정도라면 차량, 야포, 탱크 등은 물론 시간당 약 3만 명의 무장 병력을 침투시킬 수 있고, 우리측 출구는 세갈레로 갈라져 빠져 나갈 수 있어 정규전이나 비정규전에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다. |
첫댓글 글씨가 넘 작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