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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의 진노의 대접 재앙(계16:1-21)
시간적으로 이 16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매우 가까우며, 여기에 나오는 심판은 매우 신속하게 내려진다. 알포드는 ‘이 일련의 재앙들이 마지막 때에 닿아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 모든 재앙이 전부 같은 시간에 붙어 있다’고 말한다. 다니엘은 이 환란의 때를 세계 대전의 기간이라고 하였다(단11:36-45). 요한에 있어서는 이 세계적인 사건들이 클라이막스로 급히 향해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1.첫째 대접(계16:1-2)
요한은,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명령하시는 성전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분명 하늘 성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큰’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형용사 메갈레스는 16장에 자주 나온다. 같은 헬라어가 강렬한 열(9절)과 관련해서, 큰 강 유브라데(12절)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14절). 큰 지진(18절), 큰 성(19절), 큰 성 바벨론(19절), 큰 우박(21절), 큰 재앙(21절)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여기에 기록된 재앙들은 이전에 있었던 어떤 재앙보다도 더 크고 참혹하고 강렬한 것이다.
1)대상은 땅이었다.
(2)첫번째 대접 재앙의 내용은 독종이다.
악하고 독한 헌데란 회복할 수 없는 화농과 염증이 계속되는 쓰라림의 병이다. 그것은 불치의 악성 종기를 의미한다. 이 재앙은 출애굽 시에 애굽에 내린 여섯 번째의 재앙이다(출9:8-12).
3)이 재앙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임하였다(계13:15~18,14:9~11).
2.둘째 대접 재앙(계16:3)
‘바다’
둘째 나팔이 울린 후에(8:8-9) 바다 삼분의 일이 피가 되어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둘째 대접으로 인해서는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 물론 여기의 바다가 화학적으로 인간의 피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죄우간 바다는 피처럼 보였고 모든 생물을 죽이는데 동일한 효과를 가졌왔다. 둘째 나팔에서와 같이 이 피는 애굽에 내렸던 첫째 재앙과 유사하다(출7:20-25). 지구 표면의 상당수가 바다이기 때문에 이 재앙은 전세계적인 매우 참혹한 재앙이다.
3.세째 대접 재앙(계16:4-7).
‘강,물의 근원’
셋째 나팔이 ‘물들의 삼분의 일’쓰게 만들었듯이(8:11), 셋째 대접은 바다에 임한 둘째 대접의 심판을 강과 물 근원에 확대시켰고 그것들은 피가 되었다(16:4). 요한은 물을 맡은 천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우시다고 선포하는 소리를 들었다(5절). 하나님께서 물을 피가 되게 하신 것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데 대한 보상이었기 때문이다(6절). 또한 제단에서도 그 심판이 의롭다는 소리가 나서 이 천사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4.넷째 대접 재앙(계16:8~9)
‘악인들(사람)’
이 심판의 초점은 해의 크게 태움이다. 이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을 훼방하며 회개하지 아니하였다(11절). 넷째 나팔 재앙에서 해3/1이 어두어지는 사실이 있었다(계8:12). 이 경우는 태양의 열도가 식어졌다. 그러나 대접 재앙의 경우에는 태양의 열도가 더하여져서 사람을 태운다고 하였다. 그 태양이 갑작스러운 이변현상을 일으켜 사람들이 죽는다. 지금 태양계는 이상이 일어나고 그결과 지구는 해마다 이상 기온이 일어나고 있다.
5.다섯째 대접 재앙(계16:10-11).
‘짐승의 보좌’
이 심판은 짐승의 보좌에 대하여 행해졌다. 그결과 지상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사람들은 고통스런 종기로 괴로워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치 아니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번이 마지막이다(참고,2:21;9:21;16:9;16:21). 다섯째 대접의 심판은 어두움이 임했다는 점에서 다섯째 나팔과 유사하지만(9:1-11). 후자의 경우에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마귀의 추종자들에게 재앙이 임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6.여섯째 대접 재앙(계16:12-16).
‘아마겟돈 전쟁 준비’
우리는 요한계시록 9:13-21절의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 유브라데 강가에서 벌어진 큰 전쟁을 보았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만만의 마병대가 동원되고, 그결과 사람3/1이 죽게 되고 성도들은 수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보았다. 그러나 대접 재앙의 경우 강물이 마르고 군대는 동방에서 동원되고, 이 전쟁은 세 귀신의 영(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준비가 된다. 장소는 아마겟돈인데, 결국 싸움의 본질적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계19:11~21).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재림과 직결하고 있는 세계의 마지막 전쟁, 곧 끝날의 전쟁이 된다.
1)아마겟돈 전쟁은 유브라데의 마른 강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유브라데’강은 로마의 제일 동쪽 국경을 이름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고대의 대표적인 강들 중의 하나로, 이 강변에서 고대 제국의 왕들이 패권을 다투어 흥망성쇠 역사의 패턴을 죄우한 곳이다. 이 유브라데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선민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국경이기도 하였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이 강을 건너 하란으로 옮기고, 거기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겼다. 이곳은 에덴 동쪽 지역이기도 하다. 즉 인류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이 흘러 합류되는 곳이 지금 패르시아만을 이루고 있다. 지금 유브라데강은 이라크 지역을 흐르고 있다. 이 지역은 지금 세계의 석유 산지로 열강들의 경제적 격전 지역이 되고 있다. 이 유브라데 강물이 여섯 번째 천사가 쏟은 대접의 진노를 받아 말라 버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섭리적인 기적이다. 출애굽 사건 때 홍해가 말라 버린 사건이나(출14:21). 여호수아 군대가 마른 요단강을 건넜던 사건이 있다(수3:17). 선지자들은 모두 이 같은 사실의 역사성을 증거하고 있다(사11:16,렘51:36).
그러면 우리는 오늘의 유브라데강을 아마겟돈 전쟁의 시발 지점으로 볼 것인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중대한 사실은 당시 세계적인 격전지였던 유브라데강의 지명을 통하여 우주적인 세계 종말 전쟁을 상징적으로 예언함에 있다. 그렇다면 여자 적으로 아마겟돈 전쟁의 시발점이 유브라데강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유브라데를 어디로 볼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짐승의 보좌(적기독 운동의 중심지)인 것이다. 즉 말세에 이 세상 권력의 종주국들이 자기 세력을 집중시키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강이 말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함도 세계 주전국(종주국)들이 원방에서 대군을 이동시키는 과학적 운수 수단으로 볼 수있다. 그것은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바다를 육지같이 건넘에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유브라데 유역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을 전혀 무시할 수 없음도 사실이다. 그이유는 이 지역을 에덴동산 지역으로 볼 때 그곳은 실질적으로 사단의 공격이 제일 먼저 일어났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류의 첫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창3장).
이상하게도 이곳은 세계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고, 또한 세계 패권주의자들의 핏자국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지역은 세계 석유 생산의 중심지로서 사실상 세계열강들이 치열한 경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2)아마겟돈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가(계16:13-14)?
(1)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용의 입이라고 하였다(계16:13). 이용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큰 붉은 용이다. 그놈은 사단의 제1위격이다. 악령의 수장(머리)이다. 두 번째는 짐승의 입이라고 하였다. 이는 요한계시록 13장1-10절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곧 적기독 국가의 권력이다(정권). 세 번째 거짓 건지자의 입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11-18절에 나타난 거짓 종교이다. 저들은 양 같이 두뿔이 있고, 용 같이 말하며, 이적을 행하고 우상을 만들며, 666을 발행하던 어용 종교 기관이다. 저들은 아마겟돈 전쟁의 주범들이다. 에덴동산의 비극의 주범이 곧 이놈들이 아니었던 가?
(2)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라고 했나?
개구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재앙의 기구였다(출8:5-11;시78:45). 개구리는 더러운 동물로 간주 되었다(레위기11:10). 개구리는 물과 바다 속에 더러운 것들의 명단에 들어있다. 개구리를 더러운 영에 비유하였다. 개구리는 습지와 진흙의 더러운 곳에 산다. 작고 힘이 없으면서도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질러 자기 위치를 스스로 알리고 있는 동물이다. 개구리는 불코ㅔ하고 혐오감을 일으키는 동물이다. 이 개구리를 더러운 영에 비하였다. 더러운 영은 ‘귀신의 영’인데 곧 사귀의 영이다. 마귀의 다른 이름이다. 사귀의 영은 평화롭지 못하고, 떠들고 추악하며, 소란한 일을 일으키고 일삼는다. 이는 악독한 생각, 계획, 음모,더러운 수단과 방법등의 상징이다. 그래서 성경에 ‘개구리같은 더러운 영’ ‘귀신의 영’이라고 하였다.
(3)왜 세 더러운 영이 입에서 나오는가?
이것은 적그리스도 운동의 강한 설득력을 뜻함이다. 적그리스도 운동의 특색 중의 하나가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선전술이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다. 다러운 영이 입을 통하여 나왔다는 말은 ‘악한 권능을 내뿜는 권능’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귀신의 영의 입술에 의하여 자극되어 일어난다. 적그리스도 운동의 특색인 거짓말로 세계를 불 질러, 자멸의 길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3)더러운 영(귀신의 영)이 어떻게 전쟁을 유도하는가(계16:14)?
(1)이적을 유도한다고 하였다.
악령이 이적을 행하는 목적 중의 하나이다. 저들이 이적을 행함은 이세상 왕들(통치자)을 휴혹하여 전쟁을 일으켜 자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살후2:9-12).
(2)저들은 온 천하 임금들을 충동시킨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단(세 더러운 영)이 큰 음녀를 앞세워 땅의 임금들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여 버림에서 확실시 된다(계17:1-4). 마지막 날에 이세상 통치자들은 육체적인 연락과 향락에 도취가 되어 세계 정사를 그릇되게 판단해 버리게 된다.
(3)큰 날에 전쟁 준비를 위하여 모이게 한다.
계16:14에 ‘가서--모으더라’고 하였다. 이렇게 열국의 군주들은 결국 귀신의 종이 된다. 지금 세계의 패권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자유 민주 진영이고, 러시아을 위시한 공산 진영이고, 중동이 주축이 되는 이른바 제3세계 동맹국들의 진영이다.
1.세 영은 아마겟돈을 최후 전쟁 지역으로 삼았다(계16:16).
1)아마겟돈 전쟁의 규모와 성격은 어떠한가(계16:14,16)?.
그것은 세계적인 전쟁이고, 또 종말적인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온 천하 임금들이 다 모여 벌리는 전쟁이다.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나타내는 전쟁이다. 이 전쟁의 양상은 요한계록17:12-14절에와 요한계시록19:11-12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 전쟁의 기간은 짧은 것이다(계17:21).
2)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성도의 각성(계16:15).
(1)주님의 재림에 대한 각성이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계16:15).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은 주님의 재림과 직결하고 있다는 뜻이다.
(2)기도에 대한 각성이다.
우리 본문은 ‘깨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레고류오로 곧 ‘깨어 있다’, ‘정신을 차리다’,‘주의하다’,‘살아 있다’,‘불침번하고 있다’라는 말에서 나온 비상한 군사적 술어이다(벧전4:7;마26:41).
(3)신앙에 대한 각성이다.
우리 본문은 또 말하기를 ‘옷을 지겨’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의 속죄 은총을 신앙으로 받은 의인의 상태를 말함이다. 이옷은 어린 양의 피에 씻어 깨끗하게 된 옷이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신앙의 수절을 뜻함이다.
(4)수절에 대한 각성이다.
우리 본문은 또 말하기를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였다. ‘옷’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낸다. 그옷은 입고 다니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함’은 곧 믿는 신앙을 행위로 나타냄을 뜻함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되는 것이다(계19:8).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였다(계14:4).
(5)축복에 대한 각성이다.
우리 본문에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성도는 축복의 사람이다. 이런 자는 아마겟돈 전쟁 중에 백마를 타시고 홀연히 임하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
7.일곱째 대접 재앙(계16:17~21)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다. 그리고 요한은 되었다고 하는 큰 음성이 성전 보좌로부터 나는 것을 들었다. 이와 비슷한 선언이 일곱째 나팔 뒤에도 있었다(11:15-19). 또한 요한은 번개를 보았고 뇌성을 들었으며 이어서 큰 지진이 있음을 보았다(16:18). 요한이 이 지진이 이제까지 있었던 것 중 가장 큰 지진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스라엘이 제외되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큰 성이 세갈래로 갈라졌는데 이는 바벨론의 멸망을 가리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만국의 성들이 무너진 것이다. 이 거대한 지진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들(이방)의 도시들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무대가 되었다. 분명 전세계 도시들의 이런 파괴는 가공할 인명의 피해와 남은 세계 제국의 파괴를 동반하였을 것이다.
11:8에서는 예루살렘을 ‘큰 성, 곧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의 ‘큰 성’은 특별히 바벨론이라고 일컬어진다(16:19).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주셨고 이는 바벨론에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부어질 것을 예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이 그영적인 상태 때문에 바벨론이라고 불리워지지만 , 로마라고 추측한다. 이 바벨론은 유브라데강가에 세워져서 마지막 세계 정부의 수도가 될 재건된 바벨론으로 보는 편이 낫겠다.
이 무서운 지진에 이어, 혹은 아마도 그것의 결과로 각섬이 없어 지고 산악도 간 데 없어진 것을 요한은 기록한다. 이 구절들(18-20절)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하여 거룩한 땅에 일어날 대변동을 포함하고 있는 지형적인 대이변을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6:21 지진과 더불어 한 탈란트(100근)나 되는 큰 우박이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초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이런 거대한 얼음 덩어리는 지진에서 남아있는 것들을 파괴시키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힐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가혹한 심판과 대격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한가 하는 것이 마지막 문장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때로 어찌해서 영원한 형벌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었다. 그대답은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의 완고함을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 자신들이 영벌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일곱째 대접으로 인한 마지막 파괴와 함께 극적이며 절정에 달한 그리스도의 재림(19장)의 무대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 재림에 앞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미래사가 17-18장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1.바벨론의 멸망(17-18장)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은 내용적으로 동질인 바벨론이다. 그런데 17장은 음녀로 표시되고, 18장은 바벨론으로 표현되었다.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는 바벨론의 영적,도덕적,정신적인 타락성,곧 바벨론의 내부적인 멸망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8장은 정치적인 바벨론의 외부적인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666을 받은 자들이 백마 탄 자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고(계19:19-21), 20장에서 모든 원수의 괴수인 용(사단,옛 뱀,마귀)이 채포되어 완전히 멸망한다(계20:8~10).
일반적으로 17장에 나타난 바벨론은 그리스도 재림 전 첫 삼년 반에 나타날 세계 종교로서 그 성격이 꼭 들어맞는 것을 알 수 있다. 17장은 10명의 왕에 의하여 그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을 또한 기록한다(16절).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18장에서는 바베론을 정치적인 새력으로, 즉 그리스도 재림 전의 후 삼년 반을 통치할 대세계 재국의 권력의 왕좌로서의 큰 도시 바벨론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밸론은 성경에 약 300번 그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 그것은 때로 하나님의 참 예배에 반대하는 사탄적인 종교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로 수도로서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대도시의 정치적 세력으로 나타난다.
1.큰 음녀의 심판(17:1-18)
사도 요한의 초청이다(계17:1).
그 천사는 이미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한 바 있었다(계16:19).
1)요한이 본 음년의 정체(계17:1~6).
(1)이름이 무엇인가?
‘큰 음녀’라고 하였다. 구약에서는 두로나 니느웨를 음녀에 비하였다(사23:15-16). 또 ‘여자’라고 하였다.
무엇을 의미함인가?
바벨론의 다른 이름이다(계17:5).
‘비밀’(살후2:7)은 불법의 비밀이다. 적그리스도가 음녀로 가장하고 나타났다.
(3)왜 큰 음녀라고 하였던가?
이는 신부 새예루살렘에 대조해서 쓰이는 말이다. 그가 ‘큰 음녀’라고 불리운 것은, 세상을 유혹하고, 시험하며,미혹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이끌어 내는 데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4)음녀의 현주소는 어디인가(계17:1)?
‘물’은 세계 열국을 상징함이다. 요한계시록 17장9절에는 이 많은 물을 가리켜 ‘일곱산’이라고 하였다. 그녀가 미치는 세계적인 지배력, 영향력을 암시한다.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유형의 음녀들은 그 영향력이 세계적이었다.
(5)음녀의 모양은?
A.붉은 빛 짐승을 탔다고 하였다(계17:3).
이 붉은 짐승은 바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데 세계적인 패권을 가진 무신론 권력의 정체이다. 그 놈은 바로 요한계시록 12장3절에 나타난 붉은 용의 화신이다. ‘그 짐승의 몸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17:3)고 하였다. 이는 반신적인 그짐승의 정권의 성격과 그가 지배하는 위성국들을 뜻함이다. 세계의 패권을 잡고 뒤흔드는 저 짐승의 등에 앉아 있다.
몸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쓰여 있는 짐승!
일곱 머리와 열뿔 곧 수많은 위성국들을 거느리고 있는 짐승!
그는 분명히 세계의 끝날에 등장하고 있는 저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적이요 ,유물론적인 공산주의이다. 이 붉은 색은 본래 용의 색깔이었다(계12장). 세계의 모든 유물론적 공산주의 국가들은 붉은 색이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도전하는 살인마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색이다. 그래서 공산당들은 빨갱이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사랑을 도전하기 위함이다.
B.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었다고 하였다(계17:4).
이것은 아주 매혹적이고 마력적이며 사치스러운 외관을 나타내는 말이다. 붉은 색은 사치와 정욕의 상징이다. 지옥에 간 부자는 세상에서 이러한 옷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였다(눅16:19).
C.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고 하였다(계17:4).
이것은 육체를 중심하고 일어나는 탐미주의를 의미함이다. 물질문명에서 오는 극에 달한 호와와 사치의 장식품들이다. 이러한 탐미주의는 육체적 쾌락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쾌락은 먹으나 배 부르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자’라고 하였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기에 좋은 마취제이다.
D.가증한 금잔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하였다(계17:4 하반절).
빛나는 금잔에 비하여 그속에 들어 있는 것은 가증한 물건이고, 음행의 더러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것들은 예외 없이 배신과 불신과 불경건의 도구들이다. 온갖 세속적 제도, 시설,문화기구,행위 등을 총칭한다. 그것은 인본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이고, 우상 숭배 사상이 배경이 되고 있다.
1.큰 음년의 활동은?
(1)이 세상의 인류를 유혹한다(계17:2).
말하자면 이 세상 위정자들과 백성들을 영적, 육체적 음행에 도취해 버리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단이 쓰는 유용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즉 이세상 물질문명의 향락에 모든 사람을 빠지게 해 버렸다. 역사적교훈 노아시대가 그러했다.
(2)성도와 예수 증인의 피에 취한 여자이다(계17:6).
곧 기독신자를 죽이는 일을 한다.
‘성도와 예수의 증인’은 결국 같은 말이다. 저들은 예수의 계명과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 사람들이다(계6:9~11,11:1~8). 이는 바로 이세상 물질문명의 도구가 된 온갖 바벨론적 성격들이 연합하여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을 죽이는 음녀의 잔인성을 의미한다.
1.큰 음녀를 태운 짐승의 비밀(계17:7~14).
사도요한은 큰 음녀의 정체를 정확하게 보았다. 곧 그이름과 그이름의 의미, 그 음녀의 현주소, 음녀의 모양, 음녀의 활동, 곧 성도 살육과 유혹 앞에서 놀라 버렸다고 하였다(계17:6). 이제 우리는 그 음년를 태운 짐승의 정체를 보게 된다.
(1)역사상에 재상하는 적기독 국가(권력)이다(계17:8).
전에(과거)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듯하다. 다시 나타날 정체라고 하였다. 이것은 역사상에 재상하는 적기독 국가를 말한다. 똑같은 모양의 짐승이 아니라, 같은 본질의 다른 짐승을 말한다.
(2)이 짐승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묘사된다.
요한계시록 17:9-10에 ‘일곱 머리, 일곱산, 일곱 왕’은 똑같은 적기독의 정체를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다. 똑같이 짐승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들이다. 적기독의 세계적인 7대 패권을 의미하고 있다.
(3)지혜 있는 뜻은 이 일곱 머리(일곱산,일곱 왕)의 내막을 아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 너린 다섯 머리는 역사상 나타났던 애굽, 앗수르,바벨론,메대,파사,헬라제국이요, 하나 있는 것은 요한 당시 현존하던 로마 제국이다. 그리고 하나는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므로 마지막 짐승이 남아 있음을 요한은 들었다. 이 짐승(일곱 머리)들은 언제나 열 뿔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열뿔들은 열왕들인데 패권 국가들의 위성국가들, 동맹하는 나라들을 의미한다. 저들은 짐승에게 권세를 받아 임금 노롯을 하게 된다(계17:7,12).
(4)아직 이르지 아니한 짐승(산,머리,왕)은 무엇인가?
이 짐승의 출처가 무저갱이라고 하였다(11:7). 그렇다면 이 짐승은 사단의 사자임이 확실하다. 이 짐승이 출현할 때 온 세상이 놀라고 놀랄 것이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17장8절에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더라’고 하였다. 바로 이 짐승이 요한계시록13:1-10에 나오는 바다가 낳은 짐승이다. 이 짐승의 출현할 때 온 세상이 놀라고 그를 다시 좇는다고 하였다. 이유는 이놈이 칼에 상하여 죽게 될 뻔하였다가 그 죽게 된 상처가 다시 낫게 되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붉은 용이(계12장) 그죽어가는 짐승에게 재생할 힘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이다(계13:3-4). 다시 말해서 적기독의 수장이 역전승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마지막 때 나타날 일곱 번째 짐승은 일시 패전한 듯하다가 다시 재흥하는 세력이다. 이것이 , 이짐승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추종하게 하는 매력이다.
바로 이 짐승이 일곱째 짐승(산, 왕,머리)이다.
일곱째 짐승 곧 일곱째 왕을 여덟째 왕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계17:11).
저놈이 칼에 상하여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온 세상은 저놈이 없어진 줄로 여겼다. 그러다가 다시 재상하는 바람에 세상은 놀랐고 ,여덟째 왕이 등장한 것으로알았으나, 실상은 일곱째 짐승의 재생이라고 하였다.
(5)일곱째 짐승의 활동 기간은 일시적이나 그 지배력은 전 세계적이라고 하였다
계17:10절 중에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고 하였다.계17:12에‘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이 짐승의 패권 행세는 대단하다. 이 짐승은 열 뿔(열왕)을 가느린다. 그열 뿔들은 짐승처럼 위세 당당하게 권세를 행사한다고 하였다. 또 저들은 이 짐승을 중심하고 일심으로 동맹 체제를 갖춘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17:13에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고 하였다. 이렇게 적기독의 맹주들은 일심단합하여 그 짐승앞에 하나가 되고 충성을 한다.
(6)그 짐승과 그맹주들은 결국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게 된다(계17:14).
(7)짐승 운동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계17:8,11).
(8)어떻게 최종적으로 적그리스도가 멸망하는 가?
어린양과 더불어 전쟁하여 참패함으로 멸망한다.
(9)이 짐승의 종말론적 정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요한계록 13장에서 생각하였다. 역사상 나타난 최종 적그리스도, 곧 일곱째 머리(산,왕)는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국시로 하고 무신, 반신,살신을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와 공산국가들이다. 무신론적이요, 유물론적인 공산주의와 공산당(국가)은 세계 패권주의를 모토로 삼고, 그 동맹국들을 거느리면서 뻗어가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다. 이 무서운 짐승(공산주의와 공산국가)의 사촉을 받은 거짓 선지자가 있다. 그것은 양같이 두뿔이 있으나 용과 같이 말하는 어용 종교 단체이다. 이 어용 종교 단체는 명실 공히 일치 운동, 하나 운동을 표방하고 기독교의 유일성을 파괴하면서 권력과 타협한다.
3)음년의 멸망(계17:15-18)
우리는 이 본문에서 깜짝 놀랄 장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잔을 들고, 세계의 왕들과 백성들을 미혹하도록 그녀를 태우고 다니던 붉은 빛을 가진 짐승이 , 자기 등에 태웠던 그 음녀를 죽여 버리는 사실이다.
(1)어떻게 망하는가?
열 뿔과 짐승에게 미움을 받아 망하게 된다(계17:16).
여기 ‘미워하다’는 말은 중요하다. 이는 ‘싫어하다’라는 말인데 저희끼리 미워하고 싫어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는 대로 적그리스도적인 나라들은 호전주의자들이다. 저들은 마침내 세계를 아마겟돈 전쟁에까지 확대시킨다. 그런데 음녀를 사랑하여 자기 등에 업고 다니기까지 하던 것을 짐승과 열국이 미워하게 된다. 이것은 꼭 오늘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동료나 위성 국가들을 이용한 후에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가차 없이 처단해 버리는 경우와 같다. 이것은 사단(붉은 짐승)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1.정치적 바벨론의 멸망(18장)
바벨론의 멸앙에 대한 또 하나의 계시가 하늘에서 내려 온 다른 천사에 의하여 선포되었다.그 천사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이다.
1)바벨론의 죄악(계18:2~8)
(1)악령의 센터였다
요한계시록 18:2에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2)음행이었다(계18:3).
(3)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이었다(계18:3).
(4)상고들의 사치와 부정축재였다(계18:3).
여기 ‘땅의 상고들’이란 땅의 장사꾼들을 뜻함이다. 땅을 자기의 영주지로 삼고 움직이던 체질적인 장사꾼들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경제 동물들이다.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라고 하였다. 이것도 그여자의 사치라고 할 수 있다. 상고들의 사치가 무엇인가? 황금 만능주의 사상이나. 그로 인해 오는 교만, 육체적 호색주의를 의미한다. 그러한 것을 자기 삶의 힘(세력)으로 여겼다. 돈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황금 무적의 사상이다. ‘치부하였다도;라고 하였다. 풍부함이 극에 달한 상태이다.
(5)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죄이다(계18:7).
이는 절대 인본주의 삶의 신봉자를 이름이다. 언제든지 인본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다. 그것은 항상 이기주의와 동맹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왕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상이다. 바울은 이미 세상 끝날에 이러한 개인주의의 극대화가 온 세상 사람들의 삶의 철학이 되어 버릴 것을 예언하였다(딤후3:1-3).
(6)교만의 죄악이다(계18:7)
이 바벨론이란 음녀는 무수한 간부였다. 땅의 임금들과 상고들과 장군들이 자기 남편들이었다. 그는 극도의 안전과 평화와 행복으로 자만하였다. 그에겐 결코 불행이나 비극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저들은 참으로 낙천주의자들었다. 낙천적 우주관, 낙천적 인생관, 낙천적 미래관으로 삶을 즐겼다.
(7)교회 박멸 운동의 죄였다(계18:24).
저들은 이 세상 바벨론에서 인권이 유린당하였다. 자유가 박탈을 당하였다. 가산이 탕진을 당하였다. 육신의 생명까지 빼앗김을 당하였다. 저들은 예수 때문에 이 세상 바벨론 성길에서 피를 쏟았다.
1.바벨론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1)바벨론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하였다(계18:5).
이는 바벨론의 죄악이 최절정에 달하고 만 사실을 이름이다.
(2)하나님이 바벨론의 불의를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하였다(계18:5).
(3)바벨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복수를 선언하였다(계18:6).
여기 ‘갑절’이란 말은 저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보응을 의미한다. 바벨론 범죄보다 배나 더한 보응을 의미한다.
(4)복수하는 재앙의 내용은 고난과 애통과 흉년과 사망과 불이라고 하였다(계18:8).
이러한 심판들은 모두 육체주의로 살던 사람들에게 육체적 고통의 극심함을 더하는 것이다.
(5)바벨론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계18:8)?.
1.바벨론의 애가(계18:9~20)
바벨론 제국에 종말이 온다고 하는 것은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는 명백한 진리이다. 이 부분에서는 왕들과 상인들, 선장과 선객들의 운명적인 종말의 애가를 들을 수 있다.
A.첫 번째 유는 왕들이다(권력의 종말)
계18:9에 ‘땅의 왕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권세자들이다. 또한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던 자들이다. 여기 ‘왕들’이란 세상에서 어떤 세습적인 왕위를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왕뿐 아니라, 사실상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고, 이 세상의 권세와 명예와 부귀를 자기 삶의 최종 목적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대적하는 자들을 총칭한다.
(1)하나님의 원수된 생활을 하던 자들이다(계18:3).
저들은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하였다. 저들은 도덕적 타락은 물론이고, 영적으로도 우상 숭배의 주역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노롯을 하던 자들이다.
(2)사치하던 자들이었다(계18:9).
(3)저들의 애가는 절망적인 비통이었다(계18:9~10).
왜 저처럼 탄식하고 애통하였을까? 바벨론을 향한 저들의 애착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이 받을 벌 때문이다.
B,둘째 유는 상인들의 애가이다(계18:11-17, 부의 종말).
상인들은 상품을 사고파는 자들로서, 이것은 부의 종말을 의미한다. 저들은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자들로, 물질의 주인을 알지 못하고 자기 것처럼 오인하고 남용하던 자들이다. 선하게 사용할 줄도 몰랐다. 오히려 하나님의 물질을 가지고 바벨론의 죄악을 조성하는데 악용한 자들이다. 말하자면 배금주의 삶의 철학을 지향하던 자들이었다. 이제 저들은 불꽃 속에 휩싸여 버린 바벨론의 종말 앞에서 그 부와 함께 망해야 되는 운명적인 한 날을 맞이하는 절망을 씹어야만 하였다. 성경은 이 상인들이 거래하던 여러 상품들을 열거하고 있다.
(1)각종 보석류들이 있다(계18:12).
금이 있다. 은이 있다. 보석이 있다. 진주가 있다. 이것들은 요한계시록17장에 나왔던 ‘큰 음녀’가 자기 몸을 꾸민 사치품들이었다. 이러한 보석류는 실로 이 세상에서 저들의 전부였다.
(2)각종 의류들이 있다(계18:12).
세마포가 있다. 자주 옷감이나, 비단과 붉은 옷감이 있다. 이것들은 저들이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사용했던 필 수품들이거나, 육체를 꾸미는 데 사용했던 극치의 의상품들이었다(눅16:19). 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주의 영광으로 자기를 단장할 줄 몰랐다.
(3)건축 자재들이 있다(계18:12).
각종 항목, 각종 상아 기명, 값진 나무, 진유, 철,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 등이 있다. 이는 모두 화려한 건축 자재들로서 저들은 이것들로 이 세상에서 천국의 궁실을 대치하였다. 저들은 이것들로 자기를 위하여 자기 집을 꾸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사용할 줄 몰랐다.
(4)각종 향품류가 있다(계18:13).
계피, 향료,향,향유,유향등이 있다. 저들은 이러한 향유들로 육체의 썩은 악취를 가리웠다. 그리고 방탕과 사치의 자극제로 사용하였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로 자기를 단장할 줄 몰랐다.
(5)각종 식료품들이 있다(계18:13).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등이 있다. 이것들을 저들의 빵을 위해 사용하였다. 저들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믿지 않았다.
(6)각종 운송 수단들이 있다(계18:13).
소와 양이 있다. 그리고 수레가 있다. 이것들은 일부 식료품들인 동시에, 또한 저들의 운송수단들이었다.
(7)사람들의 영혼이 있다(계18:13).
지금까지 우리는 28종목을 읽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도 많은 바벨론의 상인들이 사람의 인권이나 생명을 상품처럼 물질화 하였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인권을 착취함을 이름이다. ‘사람의 영혼들’이란 말은 사람의 가치를 오직 물질적인 것으로 측정하고, 영혼을 무시하는 소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C.셋째 유는 선장과 선객들의 애가이다(계18:17-19)
이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위에서 말한 상인들의 상품을 운반하고 있는 자들이다. 저들은 저들이 실은 배의 상품들의 하역 장소였던 바벨론이 불타고 있는 연기를 보았다(계18:18). 큰 성 바벨론의 종말 앞에서 탄식하면서 머리에 티끌을 뿌리고, 울고 애통하였다. 큰 성 바벨론의 그화려한 부가 일식간에 망하였다는 사실앞에, 저들은 절망적인 비통을 말하였다.
1.다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바벨론(계18:21~23.탕자 문명의 종말).
이 본문 중에 ‘다시는 --아니하고’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참으로 유의해야 될 말이다. 이것은 인본주의 문명, 곧 탕자 문명의 종말을 보여 주고 있다.
(1)다시 보이지 어니하는 바벨론(계18:21).
‘큰 맷돌 같은 돌’은 ‘큰 연자 맷돌 같은 돌’을 의미한다. 그것이 완전히 바다에 던져져 버린 바벨론이다.
(2)다시들리지 않은 음악 소리이다(계18:22).
여기 ‘거문고 타는 자’란 거문고의 전문가를 뜻한다. ‘풍류하는 자’도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자를 뜻한다. 피리(퉁소)나 나팔 부는 자도 역시 전문가를 뜻한다. 이러한 음악의 소리는 이제 다시 영원히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본주의 예술문화의 종말을 뜻한다. 이러한 음악들도 금,석,목,동,철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며 자기들의 육체의 향락을 위하여 악용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문명이나 문화는 음악 문명이고 문화인지 모른다. 음악 없는 인간 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불행스럽게 탕자 문명이었다. 이제 탕자 문명의 만세 소리는 끝이 나고 만다. 그이유는 새 하늘 새땅에서 ,새노래가 불려질 차례이기 때문이다.
(3)다시는 보이지 않은 세공업자들이다(계18:22).
이것은 ‘모든 기술을 가진 기능공들’을 총칭한다. 이는 과학 기계 문명의 종말이다. 저들은 각종 금속이나 목재들로 바벨론 문화의 제품들을 만들었던 공인들이었다. 이 과학 문명은 바벨론 문화를 꽃피우는데 큰 공헌을 남겼다. 저들은 바벨론에서 드높은 만세를 불렀다. 그럼에도 인간이 조작한 과학 문명은 결국 살인의 기구로 전략되었다. 또한 저들이 만든 살인의 도구가 하나님이 사용하실 심판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4)다시는 들리지 않은 맷돌 소리이다(계18:22).
이는 모든 생산 공장의 종말을 뜻한다. 특별히 음식 유의 물질 산업을 뜻한다. 저들은 항상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였다. 저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몰랐다. 이제 이 소비적인 썩는 양식의 생산 작업 소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이유는 생명수, 생명과의 복스러운 낙원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5)결코 등불의 빛이 비취지 아니할 것이다(계18:23)
‘빛’은 인간 기계 문명이 발견한 최대 최고의 산물 중에 하나이다. 바벨론 문화는 이 빛을 자랑하고, 이 빛 속에 살면서 영원한 빛, 참 빛, 생명의 빛에 도전하였다. 물론 인간이 만든 과학이라 물질문명의 빛은 밤의 등불같이 희미하고 또 약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꺼져 버리고 그기능이 마비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햇빛도 달빛도 별빛도 쓸데없는 예수님 자신의 영광으로 충만한 빛의 왕도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6)다시는 들을 수 없는 신랑 신부의 음성이다(계18:23).
이제 인간 육체주의, 향락주의, 쾌락주의의 종말을 보게 된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육체적, 성적 낭만을 인간 행복의 전부로 여기던 이 인간 육체주의가 끝을 보게 된다. 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이유로 ,주님의 잔치 집에 오기를 얼마나 꺼려하고 거절하며 도전했던가?
그러나 이제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는 시대가 온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세계이다. 그것은 영원한 부활의 세계이다. 거기는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는 세계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육체주의 삶보다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만족하다.
(7)이제 이 바벨론이 재흥할 수 없는 그 이유를 다시 밝히고 있다(계18:23).
분명히 이 세상 바벨론의 인본주의적 예술문화, 과학주의, 생산공장,등불문화,육체주의는 결코 재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저들은 배금주의자들이었고, 배교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그이유를 밝히고 있다. 저들은 모두 복술의 미혹에 빠져 사단 앞에 주구 노롯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최후의 복음(계18:4,20~24).
무너지고 사라지는 바벨론의 운명적인 종말 가운데서도 복음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불타 버리는 바벨론의 종말 앞에서도 복음의 소리는 불타지 않고 있다. 이젠 영원히 듣거나 볼 수 없는 바벨론 문화의 종말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거자 없어지지 아니하는 복음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A.첫 번째 소리는 복음적 구원의 호출이다(계18:4).
누가 이 복음적 구원의 호출을 받았는가?
그는 하나님의 택자들이다. ‘내 백성아!’라고 하였다. 이는 ‘나의 그 백성아’하는 소리이다. 지정받은 바로 그 백성이니 ,선택받은 선민이다. 저들은 성부의 창조,성자의 구속,성령의 구원 역사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다(사43:1).
B.두 번째 소리는 즐거워하라는 것이다(계18:20).
이는 천상 교회 성도들과 지상 교회 성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C.세 번째 소리는 핏소리이다(계18:24)
이는 신구약 전 시대 어간에 흘린 순교자들의 피를 뜻한다.
1.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계19장)
요한계시록4-18장은 주로 대환란기에 있을 일들을 다루었다. 이제 19장의 시작부터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대환란이 종말을 고하고 있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모아진다. 성도들과 천사들에게는 기쁨과 승리의 시간이 온 것이다.
1.첫 번째 할렐루야는 천사들의 송영이다(계19:1-2)
19장의 초두에 시간에 진전을 나타내는 단어 ‘이 일후에’가 쓰였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이 일후에’이며 18장의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 같은 것을 들었다. 그 찬송은 분명 바벨론의 심판을 기뻐하여 드려진 것이다.
그할렐루야의 주제는?
1)하나님의 구원이다.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라고 하였다.
2)하나님의 영광이다.
‘영광이 하나님께 있도다’ 물론 ‘그 영광’이다.하나님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유의 영광이다.
3)하나님의 영광이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도다’역시 ‘그 능력’으로 하나님께만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통치의 능력이다. 구원의 능력이다. 심판의 능력이다.
4)참되고 의로운 심판이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고 하였다.
5)순교의 피를 신원하심에 있다.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라고 하였다. 여기 ‘그의 손’은 음녀의 손이다. 음녀를 통하여 바벨론을 넘어지게 하심이다. 그것은 순교한 종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2.두 번째 할렐루야는 24장로와 네 생물의 송영이다(계19:3-5)
저들은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영물들의 송영에 화답하였다. 계19:3에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하였다. 여기에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라고 함은 악인 심판의 영원한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의 헬렐루야와 아멘은 택자 구원과 악인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 역사에 대한 송영이다.
3.세 번째 할렐루야는 누구의 것인가?
이것은 하늘 보좌에서 들려 온 찬송(할렐루야)운동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났다.
1)14만4천 인, 곧 성도들의 할렐루야이다. 요한계시록 19:6에 나오는 허다한 무리, 많은 물 소리, 큰 뇌성과도 같은 소리는 모두 구원 받은 신자의 총수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이다.
2)성도들(14만 4천 인)의 할렐루야의 이유가 무엇인가?
(1)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통치이다.
계19:6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하였다. 성도들의 할렐루야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들의 왕(통치)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제 저들은 새 임금의 통치를 받게 된다. 저들은 세상의 폭군들에게 너무 시달림을 받았다.
(2)둘 째 이유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 기약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계19:7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고 하였다. 그 결혼 잔치 때가 왔다는 말이다. 성경은 예수와 우리를 혼인 관계로 나타냈다. 구약에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그의 아내로 비유했고, 신약에는 예수를 신랑, 성도를 그의 신부로 비유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신자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자라고 하였다(고후11:2).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하였다(엡5:22-27). 또 예수님을 신랑으로, 신자를 정혼한 그의 처녀로 비유하였다(마25:1~13).
(3)셋째 이유는 세마포 옷들이 입혀졌기 때문이다.
계19:8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복이었다(계15:6). 하늘 군대들이 입었다(계19:14). 천상 교회 장군들의 의복이었다(계4:4). 이것은 인맞은 자들, 곧 14만 4천 인의 필수 의복이었다(계7:9). 순교자들에겐 흰 두루마기가 입혀졌다. 이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 세마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구원의 은총을 이름이다. 곧 수절한 믿음, 정절 있는 믿음을 뜻함이다(계14:4). 또한 그 믿음에서 나온 밝은 윤리적 생활도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사는 생활이다(롬13:14).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할렐루야로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것이다.
(4)넷째 이유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복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계19:9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1.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명령(계19:10).
하늘에서 보았던 네 차례의 할렐루야와 혼인잔치에 오라는 장면이 너무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요한은 이전에도 그랬었던 것처럼(1:17). 땅에 엎드려 천사에게 경배하였다. 그때에는 그리스도를 경배한 것으로서 이는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천사가 꾸짖으며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자기에게 하지 말라고 한다.이는 요한과 마찬가지의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기 때문이다. 또 그 천사는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고 덧붙였다. 즉 예언의 본질, 혹은 예언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현세대에서의 성령으 l 독특한 열할 중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 신자들에게 ‘장래 일’을 알리시는 것이다(요16:13).
요한계시록 19장의 첫 열 절에 나오는 장엄한 장면은 이제 곧 일어나려고 하는 일, 즉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가 되는(1:1) 예수의 재림을 소개하는데 적합한 계시이다.
“천사숭배 사상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당시 유대교와 헬라적 세계관에서 크게 유행하던 천사 숭배 사상에 대한 반발 및 경고로 본문 9,10절에서 참된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한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교의 일부에서는 천사를 매우 중요시했을 뿐만 아니라 경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외경인 토비트서 13:12-15에 나와 있다. 단의 언약서 6:2에서는 천사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어떤 랍비들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해서는 안 되며 천사 미가엘이나 가브리엘에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A.D. 4세기경의 랍비인 예후다는 천사들이 아람어를 모른다고 아람어로 기도하는 것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사람이 접근하기엔 너무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결과 천사의 탁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천사 숭배 사상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함께 가지고 들어와 초기 기독교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헬라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에 따라 천사 숭배 사상이 기독교 내에 더욱 평창하게 되었다. 즉 헬라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도 제우스,헤라,아폴로,아프로디테 등의 여러 신들을 천사로 생각하며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천사라는 중간자를 통해 인간에게 역사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헬랑의 세계관은 유대의 천사 숭배적 세계관과 만남으로 더욱 천사 숭배 사상을 강화시켰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천사들도 하나님의 종이며 피조물이므로 경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할 것을 천사의 입을 통해 주장하였다.
1.그리스도의 재림(계19:11-21)
요한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뒤에 따르는 사건들을 예언적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교리이다(시2:1-9;24:7-10;96:10-13;110; 사9:6-7; 렘23:1-8; 겔37:15-28; 단2:44-45;7:13-14; 호3:4-5; 암9:11-15; 미4:7; 슥2:10-12; 12; 마19:28;24:27-31;25:6,31-46; 막13:24-27; 눅12:35-40; 17:24-37; 18:8;21:25-28 ;행1:10-11;15:16-18; 롬11:25-27 ;살후2:8; 벧후3:3-4; 유14:15; 계1:7-8;2:25-28;16:15;22:20). 재림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사건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거의 일치한다. 이는 전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난 정통 신조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문자적으로 역사속에서 성취되었듯이 미래에 있을 재림도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보수적인 해석자들 사이에서도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이나 고린도전서15:51-58의 주요 성구에 계시되어 있는 교회의 휴거가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시는 때에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그의 공식적인 지상 재림의 7년 전에 일어날 분리된 사건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어왔다. 요한계시록 19:11-21에 주어져 있는 묘사들 중 교회의 휴거와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은 주지할 만하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하지만 휴거를 묘사한 성구들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공중에서 성도를 만나시지(살전4:17)땅을 딛으신다는 표현은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요한계시록19-20장에는 성도들의 변형에 관하여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이 부분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땅 위에 있던 성도들은 땅 위에 그대로 남아서 자연적인 육체를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만일 휴거가 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중요한 변형에 관한 말을 요한계시록 19장에 찾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정리
1.재림주의 모습:
첫째로, 재림주는 백마를 타고 계신다(11절). 여기에서 백마는 승리의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정복자로 그의 원수들을 물리치는 승리의 왕이시다. 그는 이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의 왕으로 임하는 것이다.
둘째로, 재림주의 눈은 불꽃같다(12절). ‘불꽃같다’는 것은 주님의 전지성을 가리킨다. 주님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단10:6). 계1:14에 이미 언급된 이 불꽃 같은 눈은 그리스도께서 적을 파괴하는 무한한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명석한 통찰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셋째로, 재림주의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다(12절). 12:3에서 용은 일곱 면류관을 썼었고 13:1에서 짐승은 열 면류관을 썼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재림주 그리스도는 ‘많은 면류관’을 쓰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왕들의 왕이심을 알려준다(마28:18;고전15:25;빌2:9,10). 그리스도는 원수를 정복하고 승리하셨다. 이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왕권이 사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 완전히 넘어왔으므로 홀로 영광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넷째로 ,재림주 그리스도는 ‘피뿌린 옷’을 입으셨다(13절). 여기서 ‘피’는 그리스도 자신의 피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단의 세력들이 흘린 피이다. 주님께서 전사로서 모든 악의 세력을 무찌르실 때에 원수의 피가 주님의 옷에 묻었다. 이 모습은 이사야 63:1-3의 반영으로서 원수를 정복함으로 그들의 피로 주님의 옷이 물든 것을 보여주며, 승리자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최후 심판을 통해 세상의 악에 대해 피로 보수 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2.재림주의 이름과 속성:
첫째로 ,재림주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다(11절). 여기소 ‘충신’은 ‘신실하다’는 뜻이며, 이 뜻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행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실성과 성실하심을 나타낸다. 또한 ‘진실’은 우주와 인생이 기다리던 ‘진정한 구주’란 뜻이다. 재림주는 우리가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진짜 구주로 거짓된 사단의 세력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속성을 지니셨다.
둘째로, 재림주의 이름은 자기밖에 모른다(12절). 이에 대해 스위트는 피조물인 인간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이름’은 인간에게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비밀을 뜻한다고 했으며 존슨과 모리스는 그리스도께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능력과 권세를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의 일부를 알고, 그의 구원과 도우심을 구할 수는 있지만 성육신의 참된 비밀과 크신 섭리, 그리고 그분의 온전한 능력과 권세는 우리에게 감추어진 것으로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고 경배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로, 재림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13절), 이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시하는 것은 사도 요한의 기록에서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요1:1). 그러나 요한복음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사역을 담당한 반면,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서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으로 행동력 있고 능력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려진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살아 있는 말씀들, 즉 창조와 저주와 약속과 심판의 말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구현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재림주의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다(16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후적 목적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그리고 재림의 목정은 모든 권세와 만물을 주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가장 복됨(6절)을 깊이 느껴냐 겠다.
3)재림주의 심판하시는 모습: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전사이며, 승리자이시다.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때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그분이 짐승과 땅의 왕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재림주 그리스도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신다(11절). 요한 당시 로마는 극도로 타락하여 왕이나 관리들로부터 정의나 공의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때 그의 심판은 공의로우시며 세상을 정의와 진리로 다스릴 것이라고 요한은 묘사하고 있다. 주님은 공평 무사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다(2절).
둘째로,재림주 그리스도는 하늘 군대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싸우신다(14절). 하늘 군대는 천사와 성도들을 합한 자들이다. 그들은 승리와 영광의 표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탔다. 이 백마를 탄 하늘 군대는 17:14에 나타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자들’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승리를 미리 획보한 자들이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입에서 나온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칠 것이다(15절). 이는 아시야11:4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입에서 나온 검’은 구원과 평화를 주는 복음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는 말씀과 심판 도구를 가리킨다(1:16;2:12,16).
넷째로, 재림주 그리스도께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15절).
‘철장’이란 쇠막대기, 철몸등이 따위이다. ‘다스리신다’는 말은 심판한다는 뜻이다. 친다는 말이다(시2:9). 목장에서 목자는 지팡이로 양을 친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쇠몽둥이로 다스린다.
다섯째로,재림주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이다(15절). 이는 이사야63:1-6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완전히 멸망하고 말 것임을 보여준다(14:19,20).
1.악한 자의 멸망(계19:17-21)
하늘 군대를 이끌고 재림하신 그리스도께서는(11-16절) 마침내 사단과 그 하수인들을 정복하는 전쟁에 임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사단 간에 있을 최후의 결전을 일명 ‘아마겟돈 전쟁’(16:16) ,또는 ‘곡과 마곡의 전쟁(20:8)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패하고만 사단은 이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고 만다(20절;20:10).
19:17-18-땅의 군대들은 하늘의 군대와 싸움이 안된다. 그리스도의 입에 있는 날카로운 칼(15절)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땅의 군대들을 멸망시키라고 명령하시는 그의 권위있는 말씀의 상징이다. 수백만의 사람과 그들이 탄 말들이 한꺼번에 죽음을 당한다. 요한은 이와 함께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치고 있는 한 천사를 보았다. 그 천사는 새들에게 왕들과 장군들, 또는 말 탄 자들과 그리스도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들의 고기를 먹는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이라고 외쳤다.
1)이것은 살육 향연이다
천사가 ‘해’에 섰다는 말은 높은 곳‘ 광명한 곳에 서 있다는 말이다. 그는 드러난 곳, 잘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서서 백마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수종들고 있는 영물이다. 그 천사가 새들에게 고기의 향연에 참여하라고 초청하였다. 이 천사는 사람들의 시체를 치워버리기 위하여 공중에 나는 새들을 초청한다. 천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튼 잔치‘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한 것은 악도들을 심판하여 저들의 종말을 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기의 향연에 비하였다.
2)누구의 고기인가?
왕들의 고기이다. 장군들의 고기이다. 장사들의 고기이다. 말들과 그 탄자들의 고기이다. 모든 자의 고기이다. 이는 요한계시록6:15에 나오는 임금들,왕족들,장군들,부자들,강한 자들, 각종 자주자들이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땅의 왕들, 상고들,각 선장과 선객과 선인들,거문고타는 자,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자, 세공업자,맷돌 돌리는 자,등불 켜는자, 신랑과 신부 등이다. 이 모든 인류의 육체를 고기에다 비유하였다. 이유는 저들은 영혼을 부인하거나, 멸시하거나, 또는 영혼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곧 육체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3)무슨 이유인가?
(1)아마겟돈 전쟁의 날에 이루어질 인류의 대량 살육을 의미한다. 그 살육의 비극을 큰 잔치에 비유하였다.
(2)이것은 불신앙의 인류가 받을 저주를 뜻함이다.
새들이 와서 그 시체(고기)를 먹는다고 함은 극도의 저주를 표현한 말이다.
1.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계19:19-21)
1)짐승의 최후 도전(계19:19)
본문에는 두 종류의 군대가 있다. 한 군대는 짐승과 땅의 군대들인데 이 군대는 복수로 나타났다. 또 한 군대는 백마 탄 자와 그를 따르는 군대들이다. 이는 단수이다. 여기 ‘짐승’은 무신론 권력의 정부이다. ‘땅의 임금들’은 그 동명국들인 열 뿔들이다. 그 ‘백성들’은 그를 추종하던 666의 표를 받은 무리들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결국 아마겟돈 전쟁은 종교 전쟁으로 그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또 신기한 것은 짐승의 군대가 먼저 도착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단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전 세기의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 오던 전쟁이다.
2)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계19:20).
여기 본문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혔다고 하셨다. 단번에 영원히 체포된 경우를 뜻함이다. 다시 탈출이나 석방이 없는 영원한 포로의 상태이다.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권력이다. ‘거짓 선지자’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데 곧 어용 종교 단체를 뜻함이다. 무신론 권력의 수장과 어용 종교의 수장이 잡혔다. 그러므로 그안에 속한 모든 자들이 다 포함된다. 저들은 ‘산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워졌다’고 하였다. 단번에 던져진 상태이다. 영원히 던져 버려진 상태이다.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의 영생, 곧 영벌을 받게 되었다.
3)나머지 멸망(계19:21)
‘그 나머지’는 그두짐승을 추종하던 모든 세상의 인간들을 총칭한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죽었다’ 함도 기록된 말씀대로 심판을 받아 영벌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 모든 새가 그고기로 배불리우더라’함은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의 결과를 비유한 표현이다.
1.천년왕국과 백보좌 심판(계20:1-15)
1)사탄의 결박(계20:1-3)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가 도래하고 있다. 그것은 전투하는 지상 교회의 마지막 소망이다. 요한계시록의 5대 원수가 끝장이 나고 있다. 음녀(바벨론)가 불타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혔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666의 표를 가진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이제 ‘큰 붉은 용’,‘큰 용’,‘용’으로 불리우던 우리들의 대적이 끝날을 보게 된다.
1.전천년설의 견해
(이레니우스,저스틴 마터,터툴리안,트랜취,벵겔,알포드,죠지 뮬러,랑게,엘리웃,고우데,쟌)
1)무저갱(20:1,3)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께 패배한 사단이 지상의 천년왕국 기간 동안 갇혀 있을 임시 초소를 의미함.
2)일천년 동안(20:2-6)
문자적인 천년이나 일정 기간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 지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
3)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20:3)
사단이 재림하신 그리스도께 패하여 무저갱에 갇혔기 때문에 천년왕국기간 동안은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4)왕노롯(20: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위에 천년왕국을 건설하실 때 성도들이 주와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5)첫째 부활(5,6절)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신실한 성도들만이 먼저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6)사단이 옥에서 놓여나와(3,7,8절)
천년왕국이 끝나고 흰 보좌에 의한 최후심판이 있기 전에 곡과 마곡에서의 마지막 싸움을 위해 사단이 일시적으로 놓여나는 것을 의미한다.
7)곡과 마곡(8-10절)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아마겟돈 전쟁과 다른 것으로 천년왕국이 지난후 최후 심판 직전에 사단과 그추종세력이 최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8)둘째 사망(11-14절)
첫째 부활 때 일어나지 못한 불신자들이 천년왕욱 후에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최후 심판을 거쳐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2.무천년설의 견해
(오리겐,어거스틴,칼빈,보즈,카이퍼,렌스키,뻘콥,위필드,밀리간,스트롱,하밀톤,머리)
1)무저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사단이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그 활동이 제한된 것을 상징한다.
2)일천년 동안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전기간을 가리킨다.
3)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교회의 전 역사 기간 동안 비록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할지라도 사단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패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임을 암시한다.
4)왕노롯
믿는 성도들이 죽은 후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하늘나라에서 주와 함께 왕노롯하는 것과 땅위에서 성도들이 복음의 권세로 세상을 심판하고 정복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5)첫째 부활
죄로 죽었던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죽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6)사단이 옥에서 놓여나와
교회의 전 역사 이간 동안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점차로 그힘을 회복하여 성도들을 핍박하고 세상 권세를 잡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7)곡과 마곡
아마겟돈 전쟁의 또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게 될 이미 판가름 난 사단과 하나님의 최후 결전을 의미한다.
8)둘째 사망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백보좌 심판에서 영생과 형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1.백보좌 대심판(계20:11-15)
창세 이후로 지구에 왔던 모든 인간은 다시 한번 크고 흰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야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리켜 백보좌 대심판이라고 부른다.
1)백보좌에 앉으신 심판주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보좌에 앉으신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계4:2). 따라서 흰 보좌에 앉으신 이는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그가 흰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절대적으로 공의롭고 순결하여 조금도 편파적이지 않고 정직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신약에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요5:22;마25:31-48;딤후4:1) 그러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대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한 가지로 묘사했는가 하면(롬14:10;고후5:10),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누누이 강조하셨다(요5:19-26). 곧 아버지의 심판과 아들의 심판을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2)대심판의 재판석은 하늘이다.
계20:11에 ‘땅과 하늘이 그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고 하였다.
‘사라지는 땅과 하늘’
벧후3:10을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최후 심판 때에는 낡은 옛것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심판의 백보좌와 심판주 , 그리고 그 앞에서 심판받을 전인류만이 남게 되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에 중대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땅과 하늘이 ‘변하여’ 새 땅과 새 하늘이 되리라고 하는 견해를 완전히 일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천지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 땅과 하늘을 ‘변형하여’ 새로운 신천 신지를 만들지 않는다. 이 땅과 하늘은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땅과 하늘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부실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가 유입되면서 천지는 오염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에는 부적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
3)대심판을 받을 자는 전 인류이다(계20:12-13).
히브리서 저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였다. 또한 주님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악인과 의인이 동시에 설 것을 말씀하셨다(마25:31-46). 심판의 대상은 사탄은 물론이고(마8:28;벧후2:4;유1:6), 사람들 모두이다(롬2:4-11;14:10).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롬2:3). 결국 ‘우리 각인이 자기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될’것이다(롬14:12). 한가지 ‘믿는 자는--심판에 이르지 아니’(요5:24)하리라는 약속과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고후5:10)리라고 한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모든 성경의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이는 성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지만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용서받은 자들이 되어 거룩한 자들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4)대심판의 내용은 행위 심판이다(계20:12-13).
심판의 표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심판의 가장 중요한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건축자의 비유를 통해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순종하면 축복의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불순종하면 저주의 사람, 멸망의 사람이 된다(신28장;30:19,20).
언행 심사
인간의 언행 심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된다. 첫째는 행위이다. 바울사도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고 하였다. 둘째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셋째는 생각이다.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는 주님이 심판날에 이것을 드러내어 판단하신다고 하셨다(고전4:5). 넷째는 모든 은밀한 것들이다(전12:14;롬2:16). 주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은 행위의 책에 기록되어 심판의 근거 자료로 제시될 것이다.
대심판의 기준은 두 권의 책에 의해서이다(계20:12,15)
백보좌의 대심판은 용의주도하고 세밀하며 구체적이다. 그것은 책에 기록해 놓은 대로 심판을 하신다. 두 권의 책 가운데 처음 책은 생명책이다(계20:12,15). 이 생명책에는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자들의 명단이 있다(엡1:3-4). 또한 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행위의 책’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복수이다. 우리 성경은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라고 하였다. 이행위의 책에는 창세 이래로 자기 위주로, 자기를 이롭다고 믿고 살던 모든 불신자들의 행적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5)불못 심판(계20:14-15).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음부는 하데스, 스올,황천 등과 유사한 표현으로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거나, 혹은 죽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산 자의 이름이 호적에 있듯이 구원받은 자의 이름 또한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계21장).
1)배경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은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 환상이었고(사65:17;66:22),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환상이다. 많은 선지자와 성도들이 신-구약을 통하여 바라고 기대했던 복이 드디어 실현되는 본장과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절정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완전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 환상은 창세기의 에덴 동산, 이사야와 에스겔의 예언, 그리고 빛, 생명수, 신령과 진리의 예배등이 거론된 요한복음 등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신천 신지의 환상’은 이미 요한계시록 7:15-17에서 예견되었으며, 본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 다음 22:1-5에서도 계속 다루어진다. 이러한 동일한 주제 ‘신천 신지’에 대한 성경의 반복적 관심은 사상적으로 다음 두 가지 영향을 맏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장의 환상은 유대적 소망을 그 배경으로 삼는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꿈은 유대 사상의 중심이 되어왔다. 즉 이사야54:11,12;60:10-20;겔48:31-35;학2:9등에 나타난 예언들이 그것이다.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말살되었을 때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재건하시리라는 믿음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주신다는 믿음은 유대인의 꿈이며 동시에 영적 이스라엘이된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 계속 경배하며 사는 삶의 성취가 바로 이 새 예루살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본장은 구약시대러부터 유대인의 생각 속에 전해져 내려온 이 ‘신천 신지의 꿈’,‘새 예루살렘의 꿈’이 하나님을 바라는 모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으며 고난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과 빛을 던져주는 확실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둘째는,헬라적인 배경이다. 풀라톤은 가르치기를, ‘지상에 있는 것은 모두다 하늘에 있는 실재의 그림자요, 불완전한 복사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를 이데아설이라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 이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이상 세계에 실재로서 존재하고 있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예루살렘의 그림자이며, 지상의 예루살렘을 보면서 보다 원형적이고 확실한 예루살렘의 실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21:1-22:6).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 이 말씀은 바로 성경적 종말론의 목표를 제시한 내용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죄와 타락으로 인해 더럽혀진 만물이 하나님에 의한 중생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주제를 내포한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거둡나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활은 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그 지향하는 목표를 두는 것이다. 이 최후의 막에서 우주의 구조 전체가 변형되고 옛것은 새것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현상을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라고 했는데 이 구절이 우주의 전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기 위해 옛것이 죽는 과정을 거치는 것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부터 내려온다고 기록하였는데, 그때에 가서는 이미 새 하늘이 땅 위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땅도 깨끗하게 되고 성결한 하나님의 처소가 됨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물론 하나님은 여전히 땅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므로 하늘의 하나님이 될 것이지만, 새롭게 된 하늘은 결코 공간적 개념이 아닌 ‘새로움’의 개념에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즉 죄가 완전히 정회된 상태를 강조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창조의 회복’이라는 말로 대치가 가능하다 하겠다. 창조의 순수함이 지켜졌던 때에 질병과, 근심과 눈물이 없었듯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그런 것들은 존재치 아니할 것이다. 모든 것들이 안정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어서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는 것이다. 성경에서 바다는 대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을 가로막은 홍해가 바로 그러하고 ,바다에 산다고 여겨졌던 괴물 ‘리워야단’(사27:1)도 그러한 사고의 반영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바다 위로 걷기도 하셨다. 이는 모든 분요와 고통을 제거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이신 사건인데 하늘나라에 바다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가 있다.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한 평화와 안전을 주의 백성들에게 주게 된다. 한편 새 하늘과 새땅은 그 자체로서도 축복이지만 거기에 더한 축복들도 또다시 주어진다. 즉 사망이나 고통이 없게 된다는 것(계21:4), 완전한 의와 기쁨의 부여 등이 바로 그것이다.
1.새 하늘과 새땅의 창조(21:1,2)
‘새 하늘과 새 땅’, 여기 ‘새’라는 말은 원어에서 종별상, 혹은 품질상의 새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신천 신지가 현세계의 변화인지 전혀 새로운 세계의 창조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그러나 우주의 구재료들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물을 새로이 지으셧다고 생각할 수 는 없다. 결국 창1장에서의 창조가 다시 행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65:17을 잘못 해석한 것이며, 롬8:20~23과 본문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그레쟈누스’는 ‘이 신천지의 출현은 구천지의 형질과 및 조직이 변화하여 영화롭게 된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어쨌던 옛 하늘과 옛 땅은 없어지고 아주 다른 종류의 천지가 생겨난다고 할 만큼 그것들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의미
1)새로운 나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1절). 요한은 둘째 사망이 끝난 뒤 세상이 전혀 새롭게 변화된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계속해서 요한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 둘째 사망은 사탄과 그 세력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패망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철저하고 완전하게 주의 뜻이 실현되는 영역은 결국 완전하고도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2.새 예루살렘(21:2~8)
21:2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특별한 모양에 주목하였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더라. 새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영적으로 소돔에 비유되었다,11:8)과 대조적으로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워졌다.
다시는 슬픔이 없는 곳
21:3~4 새 예루살렘에 대한 최초의 계시에 이어서 요한은 보좌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20회가 쓰인 “큰 음성”의 마지막이다(5:2에서 처음 사용).
하늘로부터 들린 마지막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셔서 성도들은 그의 백성이 되며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죄와 사망 때문에 갖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영원히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질서에는 슬픔이 없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사망과 그 애통이나 고통과 그 부르짖음이 다 없어진다. 이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21:5~8 새 질서로의 극적인 전환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것은 윗절의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한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새롭게’란 말이 강조되고 있다. 즉 사탄이 지배하던 옛 세계는 사라지고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시는 새 세계가 전개되는데, 구세계에서 신령적이며 개인적인 창조를 체험한 성도들은(고후5:17) 이제 현실적이며 우주적인 신천지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변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자와 끝자로서 그 해석은 처음과 나중이라고 한 말씀 속에 들어있다.
이긴 자의 축복
21:7~8
1)새 하늘과 새땅에 거함
고후 5:17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리고 눅 5:38을 보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들이 거할 곳은 죄로 오염된 이 땅과 하늘이 아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처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곳에는 눈물도 없고 ,사망과 애통이 없으며, 질병도 없는 곳이다. 한마디로 바른 질서가 있고 평강이 있는 곳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를 예언하여 새 하늘과 새땅에서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5)고 했다.
2)생수를 값없이 먹게 됨(6절)
3)하나님의 아들이 됨(7절)
4)실패한자의 불행(8절)
3.신분인 새 예루살렘(21:9~11)
21:9~11 16장에서 진노의 대접을 쏟아붓던 천사들 중 하나가 요한을 초청하여 신부인 새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성령에 이끌려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4.성으로서의 새 예루살렘(21:12~27)
21:13~16
본문은 앞 구절에서 말한 성곽의 외형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열두 기초석...십이 사도의 이름’, 열두 기초석은 열두 문과 같은 숫자로서 열두 지파및 열두 사도의 숫자와도 일치한다. 이 열두 기초석은 성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깊고 안전하게 놓인 것이며, 또 이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히11:10) 바라는 이스라엘의 굳은 믿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편 십이 사도가 언급된 것은 본서에서 처음이다. 성문에는 십이 지파의 이름이 있고 성터에는 십이 사도의 이름이 있어 구약과 신약의 조화와 종합을 보여 준다. 즉 하늘의 교회는 신구약을 총망라한 교회요, 전세계, 전세대 성도들의 총체적인 우주적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이 사도는 개인적인 자격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조직체로 보아야 한다.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갈대는 이스라엘인들이 자로 쓰는 도구 중 하나였다. 이렇게 자로 척량하는 행위는 계11:1에서도 나타났다. 즉 계11장에서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지팡이 같은 갈대로 척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현세 교회와 순교자를 척량함으로써 보호와 심판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지만 본절에서 나타나는 행위는 무궁한 세계의 교회를 척량함으로써 이 도성의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장관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금갈대는 교회가 받은 거룩한 사랑의 축복을 표현하고 있다.
의미
1.새 예루살렘의 열두문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문, 서편에 세 문이니’(13절). 본장 12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은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 곧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성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그 성문 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그 성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성읍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 성의 문이 각각 세 개씩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주의 백성들을 모두 들어오게 한다는 의미이다.
2.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새긴 열두 사도의 이름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4절).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열두 사도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하늘나라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기초 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의 사역과 성격 등이 다양 했듯이 오늘날 교회 모습도 무척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다.
3.새 예루살렘의 규모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16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란 약2,200km를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은 장과 고가 같은 완전한 정입방체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며 동시에 그 통치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또한 본문 15절을 보면 천사가 그 성과 성문 등을 척량하고 금갈대를 가졌다고 했는데 이 척량 행위는 영적인 더러움으로부터 어떤 것을 축복하기 위해 보증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늘나라 도성은 완전하고 성결한 곳이다.
21:17~20
앞에서 살펴본 성곽의 크기에 이어 본문에서는 성의 구조와 건축 재료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세에서의 최상급의 보석들이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규빗은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길리로 45cm이다. 결국144규빗은 약65m인데 이것이 성광의 폭인지 높이인지는 본문에서 알수 없다. 이144는 선민의 숫자로서 완전수이기 때문에 성곽의 크기가 완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좋겠다. ‘그 성곽은 벽옥..그성은 정금’, 그 성곽이 벽옥이라는 말은 미와 순수성을 가리키고, 그성이 정금이라는 것은 고귀성과 순전성을 표시한다. ‘성곽의 기초석에는 각색 보석으로,,,열둘째는 자정이라’, 성곽의 기초석은 12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21:14). 그러므로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기초석이다.
의미
1.가장 아름다운 성
성벽의 모양. 18절에 보면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알 같더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성벽이다. 정방향의 성벽이 이러할진대 어디서 보나 찬란한 것이다. 벽옥은 수정처럼 맑은 모양을 뜻한다. 그속에 있는 성도들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지 않느가? 주님의 보혈로 그 허물을 가리우고 씻어서 어디서 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 감출 것이 없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성곽 바닥의 모양, 각양 보석으로 꾸며졌다.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금강석 종류를 의미한다. 둘째, 남보석이라고 했다. 이것은 맑고 푸른 빛깔을 가진 유리 종류에 속하는 녹색 보석이다. 셋째, 옥수라고 했다. 이것은 에메럴드 종류에 속하는 녹색 보석이다. 넷째, 녹보석으로서 분명치는 않으나 녹색의 결정으로 생각된다. 다섯째,홍마노이다. 이것은 손톱의 연분홍 빛과 유사한 것으로서 장신구에 사용하는 것으로 아주 값진 얼룩마노이다. 여섯째,홍보석이다. 이것은 현대의 홍옥수에 해당하는 보석으로 보인다. 일곱째,황옥이다. 여덟째,녹옥으로서 녹보석의 변종이다. 아홉째, 담황옥이다. 황옥의 변종으로서 찬연한 것이다. 열째,비취옥이다. ‘황녹추’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보석으로서 현대의 녹옥과 남옥에 속하는 보석이다. 열한째,청옥이다. 이것은 현대의 사파이어에 해당하는 보석이다. 열두째,자정이다. 자주빛 나는 보석으로서 자수정을 가리킨다. 참으로 존귀하게 꾸며진 성이다.
영적의미
하나님은 태초에 지은 인간에게 이 우주를 선사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아들까지 선사하셨고 이젠 영원히 살 가정 아름다운 성을 예비하셨다. 그곳이 우리의 집이라 생각할 때 이 땅의 무엇과 비교할 수있으며, 무엇에 탐욕을 갖고 살 이유가 있겠는가?
1.새 예루살렘(1)
21:21~24
앞에서 묘사한 새 예루살렘의 외형에 이어 본문에서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묘사한다.
요한은 하나님(성부)과 어린 양(성자)이 성전이시기 때문에 그성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 중 첫 번째는 성전이다.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성전이 중요하고 중심되는 건물이었으며 모든 유대인의 종말 신앙에서도 성전은 언제나 그 중심이었다(사44:28;60:13).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이 ‘성전’은 성소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는 하늘나라는 그 전체가 그대로 성소이므로 따로 성소가 필요없는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온 성안을 채우고,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며 예배의 대상자와 큰 제물(그리스도)이 함께 거한다(이상근, 알포드).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 중 두 번째는 해와 달이다. 이는 사60:19,20의 반영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임재해 계셔서 그영광이 충분히 빛날 것이므로 다른 빛이 소용없음을 말해 준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 다니고‘, ’만국‘은 구원받은 자들을 말한다(사60:3). .
의미
1,존귀한 자가 거할 곳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성도는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존귀한 제사장이다. 바로 그런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이 새 예루살렘이다.
2.다른 빛이 필요없는 곳
본문23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성은 이 땅에서와 같은 해나 달의 빛이 필요없는 곳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예언자 이사야는 일찍이 이렇게 선포하였다. ‘다시는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60:19,20).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빛이 충만하여 다른 빛이 일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본문24절은 ‘만국이 그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 위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천하 만국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행하고 하나님께 스스로 굴복하여 그를 섬길 것을 암시하고 있다(사60:3~5).
새 예루살렘성(2)
계21:25~27
새 예루살렘에 없는 다섯 가지 중에서 본문은 닫힌 문과 밤과 부정한 것에 대해 설명한다.
1.밤이 없는 새 예루살렘성
새 예루살렘성에 없는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전이요(22절). 둘째는 해와 달이며(23절), 셋째는 밤이다. 본문은 그중에서 밤이 없음을 말해 준다. 25절을 보면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고 했다. ‘밤’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악’한 때와 관련하여 사용했다. 즉 밤은 무지와 불신앙의 때(참조,롬13:12), 환란과 고난의 때(사21:12), 아무것도 일할 수 없는 때(요9:4), 죄악이 성행하는 때(요13:30)로 성경에 묘사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성 바로 이러한 밤이 없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성의 열두 성문은 닫을 필요가 없다. 문은 도둑이나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2.새 예루살렘성의 구성원
26,27절을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다. 새 예루살렘성에 거할 수 있는 자는 만국 백성 중에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이외에는 없다. 이들은 모든 나라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이 표시되어 있고 환란이나 시련 가운데서도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죽도록 충성한 자들이다.
3.새 예루사렘에 들어 가지 못할 자
26절을 보면 ‘무엇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5.생명수와 생명나무(22:1~2)
본문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요한은 이 거룩한 성에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어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내린다고 묘사한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생명수의 강’을 직역하면 생명물, 혹은 생수이다. 이는 요4:10에 언급된 ‘생수’와 거의 같다. 즉 그것은 생명의 성질을 가진 물이 아닌 생명이 있는 물이다. 그 생명수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참조, 창2:10;시46:4). 이 계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에스겔서로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부터 샘이 솟아서 갈수록 큰 강을 이루고 그강이 사해로 들어가 그 죽음의 바다를 소성케 하고 그 주위를 생명으로 채운다고 하였다(참조, 겔47:1~12;슥14:8) . 그러나 요한의 계시는 그범위가 세계적이라는 면에서 에스겔의 환상과 다르고 그것이 정신적이라는 면에서도 역시 차이가 난다. 한편 생명수의 강을 성령의 상징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물론 생명수를 성령으로 나타낸 경우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요7:38,39), 새 예루살렘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강 죄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 새 예루살렘의 전경은 매우 회화적이다. 도성 길 한가운데로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죄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여러 가지 실과들을 맺는다. 새 예루살렘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뭉경이다. 특별히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가 도성 가운데를 지나간다는 것은 에덴동산의 경우 생명나무가 불칼로 지켜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누구든지 그열매를 따먹을 수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의미
1.생수의 강
1).수정같이 맑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1절). 모든 물이 다 맑은 것은 아니다. 더욱이 팔레스틴을 비롯한 근동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수정같이 맑은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듯이 믿는 자들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비록 혼탁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으며, 또 이일은 비록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나 가능한 것이다.
2)보좌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과 및 어린의 보좌로부터 나서”(1절). 요한은 생명수의 강이 주의 보좌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서 성전으로부터 생수가 솟아나는 것을 보았다(겔47장). 또한 시편 저자는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46:4)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찬양하는 고백이다. 영원한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있다. 이성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도성이다. 마찬가지로 이땅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미치는 영역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요 새 예루살렘이다.
3)길 가운데로 흐른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2절). 생명수의 샘은 새 예루살렘의 한가운데 를 관통하여 흘렀다. 이 때문에 이 샘은 예루살렘성 모든 식물을 소성케 하는 근원이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 모든 자연의 혜택, 그리고 우주 만물의 원래적인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꼭 같이 나눌수 있는 세상,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어떤 외적인 조건도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챌 수는 없다. 만인이 공유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누려야 할 땅과 물과 대기가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 독점되고 오염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 생명나무
요한은 예루살엠 가운데를 지나는 생명수의 강 죄우에 생명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생명 나무는
1)과실을 달마다 맺는다.
요한은 생명나무가 열두 가지 과실을 달마다 맺는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풍족한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처소인 것이다.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 한다. 사치하고 타락하며 오염된 세상에서 성도로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
2)만국을 소성케 한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2절). 하나님의 나라는 치유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땅에 오셔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또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러나 이는 외형적인 치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세력에 눌려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이처럼 만물을 소성케 한다는 것은 상한 심령을 위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을 구원시키는 역사를 말한다.
끝으로
우리는 흔히 새 예루살렘에 흐르는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를 막연히 죽음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세상, 그저 좋은 세상 정도로만 상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에게 본문은 그저 상상 속의 세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동화책 속의 그림이 아니다. 이세상은 지금 우리의 현실속에 있으며. 또 이런 세상이 이땅위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7.하나님의 보좌(22:3~5)
본문은 새 예루살렘 묘사의 최고 절정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이 구절은 슥14:11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즉 스가랴는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라고 하였다. 큭히 새 예루살렘에 대한 계시가 잃어버린 에덴 동산을 배경으로 한다고 할 때, 이 구절은 태초에 있었던 낙원에서의 저주를 상기시킨다. 즉 첫 에덴도 낙원이이었으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축복은 저주로 화하였다. 하지만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그런 타락과 저주의 위험은 없다. 요한은 바로 이같은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에덴 동산에서의 저주를 간접적으로 끌어들었다(이상근) .
‘다시 밤이 없겠고--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이 구절은 중의 법을 사용하였다. 거룩한 인격의 빛이요, 빛을 창조하신 분의 빛이 새 예루살렘에 비치므로 세상을 비추었던 등불이나 햇빛 등은 쓸데없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1.하나님의 마지막 말씀(22:6~21)
1)그리스도 재림의 획실성(22:6~7)
22:6~7 천사는 이 책의 말이 신실하고 참되다고 한다. 이는 이미 주어진 예언들이 이해 가능한 것이고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 대화들의 목적은 당혹하게 하거나 혼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속히 될 일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이 말씀은 , 요한계시록은 그 해석의 열쇠가 오늘날 주어져있지 않은 풀 수 없는 신비에 가득찬 책이라고 하는 많은 학자들의 관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책은 요한의 모호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묘사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이 책의 말씀들이 글자 그대로 평범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정확한 뜻이 파악된 것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이 상징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호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 7절에 또 등장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참고,1:7;22:12,20) . 또한 갑작스럽게 오신다. 헬라어 타기는 “곧”(soon, NIV)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급히”로도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다 맞는다. 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늘 미래에 곧 오시며, 그오심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 이후에 그를 믿고 이 책의 말씀에 주위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특별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2.요한의 경배(22:8~9)
22:8-9 이 엄청난 계시가 요한에게 주어졌을 때 그는 또다시 엎드려 천사에게 경배하려 하였다. 천사는 자기도 성도와 같은 종이니 자기를 경배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천사가 아닌 주께 경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 이 책을 선포하라는 명령(22:10-11)
다니엘은 그의 예언을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단12:9). 그러나 요한은 이 예언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이 꿰뚫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책이라는 몇몇 학자들의 견해와는 확연하게 반대된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의 평범한 서술이든 혹은 상징이든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을 계시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곧 뒤따르는 권유의 말씀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불의를 행하거나 더러운 자는 그 일을 계속하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도 그일을 계속하라고 격려하신다(22:11). 이곳에서의 요점은 악한 자들을 보아넘겨 준다는 것이 아니라 이 예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악함을 계속하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반대로 이 예언에 주목하는 사람은 옳은 일을 계속한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주의 재림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어떤 중요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의미
임박한 때
“때가 가까우니라” 즉 그리스도깨서 재림하실 날이 임박했다는 말이다. 단12장을 보면 다니엘 선지자도 요한이 본 것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그것을 개봉하도록 허락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단12:4)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는 여러 날 후의 일”(단8:26)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인봉하고 기다렸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요한의 환상속에서 그 책이 다시 열리고 있다. 다니엘의 계시는 바로 요한의 때를 위해 봉함되었고, 요한은 그 환상을 보고 때가 가까운 줄 알았다. 계시록은 봉인된 책이 아니다. 이것은 곧 일어날 마지막 때의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록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요한을 통해서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4. 심판과 상급(22:12)
이 절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로 시작된다. 이 말의 뜻은 7절과 마찬가지이다. “곧” 있을 그의 재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 사람에게 줄 상이 약속된다. 마지막 심판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그 행위가 기준이 된다. 신실한 사람에게는 기쁜 기대가 될 것이요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다.
의미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주님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
일한 대로 갚아 준다는 것은 철저한 성경적 사고 방식이다. 욥은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욥34:11)라고 하였고, 또 이사야 선지자도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앞에 있으며”(사40:10)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는 주님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이 행복은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를 정결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님이 심판주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끝까지 모든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이를 저버리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보상 이란 의로운 자에게는 축복이요 기쁨이며 상급이지만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이며 저주인 것이다.
5.영원하신 그리스도(22:13).
또다시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셨고, 이 현재의 피조물이 다 파괴되어도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의미
시작과 끝이신 그리스도
1)완전하신 그리스도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헬라인들은 이 두 글자를 통하여 모든 것을 갖춘 완전한 상태를 나타냈다. 여기에는 완성한다는 의미도 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 즉 주의 재림은 모든 것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완전하게 한다. 비록 주님은 세상을 온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인류의 타락은 이 세상과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우주 만물이 오염되고 자연이 혼탁하며 인간이 점점 타락의 늪으로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은 창조 당시와 같이 온전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2)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
주님은 초림 때에 인성을 입은 나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제 그분은 심판주로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실 것이다. 헬라인들은 ‘제우스’에게 감사를 드릴 때 항상 시작과 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의 권세가 무궁하여 그 권세는 자신에게서 시작되며 또 아무에게 인계되지도 않고 자신에게서 끝난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야말로 바로 이러하다. 어느누구도 그리스도의 이런 권세를 피할 수는 없으며 어떤 세력도 이 권세를 대신할 수는 없다.
6. 축복과 심판(22:14~15).
요한계시록의 일곱 개의 축복 중 맨 마지막 것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성도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새 예루살렘과 그 생명나무에 가까이 갈 수 있다. 다른 여섯 개의 축복은(1:3;14:13;16:15;19:9;20:6-22:7)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KJV에는 이 구절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되었다. 헬라어 사본에는 두 가지 경우가 다 나타난다. 하지만 보다 권위는 사본들에서는 할 글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처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더욱이 불가타역은 이 구절에 ‘어린양의 피에’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뜻을 밝힌다. 따라서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받는 것을 가리키며 큰 환난을 통과한 순교자들과 성도들을 총칭하여 일컫는 표현이라하겠다.
의미
1)하늘나라의 문
계21:12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새 예루살렘성에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문안에 들어가는 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14절). 이 두루마기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예복이다(고전6:11).
3)문밖에 남아 있는자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니라’(15절). 여기에서 개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남창이라든가(신23:18). 율법을 더 강조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술객은 마술이나 미신 등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를 지칭한다. 그리고 음행하자는 음란을 추구하는 무리들, 살인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성도들을 핍박하며 죽인 자를 의미한다. 한편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란 진리를 거부하고 불의에 동조하거나 악을 묵인하는 자를 뜻한다. 이런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데 이들에게 준비된 것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일 뿐이다(계21:8).
7. 성령과 신부의 초청(22:16~17)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교회들을 위한 증거를 보낸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 그리고 광명한 새벽별로 소개한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마1:1). 그의 오심이 광명한 새 날이 시작을 알리는 새벽별과 같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성령과 신부(교회)는 연합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듣는 사람들에게 응답하라고, 또한 그 초청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시키라고 격려하신다. 목마른 자는 와서 값없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라고 하는 놀라우신 약속이 주어져 있다. 이 초청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모든 세대에 전해졌던 놀라운 초청이다. 자기들의 부족을 인식하고 그리스도가 구원의 제공자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에게는 심판이 떨어져서 때가 너무 늦기 전에 오라는 권유가 주어졌다. 성경은 그 영생이라는 선물이 값없이 주어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대가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미 지불되었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단지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의미
1)다윗의 뿌리이며 자손임
예수께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사11:1)이라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심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하신 약속의 후손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계신다. 많은 성경들도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임을 증거하고 있다(참조, 마1:1;9:27;12:23;롬1:3).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의로운 왕으로서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능역의 왕, 의의 왕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다윗이 팔레스틴이라고 하는 극히 작은 땅에 위치한 이스라엘을 점점 넓혀 갔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팔레스틴에서, 시작은 극히미미한 하나님 나라를 점점 넓히셨다. 다웃은 어느 정도 선에서 그 나라의 확장을 멈추었지만 주님은 한없이 넓히셨으며 확장은 그의 능력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다윗과 달리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서 모든 권세 위에 등극하실 것이다.
2)광명한 새벽별
예수께서는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셨다. 새벽별은 많은 별들 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별로서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동시에 밝은 한 날의 시작을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별은 위대한 황제나 통치자, 또는 영웅들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별이 야곱에서 나’(민24:17)올 것이라고 예언한 말씀대로 죄와 사망의 밤을 몰아내는 영광의 광채로 오신 분으로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마2:2) 광명한 새벽별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증거하셨다.
3)교회와 함께 하시는 성령
‘성령과 신부가’, 여기서 신부란 곤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한다(계19:7). 교회의 주관자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오순절 강림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를 탄생케 했고(행2장), 그후로 지속적으로 교회를 성장 발전케 했다.
4)순결해야 할 교회
우리는 교회를 신부에 비유하는 본문을 통해 과연 말세를 당해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얻는다. 신부의 생명은 순결에 있다. 정욕을 못 이겨 몸을 더럽힌 신부를 기쁨으로 맞이할 신랑은 아무도 없다. 말세를 당하여 신앙에 일치하는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8.마지막 경고(22:18~19)
현편으로는 모든 듣는 사람에게 초청이 주어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성경의 이 마지막 책의 계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중의 경고가 그것에 더하는 사람과 그것의 일부를 삭제하는 사람에게 가해진다. 이 책을 무시하고 그것을 옛 사람의 신비적인 체험으로 돌려버림으로써 이 책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내려질 심판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9.마지막 기도와 약속(22:20~21)
증거의 말씀이 하나 더 주어진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요한은 간단한 기도롤 대답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서소” 이 엄청난 계시를 끝맺으면서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씀이 선포된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