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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졸작 단편소설입니다. 시간나는 대로 일독해 보시고 좋은 충고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김 길 수 배
<단편소설>
오리(汚吏)의 길
김길수
강달호 과장은 모니터에 떠 있는 서류들을 세심하게 검토했다. 관련 법률은 물론, 각종 지침이나 예규, 선례 등도 검토해가며 하나하나 마치 중요한 시험문제라도 푸는 듯하다. 기안문서, 대외적인 민원회신 따위도 내용상의 논리성과 문맥은 물론, 한글맞춤법상 오·탈자까지도 놓치지 않으려했다. 이는 최종결재자의 차하위보조역할인 자신의 의무이자, 신출내기의 필수 과정이라 여겼다.
하지만, 대부분 정형화되고, 일상적인 업무들인지라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특별한 어려움이 야 별로 없다. 국가정책이 실제로 집행되는 일선행정기관인 탓에 민원인을 직접 대하는 대민업무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민원창구에서 즉결 처리되는 게 대부분이고, 그도 아니면 과장이하의 전결사항인지라, 최종결재권자인 소장에게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하루 종일을 치더라도 한 두건이 될까 말까 다.
거기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파랗게 젊은 과장이라, 찾아오는 손님들도 별로 없었다.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하고 나이든 과장이라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소위 갑과 을의 관계인 민원인일지라도, 자연스럽게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지만, 아직 달호에게는 먼 이야기다. 때문에 달호는 한가했다.
‘삐~잉 삐~잉’
책상위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린 달호의 눈에 들어온 발신자는 뜻밖에도 엄마다. 이 시간에 엄마가 무슨 일로? 얼른 귀에 갖다 댔다.
“여기 택배가 하나 왔는데…, 우짜마 되노?‘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는 엄마특유의 어투가 귓전에 쨍 울린다.
“뭐라고요? 무슨 택배가?”
“배종구라는 사람이 보냈네, 배가 한 상자 왔데이”
“뭐? 배종…?”
달호는 급히 말끝을 흐렸다. 배종구라면 바로 눈앞에 앉아있는 저 계장님이 아닌가? 웬일이지? 이럴 땐 뭘 어째야 하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으나 제대로의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냥 받아두세요. 엄마”
달호는 머뭇거리다 에라 모르겠다! 싶다.
“…! 알았다. 니 말대로 한다아. 근데…? 그기 간 지 매칠이나 됐다고 이런 기 다 오노…?”
엄마는 뭔가 마뜩찮다는 듯이 혼자말로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달호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배 계장을 쳐다봤다. 배 계장은 왼쪽 옆모습을 보이며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90도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어 모니터는 보이지 않는다.
배 계장은 우리 과의 수석계장님이시고 연세도 과내에서 가장 많다. 자타가 인정하는 공사다망한 분이다.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청사 앞에서 잠깐 손님을 만나고 오겠다며 외출하더니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배 계장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굽실했었다. 그리고는 오후 내내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길을 준 채 꼼짝없이 앉아있다. 인터넷서핑이라고 하고 계시는가? 아니지.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민원 전화의 대부분이 배 계장을 찾는다. 이곳에 오래 근무한 탓에 완전히 터줏대감에다 약방의 감초 격이다.
‘저 계장님이 뭣 때문에 우리 집으로? 내게는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배 상자를 보내셨지?’
달호는 이유도 모르겠고, 뭐라고 반응을 보여야할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로? 배를 집으로 보낸다면 사전에 무슨 이야기라도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사무실 안은 후덥지근하다. 9월 초순이니 가을의 초입에 들어섰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한낮 더위는 기세가 여전하다. 에너지 절약이라는 정부시책에 따르느라 에어컨마저 제대로 켤 수가 없으니 너나없이 손부채질이다. 창문이라도 열어젖히면 머잖은 곳에서 오는 바닷바람이라도 씌울 수 있으련만, 대로변의 2층인지라 먼지와 소음 때문에 그마저 여의치 않다.
‘나중에 단도직입적으로 한 번 물어 봐야지!’
달호는 생각을 굳히며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참 따분하다. 잠깐 잠깐씩 서류검토를 끝내고나면 근무시간 내내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뉴스를 보는 게 대부분이다. 민원인들과의 상담이야 아예 계장님이하 직원들 몫이다. 자신만 한가한 것 같다. 어느새 부임한지 두어 달이 지나가지만, 이런 분위기가 아직도 낯설고 어색하다. 군대 생활도 그랬고, 군입대전 잠깐 본부에 근무할 때만해도 이렇게 혼자 있는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무실 안이 부산해지는 느낌이다. 각종 서류며, 사무기기 등을 제자리에 옮기며 정리를 하거나 자신의 책상서랍을 여닫는 직원들도 보인다.
달호도 퇴근준비를 한다. 퇴근준비래야 별 게 아니다. 사용 중인 컴퓨터를 끄고 책상의 잠금 장치와 사물함 등 개인적인 것만 살펴보면 된다.
아, 참! 부속실에 연락해봐야지! 소장의 퇴근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이 간부급 직원들이 지켜야 할 일이라고 했지. 다른 과장들에게서 들은 근무수칙 제 1호다.
이유는 두 가지 경우를 들먹였었다. 첫 번째 퇴근시간 이후라도 소장이 업무상 찾을 수도 있으니, 소장의 퇴근 전까지는 과장들이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이거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는 좀 애매했다. 소장이 저녁시간에 아무 스케줄이 없으면 너무 적적할 테니 과장들이 저녁식사를 함께하거나, 퇴근 후의 시간도 같이 보내 줘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소장이 서울에 가족을 둔 채, 혼자 내려와 있으니 어쩌겠느냐? 고.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앞으로 유능한 간부가 되려면 이런 일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 부소장격인 나이 많은 수석과장이 씩 웃으며 들려준 말이었다.
‘아직도 이런 권위주의가…? 살아있구나?’
달호는 내심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좋게 받아들였다. 군대에서도 보고 들어온 일이고, 실제로 본부 국장급인 소장으로서야 할 일없는 저녁시간이 얼마나 따분하랴? 싶은 인간적인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달호는 인터폰으로 소장실에다 물었다. 담당 여직원은 소장은 지인들과의 약속이 있어 벌써 퇴근하셨다면서 먼저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면 나도 퇴근해야지’
달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배 계장의 책상 앞으로 갔다.
“계장님, 저…?”
꼼짝없이 모니터에만 시선을 주고 있던 배 계장이 놀란 듯 차렷 자세로 벌떡 일어섰다.
“저, 계장님, 웬 배 상자를 집으로 보내셨다면서요?”
“아, 그거! 신경 쓰지 마세요. 올(早生) 배 수확 시기라 한 박스 보내드렸습니다.”
“고맙긴 합니다만, 엄청 부담스럽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과장님. 그거 뭐 별 것도 아닌데…!”
배 계장은 아주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표정이다. 달호는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요령부족으로 어정쩡하게 고개만 숙이고 말았다. 그러자 지난번 승차권 일이 생각났다.
‘번번이 이게 뭐지?’
기분이 좀 찜찜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내색하기도 너무 쪼잔 해 보일 것 같고, 태연하고 대범한 척 하자니 솔직히 벙어리 냉가슴 앓는 기분이다.
부임해 온 지 보름쯤 지나 주말이 다가왔었다. 개인적인 용무로 금요일 저녁차로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미리 과내의 세 분 계장님들께 알려드렸었다.
그런데 그날, 그러니까 금요일 아침에 출근하자, 배 계장이 달호의 책상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서울행 KTX 왕복승차권을 내밀었다.
“저녁시간에 올라 가신다기에 구했습니다.”
달호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라 어리둥절했다.
“이거 무슨 일입니까?”
달호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배 계장이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과장님! 객지에 오셔서 고생하시는데, 개인적으로 저녁도 한 끼 못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이거라도 구입했으니 이해해주십시오.”
깍듯한 배 계장의 태도에 달호는 혼란스러웠다. 단순한 호의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과분하다 싶었다. 그렇다고 무 자르듯 거절하자니 배 계장이 말하는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고…. 결국 어정쩡하게 받아들이고 말지 않았던가!
“일선에 나가 근무하게 되면 민원인들이나 직원들이 뜻밖의 호의를 보이는 수가 있지. 이럴 때 대처 잘해야 된다네. 경우에 따라선 고약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근무지인 부산으로 내려오기 직전에, 인사과장이 해 준 말이 생각났다. 처음엔 나 같은 졸병(?)한테 무슨? 하는 생각으로 아예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부임하고 이런 일을 연거푸 맞닥뜨리니까. 혹시 이게 인사과장이 말한 경우인가! 싶다. 거기다가 자신의 위치가 소위 말하는 졸병이 아니라는 사실이 불편했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과장이랍시고…? 집중될 직원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달호는 뒤통수에 꽂히는 배계장의 시선을 의식하며 머쓱한 기분으로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때,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과장님! 저녁 식사 어떠세요? 해촌 다방 앞입니다.”
7급 직원 박문수다. 달호는 얼른 박문수의 자리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것 같은 데, 그새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달호도 어정쩡한 기분이었는데, 잘 됐다 싶다.
사무실을 나와 다방 쪽으로 길을 잡았다. 다방은 부산역으로 가는 이면도로변에 있었다. 그동안 두어 번 가 본 데라 쉽게 찾았다. 박문수와 같은 7급 직원 허영식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과장님, 바로 식당으로 가시지요.”
달호는 두 사람을 따라 ‘부산식당’으로 갔다. 달호가 부임하자마자 과원들이 환영회를 베풀어 준 곳이었다. 여사장은 젊은 총각과장님 오셨다면서 사람 좋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박문수와 허영식 두 사람은 7급 직원이긴 해도 나이는 달호 보다 열두 살이나 많았다. 달호와는 띠 동갑인 셈이었다. 지방사무소 기준으로 보면 연령과 직급이 평균 수준이었다. 식사와 더불어 몇 잔씩의 술도 서로 주고받았다.
“과장님! 이번 승진 심사 때는 우리 허박사 확실하게 밀어 주셔야합니다.”
객지에서 고생이 많다느니, 저녁시간은 주로 어떻게 보내느냐? 등등,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간을 끌다가, 문득 박문수가 곁에 앉은 허영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6급 이하 직원들의 승진은 본부에서 인원을 할당받아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승진시키고 있었다.
“언제? 승진심사가 있어요?”
“아니, 과장님께서 아직 모르십니까? 직원들 사이에는 벌써 소문이 파다한데…!”
“네, 전 아직 못 들었습니다.”
달호는 곧이곧대로 사실대로 말했다. 누구에게도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추석 지나면 곧 심사한답니다. 과장님께서는 당연직 승진심사위원이시니까, 꼭 우리 허 박사 챙겨주셔야 합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런 사석에서야 형님들 아니세요?”
달호는 될수록 친해지는 게 좋겠다 싶어 평소 생각을 얘기했다. 큰 형님뻘인 분들이 꼬박꼬박 존칭어로 대하는 게 엄청 불편했다.
“글세, 그게 쉽지 않네요. 그러다 자칫 실수하기 쉽고…?”
박문수는 몇 잔의 술기로 발그레해진 얼굴이었다. 곁에 앉은 허영식은 자신의 일을 대변해주는 박문수가 고마운 표정이다.
“과장님, 이 허 박사는 너무 얌전해서 탈입니다. 뚱땡이한테도 한 번 찾아가야 할 건데…, 워낙 고지식한 양반이라 손을 못 비벼요. 옆방에 있는 정철우는 그런 거 아주 귀신인데…! 거기다 살살이 고향선배까지 있으니 그 친구 요즘 손금이 닳을 지경일 거야?”
박문수가 활달하게 이야기했다. 달호는 뚱땡이는 소장을 지칭하는 말인 줄 알겠는데, 살살이는 알 수가 없어 웃으면서 되물었다.
“살살이가 누구세요?”
“아, 과장님, 아직 모르시는구나. 배 계장님 별명이 살살입니다. 비비는 데는 한 소질하지요. 이 양반이 정철우 고향선배랍니다. 그러니까 살살이 그 양반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직원보다 고향후배 챙기는 데 더 신경 쓴다니까요”
“그래요? 전 그런 얘기 오늘 처음 듣습니다.”
“아 참, 과장님, 살살이 계장님 꾀가 조좁니다. 워낙 꾀보이자 모사꾼이기도 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칫 덫에 걸릴 수도 있어요. 가끔씩 좀 야비하다 싶은 구석도 없지 않으니까요.”
박문수는 어느새 술이 제법 오르는 기색이다. 허영식은 박문수가 무슨 실수라도 할까? 싶은지, 말을 꺼낼 때마다 만류하려 들었다. 달호도 제법 술기가 느껴진다.
식당을 나온 셋은 부산역광장 쪽으로 걸었다. 박문수가 한 잔 더 하자면서 2차를 제의했으나, 달호와 허영식이 말렸다. 택시 승강장에 이르자, 허영식은 달호를 밀어 넣듯 앞선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운전수에게 던져주었다.
달호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면서 당연히 본부에 근무하게 될 줄 알았다. 지금까지의 선례로 보나 자신의 경력으로 보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지방근무라니?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지방사무소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과장이라는 직책이 무엇보다 어색했다. 본부 인사과장은 보직을 명하는 당일에야 달호에게 말했다.
“강사무관, 당분간 지방근무 좀 해줘야겠어. 길어야 1년이야.”
“네? 제가요?”
“부산사무소야. 갑자기 그곳에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일이 약간 꼬였네. 내 틀림없이 6개월, 아니 1년 안에 본부로 부를 테니까. 당분간만 고생 좀 해주시게”
인사과장은 이미 결정을 다 해놓고는 새삼 부탁한다고 했다. 달호는 내심 마뜩찮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어찌 해 볼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지방사무소에 부임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과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온 달호는, 사무실내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우선 사무실내에서 가장 어렸다. 그럼에도 직책은 과장이라니…? 행정고시를 패스한 달호의 직급에 맞는 자리는 과장밖에 없었고, 이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함께 하기 힘든 존재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모두 달호를 어렵게 생각했다. 행시를 패스한 젊은 엘리트 과장에게 혹시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다, 자신들보다 나이 어린 상관 밑에서 일한다는 생각을 미처 해보지 않았다는 점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앞으로 젊은 과장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해 가느냐? 가 모두의 관심이자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정말로 힘 드는 건 달호 쪽이었다. 다른 과장님이나 계장님들은 거의 아버지뻘이었고, 직원들도 빠짐없이 형이나 누나뻘이었으니 모든 일이 불편했다.
그러니 매사를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자칫 실수를 하더라도 어리광이나 애교로 봐주겠지? 했지만, 과장이란 직책 때문에 말 한마디 붙이기도 만만찮았다. 군대 가기 전에, 몇 달간 근무해봤던 본부생각이 났다.
그때는 같은 고시동기생들이 있었다. 나이니 출신대학이니 따질 것 없이 동기라는 이유만으로도 서로가 상의하고 의논하는 상대가 되어주었다. 업무도 신규로 온 실무자이니 윗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우선이었고, 어쩌다 본의 아닌 실수를 하더라도, 신입이 그렇지 뭐! 하며 감싸주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중견간부로서 한 과를 대표하는 과장이었다. 자연히 다른 과장님들과의 업무협조나 소통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직원들의 사기진작이나 서로 간에 화합을 다지는데도 앞장서야 했다.
부임한 첫날! 다른 과장들과 함께 간부회의를 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소장은 달호에게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물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나이까지 확인하더니 느닷없이 부속실 여직원을 불러 본부 인사과장에게 전화연결을 하라고 했다. 이윽고 전화를 바꿔 받은 소장은 전화기에다 대뜸 기차불통 삶아먹은 것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어이, 김 과장, 이럴 수가 있어? 지방사정 뻔히 알면서 이런 애송이과장을 보내면 여기 일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뭘 알아야 일을 시킬 것 아닌가? 공부만 잘했다고 일도 잘하나?”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소장 말마따나 애송이가, 과장이랍시고 부임해 왔으니, 소장의 심기가 불편해 진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장은 몇 마디 더 화난 음성으로 투덜대더니 전화를 끊었다.
“자네, 아니 강 과장! 여긴 본부하고는 달라. 일하는 스타일도 다르고…, 질도 달라. 법과 원칙만으로는 안 통하는 일도 현장에는 많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야 돼. 말하자면 현장의 노하우라는 게 필요하다 이 말이야. 때로는 요령도 필요하고.”
달호는 갑작스런 상황에 멈칫했다. 스스로 선택해 온 것도 아닌데…! 거기다 마치 자신으로 인해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소장의 말이 뭘 말하는지 이해를 할 것 같으면서도 좀 어리둥절했다. 법과 원칙보다 중요한 게 요령이라?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군대에서도 종종 그런 얘길 들어오지 않았던가! 공무원이 하는 일이야 법과 원칙대로해서 잘못 될 일이 뭐가 있을까? 도 생각해보았지만,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를 소리다.
그 자리에서 소장은 새로 부임해 온 우리 강 과장 환영회를 하자고 즉석 제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다. 소장이 자주 찾는다는 불고기집으로 갔다.
달호는 회식시간 내내 맹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많은 기대를 갖고 갔다. 의사소통과 업무협조는 이런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교과서적인 생각도 했다. 그래서 회식자리가 상당히 부드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년을 1년 정도 앞둔 소장의 화제꺼리는 다양했지만,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었고, 소통과 협조의 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시종 소장 혼자서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부터 오늘까지 공무원으로서 근무한 경험부터 시작하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뚱땡이란 별명답게 술과 고기도 쉼 없이 들이키는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 과장들의 태도였다. 소장과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동년배들이었다. 하지만 직급의 차이에서 오는 조심 때문인지, 주로 소장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근무시간 중의 경직된 분위기 그대로였다. 과장들은 간혹 몇 잔씩 마신 술기운으로, 낯 간지러운 아부성 발언으로 장단이나 맞춰주는 격이었다.
급기야 소장의 화제는 옛 동료들을 폄하하거나 씹기 시작했다. 누구는 신통찮은 녀석이 백 그라운드를 이용해서 요직으로만 옮겨 다녔다느니, 어느 누구는 물품구매업무를 담당하며 뇌물 좋아하다가 중징계를 받았다느니 하는 과거역사를 시시콜콜히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술판이 제법 어우러지자, 주인집여사장이 자진하여 동석했는데, 듣기 거북한 성적농담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 하나같이 달호를 의식하는 눈치였다. 자식보다도 더 어린 과장과 동석하여 야한 농담을 주고받는 게 부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는 달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몇 번의 회식이 더 있었지만, 결례를 무릎 쓰고 빠지거나, 참석하더라도 금방 빠져나오곤 했다. 소장이나 다른 과장들에게도 그게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달호는 애초부터 공무원이 되고자 한 것 아니었다. 굳이 학창시절부터의 꿈을 들먹이자면 글 쓰는 작가가 되는 일이었다. 중‧고 시절부터 다른 과목은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고, 유독 글쓰기만은 취미이자, 특기였다. 교내 백일장이나 지역의 문화‧예술축제에서 글 쓰는 일로 심심찮게 입상을 한 데다 전국단위의 글쓰기 대회에도 이름을 알린 경우가 더러 있다 보니 스스로는 물론, 친구나 선생님들도 으레 그런 방향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도 별 고민 없이 국문학과를 택했다. 장래 취직을 목표로 대부분의 친구들이 상대나 공대로 진학을 원했지만, 달호는 으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무슨 사명감이라도 있는 듯 주저 없이 택했다. 대학도 서울의 명문대 진학은 아예 꿈도 못 꾸었고, 간신히 수도권 도시의 사립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하고 보니 세상은 생각해왔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 1학년은 어영부영 그야말로 프레시맨 기분에 들떠 별 생각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1학년을 마쳐 갈 무렵부터 친구들은 각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졸업 후 취직걱정이었다. 국문학과 출신들의 취업률은 전국 어느 대학에서나 거의 최하위수준이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취직할 데 없을까…?’
입학할 때, 훤해보였던 장래가 회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기자, 교사, 출판사, 등등의 분야를 희망했었지만, 만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달호도 마찬가지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친구들의 반 정도는, 전공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취직관련 서적을 껴안고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나머지 절반 중 다시 반 정도는 아예 병역문제부터 해결하려는 친구들 부류였고, 나머지는 오직 전공분야 외길로 갈 거라며 열을 올렸다.
달호도 이런 친구들과 꼭 같은 고민에 빠졌다. 글쓰기 재주가 취업문을 뚫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점도 충분히 인식했다. 선배들은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교원순위고사를 준비하는 게 최상이라는 충고를 해줬지만, 달호는 그 분야도 자신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의욕마저 생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군 입대를 생각했다. 여유를 갖고 생각해본다는 게 나름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셨다. 수도권의 한 작은 시청의 청소부인 아버지는 자신의 남은 정년 2년 안에 학교를 마치라고 했다. 퇴직한 이후까지 아들 녀석의 학자금문제로 고민하기 싫다고 똑 부러지게 선언하셨다. 젊은 시절, 고향읍내에서 건축업을 해 오다가 IMF라는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 후 용케도 한 10여 년 전에, 청소부가 되어 경상도에서 서울 아닌 수도권으로 올라오셨다.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릴 적 고향친구가 시청에서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기에, 그야말로 용케 청소부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달호도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다.
이런 저런 고민으로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학교 게시판에서 연간공무원채용계획공고를 보게 되었다. 미리부터 준비하던 친구들이 더러 있었기에, 처음 보고 듣는 내용이야 아니었지만, 이곳저곳 안테나를 세우던 때라 그랬는지 혹시나 하며 꼼꼼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 도서관에서 잘 보이지 않던 고시준비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기차게 자리를 고수하며 두꺼운 책과 씨름하는 모습들이 대단하다 싶었다.
며칠을 탐석하듯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에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아무리 적게 보아도 서른을 훌쩍 넘어 보이는 늙은 학생이었다.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그의 책상위에는 자신의 앉은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치 바리 케이트를 치듯, 책들을 쌓아놓고 있었다. 좌석도 누구도 범접치 못하게 마치 전용석인 양 사용하고 있었다. 달호는 책만 보고도 기가 꺾였다. 여러 차례 기회를 살피던 달호가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선생님! 저…! 잠깐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공부를 얼마동안 하셨는지?”
몸은 90도로 허리를 굽혔지만, 말은 외려 되바라진 물음이 나와 버렸다. 그러자 석간신문을 읽고 있던 그 사람은 처음 웬 놈인가? 하며 사뭇 화난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의외로 어리고 앳된 학생이란 점을 알고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었다.
“고시공부! 십년 이상 했지. 그런데 왜 그래? 젊은 친구가”
음성도 완전히 중년 아저씨 스타일이었다.
“저도 고시공부 좀 해볼까? 해서요”
달호의 대답은 스스로도 당돌했다. 솔직히 이것저것 재보기만 했지 한 번도 고시공부해 보겠다! 며 결심을 굳힌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위직급도 어렵다는 데 감히 고시라니? 스스로도 맹랑하다 싶은 대답이 아닌가! 그러자, 늙은 학생은 다시 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일어섰다. 그리고는 옥상으로 가자고 했다.
“학교 졸업도 미룬 채, 군대 갔다 오고, 올해로 5년째 공부하고 있지. 그러니까 고시에 뜻을 두고 시작한지 11년짼가? 이젠 옛날처럼 공부도 되질 않아…!”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날 저녁 달호는 그와 같이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는 지나온 이야기들을 친구에게 하듯 풀어놓았다.
어릴 때는 제법 수재소리를 들었는데, 대학입시부터 꼬이기 시작했지. 소위 명문대에 응시했다가 몇 차례 낙방하고는 우리대학으로 왔고, 고시도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이제는 고시한테 잡힌 포로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라며 고시 이거, 잘되면 다행이지만 잘못되면 큰일이니 신중하게 생각하라고도 했다.
어차피 아버지의 엄명 때문에 군대 자원입대는 틀렸다. 그러니 대학을 쉬지 않고 다니되, 취업하기 위한, 다시 말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볼까? 싶었다. 아버지도 적극 찬성일 게 뻔했다. 그리고는 늙은 학생의 경험담을 꼼꼼히 생각해봤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뭣 때문에 저리도 많은 책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속된 말로 '간이라도 보자!' 며, 과목당 기본서 한권씩의 책을 구입했다. 늙은 학생에게서 소개 받은 책들이었다. 해 보다 정 안되면 때려치우지 뭐! 하는 생각이었다. 쉽지는 물론 않겠지만, 매달려보자 싶었다. 주위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전공과목 강의실에 가 도강도 해보며 하나라도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차츰 공부습관과 요령이 붙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범하기 쉬운, 대충 아는 걸 모두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학과공부는 낙제를 면할 수준까지만 했다.
봄이 가고, 가을이 갔다. 그리고 또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갔다. 어느덧 4학년이 되었다. 그해 봄에 행정고시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누구나처럼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응시를 해 봐야했다. 1차만이라도 합격하면 부모님들이나 주위에 체면이 서겠다며 스스로 자위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예 기대하지 않았던 2차까지 단숨에 합격을 해버렸고, 내친김에 최종관문까지 통과했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법대나 상대 등 관련학과 학생도 아닌 국문학과 학생이 그것도 재학 중에 일반 행정부문에 덜컥 합격하다니!
학교 내 주요건물에는 ‘국문학과 강달호군 행정고시 최종합격!’ 이란 현수막이 내걸렸다. 몇 장인지 꽤나 많은 숫자였다.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가 한두 명씩 합격자가 나오다가 최근에는 그마저 2년 연속 끊겼던 대학에서, 그것도 국문학과에서 나왔으니 한마디로 이변이었다.
그날부터 달호는 학교 내에서 단연 유명 인사가 돼버렸다. 고시준비동아리회원들은 합격경험담을 듣겠다! 며 특별강사로 초빙했다. 교내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달호를 특별게스트로 초청하려고 각축했다. 나중에는 지역사회에까지 이 사실이 알려지자 지역신문에서도 화제의 인물로 선정하여 특별인터뷰 요청이 오기까지 했다.
달호로서는 이런 초청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학우들의 고시공부를 돕는 일이라며 권유하는 데는 발을 뺄 재간도 명분도 없었다.
달호는 떼밀리다시피 강연장이나 인터뷰에 응했지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때 생각난 게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었다. 운이 일곱이었고, 실력은 삼에 불과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운이 좋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은 ‘운도 실력이 있어야 따라오는 법!’이라며, 마치 달호가 실력은 물론, 겸양의 미덕까지 갖춘 학생이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사실, 달호는 합격 비결이라 할 만 한 게 있을 리 없었다. 낙방의 경험이 많을수록 합격담도 도움이 될 것일 텐데…, 달호의 경우와는 전혀 딴판이 아닌가!
억지로라도 굳이 이야기하자면, 자칫 건방지고 역설적인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여러 권의 기본서 대신 한권이라도 정확하고 깊게 보았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싶었다.
거기다 또 한 가지만 더 든다면, 주관식 논술문제가 중요한데 이는 많이 읽고 쓰는데서 비롯된다고 누구나 하는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별로 할 말이 없어 스스로도 웃긴다 싶은 말을 하고는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다. 합격비결치고는 잡담수준을 넘지 못했으니 스스로도 창피했다. 나중에는 부끄러워 아예 초청을 거부하고 말았다.
추석연휴가 다가오자, 사무실 안도 분주해졌다. 연휴를 무사히 넘기기 위한 준비사항도 많았다. 연휴기간동안 있을 수 있는 각종 안전사고에 대한 예방과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등에 대처하는 매뉴얼을 보완하고 교육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울러 밀려있는 각종 민원해결이 급선무였다. 보건과 위생에 대한 민원은 명절의 특성상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기에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소장이 강 과장을 불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느닷없이 불려간 당호에게 소장은 K음식점의 식재료원산지표시위반으로 부과된 과태료부과처분취소청구소송에 대한 답변서를 잘 준비하라고 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 이게 무슨 뜻인가 싶었지만 더욱 확실하게 하라는 취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날 오후 배 계장이 작성해 온 답변서를 검토하던 달호는 의아했다. 답변서가 엉성하고 애매모호했다. 마치 과태료처분에 무리가 있었다는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적시해가며 재검토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튿날 배 계장은 이게 소장의 뜻이니 그대로 다시 결재를 올리자는 것이 아닌가!
“과장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살다보면 소도 보고, 중도 만난다고 하잖습니까? 어디선가 소장한테 압력이 들어온 것 같기도 합니다만”
달호는 찜찜하고 불쾌했다. 가만있기도, 그렇다고 정면으로 되받기도 난감했다. 달호는 답변서 제출 기일을 생각했다. 추석연휴가 끝날 때까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다시 검토해보자고 했다. 혹시 그 동안 소장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가져보고 싶었다.
대신 달호의 추석기분은 완전히 구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요령이고, 현장의 노하우일까? 기이하게도 안달하는 달호와는 달리 배계장도 조용했고, 소장도 별말이 없었다.
달호의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사무실내 분위기는 역시 추석명절이다 싶었다. 직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도 어딘지 명절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추석에 주고받을 선물이며, 연휴계획이야기로 모두가 조금씩 들떠 보였다.
달호에게도 공무원이 된 이후 처음 맞는 추석이었다. 미리미리 차표도 구입하고 연휴 때 해야 할 성묘나 인사할 데를 꼼꼼히 체크했다. 연휴전날에는 간단한 여행 백을 챙겨들고 출근했다. 근무를 마치고 곧장 밤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하루 종일 퇴근시간이 기다려졌다. 어린아이 시절의 추석이 생각났다. 대학을 마치고 군대까지 다녀왔지만, 그 때의 설레던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퇴근시간! 달호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추석연휴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해방된 기분이었다. 역 광장 입구에서 내려 시간을 체크해가며 걸었다. 탑승구가 있는 2층으로 가기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서는 게이트를 지나 곧장 탑승구 쪽 로비를 걸었다.
“과장님, 딱 시간 맞춰 오시네요.”
인사말에 놀라 고개를 들자, 배 계장이 달호의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달호가 한 걸음 멈칫 비켜섰다.
“여긴 웬 일이십니까?”
“네, 과장님, 사무실에서 드린다는 게 깜빡했습니다. K음식점에서 과장님께 추석인사차 가져온 게 있어 뒤따라 왔습니다.”
그러면서 배 계장은 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달호의 윗옷 주머니에다 강제로 집어넣었다.
“과장님, 소송 건 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연휴 잘 보내고 오십시오. 전 그만.”
배 계장은 허리를 굽실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이트 쪽으로 잽싸게 걸어 나갔다. 나이 새파란 젊은이에게 늙수그레한 사람이 허리까지 굽히는 걸 지나치는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호기심이 이는 듯 바라보았다.
마치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했다. 달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출발할 시간이다.
‘갔다 와서 나중에 이야기하자‘
혼자 생각하며 KTX를 타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해당열차에 올라 자리를 확인하자, 기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윗저고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조금 전 배 계장이 찔러 넣고 간 봉투가 주머니 밖으로 반 쯤 보였다.
봉투를 꺼냈다. 밀봉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열린 봉투 안에는 십 여 장도 넘어 보이는 백화점 상품권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며 달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
투고자 약력
성명 : 김 길 수
주요약력 : 공무원문학 신인상(2001), 한국문인협회 및 부산문인협회 회원(소설분과), 연제문학회 이사, 부산수필문학회원. 공무원문학협회회원, 행자부공무원문예대전(단편소설 최우수,2001) 산문집 「가보지 않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