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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5강 -1(2009.09.07)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선 채로 삼배의 예를 올리겠습니다. (삼배)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잠깐 입정을 하겠습니다. (입선 죽비) (방선 죽비) 큰스님 법문 14-2 사람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 却見乘境底人(각견승견저인)하니 是諸佛之玄旨(시제불지현지)라 佛境不能自稱我是佛境(불경불능자칭아시불경)이요 還是這箇無依道人(환시자개무의도인)이 乘境出來(승경출래)니라 若有人出來(약유인출래)하야 問我求佛(문아구불)하면 我卽應淸淨境出(아즉응청정경출)하고 有人問我菩薩(유인문아보살)하면 我卽應慈悲境出(아즉응자비경출)하며 有人問我菩提(유인문아보리)하면 我卽應淨妙境出(아즉응정묘경출)하고 有人問我涅槃(유인문아열반)하면 我卽應寂靜境出(아즉응적정경출)하야 境卽萬般差別(경즉만반차별)이나 人卽不別(인즉불별)이라 所以應物現形(소이응물현형)은 如水中月(여수중월)이니라. 우리가 공부하는 이 임제록은 전통 한국불교의 宗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비단 조계종 뿐만 아니고 한국 불교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정말 과거의 우리 선사 스님들의 피나는 정진과 깨달음과 또 거기에 대한 고준한 사상을 올곧게 아주 고집하면서 내려오다가 근세에 와서 이제 이런 저런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서 종파가 많이 생겼죠. 종파가 많이 생긴 것이 기껏해야 백 년 이내입니다. 백 년 이내고 근래에 많이 생긴 것은 기껏해야 이삼 십년 이내에 갑자기 그렇게 이삼 십년 사이에 많이 불어나고 좀 오래된 종파라 그래봐야 백 년 안됐어요. 그럼 그전에 모두 우리 선사 스님들이 불교를 전래해 오고 또 우리나라에서 가꿔가고 스스로 아주 배불정책을 맞으면서도 피나는 그런 정진을 하고 했던 그런 노력이 밑바탕에 좍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뭐 전통 종단은 조계종인데 기타 이제 군소종단이 많이 생기긴 했습니다마는 그래봤자 우리 전통 불교의 한 가지고 작은 이파리고 뭐 그저 그런 정도지요. 그렇다면은 전체 한국 불교를 우리가 굽어볼 때 그 연원 그 뿌리는 사실 우리의 임제선맥을 뿌리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서두에 내가 유인물로서 사찰마다 비석에 모두모두 임제스님의 몇 대 손이라고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임제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기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모두가 그 불교에 대한 지식도 불교에 대한 깨달음이 뭐 얼마가 됐든지간에 그 작은 지식과 작은 깨달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임제스님의 그런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는 거죠. 그건 뭐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임제록이 우리 한국 불교의 종전이 저절로 돼 있습니다, 뭐 우리가 우정 법으로 정하진 않았지마는 사실상으론 그렇게 宗典이 돼있고 또 거슬러 올라가면 육조단경도 우리가 宗典으로 여겨야 할 그런 책이죠. 왜냐하면은 우리 육조스님을 우리 전통 한국불교의 종맥에서 볼 때 아주 큰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록으로서는 사실 그래요. 어록으로서는 육조단경하고 임제록하고 이 두 가지를 꼭 우리 전통 불교 교육의 교과서로 들어있어야 되고 또 종전으로 여겨야 할 그런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제대로 연구되고 또 살펴서 제대로 정하지를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불교가 제 궤도에 오른다면은 그런 것들도 우리가 잘 연구하고 살펴서 종전으로 그렇게 정해서 필수과목으로 삼아서 공부하도록 해야 할 그런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오늘 공부할 것도 제가 미리 예습을 해 보니까 그 안목이 너무 고준해서 그동안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불교하고는 전혀 차원이 달라요. 그래서 사실은 보통 상식적인 불교의 입장으로 참 읽기도 겁이 나고 남 앞에서 말하기도 겁이 날 그런 아주 과격한 표현들이 적지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참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또 그리고 아무리 높은 조사 스님이다 부처님이다 하더라도 그 역시 인간이다 하는 담대한 마음 자세로서 우리가 수용을 해야 할 입장이긴 하지마는 그렇더라도 이제 사실은 우리 보통 상식이라는 게 또 있고 해서 그래서 이런 것들로 우리가 수행을 참 제대로만 하면은 우리 마음이 끝없이 넓어지고 또 불교에 대한 안목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공부는 44쪽 14-2 사람에 따라 모습을 나타낸다 이런 제목을 붙혀봤습니다. 이런 제목은 제 나름대로 그냥 이렇게 참고로 제목을 단락을 나누고 제목을 붙힌 것입니다.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 却見乘境底人(각견승견저인)하니, 乘境底人을 도리어 보니 살펴보니 이런 말입니다. 乘境底人, 경계에 오른 사람 이런 말입니다. 경계를 쫓아가는 사람을 살펴보니. 그렇죠 우리 모두가 경계를 쫓아갑니다. 이 시간도 이제 임제록이라고 하는 경계를 쫓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경계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경계를 쫓아가는 그 사람이 중요하다 하는 그런 뜻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렇죠. 전부 경계 쫓아가는 삶입니다. 불교는 그 근본을 지키고 근본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가르침이죠. 그것은 내 자신이고 나의 본래인이고 그 나머진 전부 경계다. 경계를 쫓아가고 경계를 어떻게 바로잡고 경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꾸미고 하는 것은 이건 끝이 없다, 답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내 주인공 내 본래인을 인식을 해서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내 살림살이로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삼으면은 뭐 모든 문제 해결이다 이거죠 기조가. 是諸佛之玄旨(시제불지현지)라, 그 사람을 살펴보니 경계를 쫓아가든 말든 그 경계를 쫓아가는 그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니 是諸佛之玄旨,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아주 현묘한 뜻이 그속에 있다 이말이에요. 경계가 있다는 게 아니고 사람이 있다 이겁니다. 사람에 諸佛之玄旨가 있다. 그런데 부처의 경계라 하더라도 부처님 경계, 경계 중에선 아주 최고급 경계죠, 佛境(불경), 하는 것이. 최고급 경계지마는 그 부처의 경계라고 하는 것도 뭐라고? 不能自稱我是佛境(불능자칭아시불경), 능히 스스로 부처의 경계라고 칭하지를 않는다 칭할 수가 없다. 언제 뭐 내가 부처다, 나의 경계는 우수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게 정했지. 내가 부처라고 인정하고 그렇게 내 의식 속에서 부처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전부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도 우리 깜냥대로 이해해요, 전부 우리 속에 부처님에 대해서 이해하는 게 각각 다릅니다. 기독교인이 부처님 보는 거 다르고요 우리 불교인도 불교를 얼마나 이해하느냐 또 성격이 어떠냐 여기에 따라서 다 부처님이 다릅니다. 그럼 결국은 부처님은 경계가 없는 거요. 우리가 만든 거에요 그냥. 각자가 만든 그 경계라 그 말 아니겠어요? 참 이런 말 한마디만으로도 아주 대단합니다. 佛境은 不能自稱我是境界다, 나는 부처의 경계다 라고 누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거요. 그냥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리 의식 속의 부처님이지. 還是這箇無依道人(환시자개무의도인)이, 또한 이 無依道人,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 우리 본래인입니다, 우리들 자신이에요. 궁극적 자신 우리들의 내면의 나죠. 그가 乘境出來(승경출래)야, 경계를 따라서 나왔어. 경계를 따라 다녀 그만. 乘境 하는 것도 따를 隨 자로 보아도 좋아요. 따라다니나 타고다닌다 이 乘 자가 더 강하죠. 경계에 올라서 다니니까. 경계를 쫓아다니는 것은 좀 덜한데 이건 乘境 했으니까 경계에 올라서 다니니까, 말을 타듯이. 승마하듯이 경계에 올라서 다닌다, 나왔다. 若有人出來(약유인출래)하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와서 問我求佛(문아구불)하면, 나에게 부처 구하는 것을 물으면은, 사람들이 전부 경계 쫓아다니기를 좋아하니까 我卽應淸淨境出(아즉응청정경출)하고, 나는 부처를 물으니까 부처는 아주 뛰어난 경계거든요, 그러니까 淸淨境, 아주 뛰어난 경계에 맞추어서 내보이고, 그 말입니다. 아, 부처는 이런 것이야 이런 것이야… 또 有人(유인)이 問我菩薩(문아보살)하면, 보살의 의미는 일단 자비죠. 자비, 자비심으로서 모든 사람을 대하는 정말 利他行의 화신이 보살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을 물을 것 같으면은 我卽應慈悲境出(아즉응자비경출)이라, 자비의 경계에 맞추어가지고서 내논다, 아 자비는 이런 것이고 보살은 이렇게 모든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그저 위해서 사는 그런 게 보살이야 이렇게 유도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또 有人問我菩提(유인문아보리)하면, 菩提는 뭡니까? 깨달음 또는 道 그러죠. 그렇게 하면 역시 淨妙境(정묘경)에 맞춰서 나는 곧 그 정묘한 경계, 아주 청정하고 묘한 경계에 맞춰서 내놓고 내 보이고. 또 有人問我涅槃(유인문아열반)하면, 또 누가 열반을 묻는다 그러면 我卽應寂靜境出(아즉응적정경출)이라, 열반은 고요한 거니까. 번뇌가 다 잦아든 다 사라진, 그래서 아주 어떻게 보면 식은, 불이 꺼져서 싸늘하게 식은 재와 같은 그와 같이 고요한 그런 경계니까. 그래 그것을 내보인다 이거죠. 그래서 境卽萬般差別(경즉만반차별)이나, 경계인즉슨 만가지로 차별하지마는 人卽不別(인즉불별)이라, 사람은 경계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또 나에게 물어오는 어떤 문제를 들고 오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늘 한결같애. 그 사람은 그 사람, 사람이야. 내가 보기에 어떤 근기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의 그, 본래인입니다 이거는, 본래인. 내가 이 본래인이라는 말을 쓰는데 뭐 임제스님의 표현에 의하면 무위진인이 되겠죠, 무위진인. 또 궁극적 사람. 이렇게 차별된 사람 말고. 人卽不別이라, 다르지 않다 이거죠. 우리는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이거 참 제일 중요한 거죠 뭐. 차별없는 참사람, 여기 뭐 無位眞人 딱 맞네요 차별없는 참사람 人卽不別이라. 말을 바꿔놔서 그렇죠. 所以(소이)로 應物現形(응물현형)은, 사물에 맞춰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如水中月(여수중월)이니라, 물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임제스님께서 뭐 이러구 저러구 사람의 어떤 문제의식 또는 그 수준 또는 인연, 어떤 상황, 거기에 맞춰서 대개 법문을 하는 것은 그건 모두가 방편이다. 그야말로 하늘에 있는 달을 봐야 옳은데 이것은 이제 水中月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달 그림자죠. 부처니 보살이니 또 보리니 무슨 열반이니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은 전부가 뭐라고? 방편이다 하는 것입니다. 전부가 방편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제 사람에 맞추어서 내놓는 하나의 경계일 뿐이다. 14-3 大丈夫(대장부) 道流(도류)야 儞若欲得如法(이약욕득여법)하면 直須是大丈夫兒(직수시대장부아)라사 始得(시득)다 若萎萎隨隨地(약위위수수지)하면 則不得也(즉부득야)니라 夫如[斯머리 瓦]嗄之器(부여시사지기)는 不堪貯醍醐 (불감저제호)니 如大器者(여대기자)는 直要不受人惑(직요불수인혹)이라 隨處作主(수처작주)하야 入處皆眞(입처개진)이니라. 但有來者(단유래자)어든 皆不得受(개부득수)니 儞一念疑(이일념의)하면 卽魔入心(즉마입심)이라 如菩薩疑時(여보살의시)에 生死魔得便(생사마득편)이니라 但能息念(단능식념)이요 更莫外求(갱막외구)하고 物來卽照(물래즉조)하라 儞但信現今用底(이단신현금용저)하면 一箇事也無(일개사야무)니라 儞一念心生三界(이일념심생삼계)하야 隨緣被境(수연피경)하야 分爲六塵(분위육진)하니 儞如今應用處(이여금응용처)가 欠少什麽(흠소십마)오 一刹那間(일찰나간)에 便入淨入穢(변입정입예)하며 入彌勒樓閣(입미륵누각)하며 入三眼國土(입삼안국토)하야 處處游履(처처유리)하나 唯見空名(유견공명)이니라. 그 다음에 이제 大丈夫라고 했어요 대장부. 道流(도류)야,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그대들이 若欲得如法(약욕득여법)인댄, 그대들이 만약에 여법함을 얻고자 한다면, 如法, 진리와 같은. 또 이치와 같은. 여기 如法이란 말이 참 좋죠. 우리가 여법하게 산다 그런 것도 아주 그 어떤, 승려라면은 승려의 어떤 생활 규범에 맞춰서 사는 것을 우리가 여법하게 산다, 이럽니다. 여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치대로 법대로 또 진리 그대로 함을 얻고자 할진댄 直須是大丈夫兒(직수시대장부아)라사, 대장부라야 바로 대장부라야 始得(시득)다, 비로소 된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우리나라 불교가 우리나라 스님들이 임제스님을 좋아하고 임제 사상을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은 아주 다이나믹하고 파워가 넘치는 임제스님의 어떤 그 정신, 그야말로 청천백일에 맑게 개인 그런 하늘에 푸른 하늘에서 그냥 벼락을 치는 듯한 그런 아주 그 파워, 힘, 용기. 임제스님은 보면 아주 새색시 같이 생겼어요. 전래된 그 얼굴을 보면은. 여기 나와 있죠 임제스님의 그림이. 없나? 아 여기 앞에 있네요. 뭐 그림이 사실인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그림이 옛날부터 전래되어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아주 뭐 그렇게 고울 수가 없고 연약해보이고 새색시 같은데 그 정신만은 정말 청천에 벽력을 치는 듯한 그런 정신의 소유자라. 그래 우리나라 스님들이 그걸 좋아한 거 같애요. 그래 여법하고자 할진댄, 그러니까 어떤 부처다 중생이다, 뭐가 깨달음이냐 뭐가 불교의 진실이냐 하는 이 사실을 알고저 한다면, 이 말입니다 여기 여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려면 바로 모름지기 대장부라야 된다. 대장부라야 된다. 그래야 된다 말야. 若萎萎隨隨地(약위위수수지)하면, 이건 뭔고 하니 뭐 시들시들하고 또 어름하고 용기없고 자꾸 기어들어가고 그게 아니고 자신있게 앞으로 팍팍 나서고 모르는 건 모르고 아는 건 알고, 뭔가 그런 어떤 상태. 사람도 왜 시들시들해 보이는 사람이 있죠. 萎(위)란게 이게 시들었단 소리에요. 식물이 예를 들어서 여름날에 풀을 뽑아 놓으면은 금방 시들잖아요. 그런 모습을 지어가지곤 안된다 이거야. 則不得也(즉부득야)니라, 그래가지곤 안된다. 불교 공부할려면은 이게 사람 人 변에 일찍 曾이라고 했잖아요 승가라고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 어떤 사람보다도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 다시 말해서 평범한 세속인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 그러니까 이게 시들시들하고 어름해 가지고는 이게 될 일이 아닌거야. 눈이 반짝반짝하고 또록또록하고 뭐 꼭 지식 많아서 그런 게 아니고 정신이 그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정신이. 여기보면요 夫如[斯머리 瓦]嗄之器(부여시사지기)는, 깨진 그릇이란 말입니다, 시사지기, 예컨대 시사지기 깨진 그릇에는 不堪貯醍醐(불감저제호)니, 醍醐, 지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 제호를 담을 수가 없으니, 깨진 그릇에다 어떻게 좋은 음식을 담습니까. 금 그릇 옥 그릇 이런데다 담아야죠. 그러니까 제호라고 하는 것은 뭐야, 불법이고 불법 중에서도 아주 엑기스, 정말 이 임제스님같이 올곧게 우리에게 팍팍 찔러주는 가르침을 담을려면 이게 우리 정신 상태가 시들시들해가지곤 안된다는 것입니다. 임제록을 자꾸 읽고 공부하고 거기에 아주 심취하고 흥미를 느끼면은 사람이 저절로 명쾌해지고 용기가 생기고 좀 어떻게 보면 거만하지마는 뭐 거만한 것도 좋아요. 이런 것 보고 사람이 좀 거만해지는 건 그건 허물이 아니에요.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不堪貯醍醐, 깨어진 그릇에는 제호를 담을 수가 없으니 如大器者(여대기자)는, 예를 들어서 큰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 남녀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노소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에요 이거는. 무슨 비구다 비구니다 가리키는 것은 더욱 아니고 유식 무식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여. 大器, 큰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直要不受人惑(직요불수인혹)이라, 바로 요컨대 不受人惑,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뭐라고 꼬시더라도 뭐라고 유혹하더라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 자기 줏대를 딱 잡고 사는 사람.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 자기 소신이 확실한 사람. 그러니까 이게 말하자면 꼿꼿한 사람이고 생기 넘치는 사람이고 아주 당당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이지 시들시들하거나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그 말이 옳은가 저 말이 옳은가 이렇게 돼서는 안된다 이거죠. 그런 사람이 대장부에요. 큰 그릇이고 대장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주관이 있고 자기 소신이 딱 서있는 거, 그것도 예를 들어서 뭐 이치에 맞아야겠죠. 괜히 옹고집 부리는 그런 거 아니고 정말 제대로 된 어떤 소견으로서 그 소견에 확신을 딱 세워서 자기 인생을 자기 살림살이를 살아갈 줄 아는 그 사람을 말하자면 큰 그릇이다 또는 대장부다 이렇게 하는 거요. 隨處作主(수처작주)하야 入處皆眞(입처개진)이라, 저 앞에 한번 있었죠. 임제록의 1,2 위를 다투는 명언, 無位眞人이라든지 隨處作主 또 欠少什麽. 이런 것은 정말 뭐 무엇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지 뭐 그 순위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벌써 어줍잖은 생각입니다 사실은. 하나하나가 정말 누구도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표현들이에요. 수처작주,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임제스님 뱃속에 들어가 있어도 임제스님 뱃속은 뱃속이고 나는 나다. 수처작주. 부처님 뱃속에 들어갔어도 천불 만불이 출세했어도 그건 천불 만불 저 살림이고 나는 나야. 이런 그 소신 이런 주관 이게 필요하다는 거죠. 隨處作主하야 入處皆眞이라. 그렇게 되면 뭐라고? 서 있는 그곳 어디 있든지 간에 자기가 있는 그곳은 전부 진리야. 전부 진정한 행복이야. 참 이런 구절 하나만 임제록에서 건져도요 이건 뭐 만고의 어떤 보물을 건지는 것보다도 더 값진 일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되면 그게 大器야 큰 그릇이야. 그리고 대장부고. 但有來者(단유래자)어든, 다만 來者, 경계들, 경계가 전부 오잖아요. 예를 들어서 지금은 임제록이 나에게 왔고 추우면 추운 게 오고 더우면 더운 게 오고 또 다른 법회에서는 또 다른 게 뭐가 좋다 하고… 얼마나 그냥 반찬 차려놓은 상이 아주 화려합니까. 너무 화려하죠 불교의 반찬은 너무 화려한 거라. 그런 것들이 다 경계야, 세상일도 다 경계고. 다만 오는 것이 있으면 경계가 오는 것이 있으면은 皆不得受(개부득수)니, 모두가 거기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라. 임제스님 아니라 뭐 부처님이 오더라도 달마스님이 오더라도 그거 받아들이지 마라. 다 경계야. 來者는 전부 경계라, 오는 것은. 오는 것, 경계들이 오는 것은 皆不得受니, 미혹하지 말고 수처작주하라 이 말이여. 그대가 한 생각 의심하면(儞一念疑). 부처님이 나타났다 어디에 뭐 사리가 출현했단다 어디에 방광했단다 거기에 또 이제 흔들리는 거야. 疑라고 하는 것이. 의심한다고 하는 말은 뭐 이건가 저건가 그렇게 의심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흔들릴 것 같으면은 이미 그 사람은 곧 어떤 한 魔가 마음에 침범한 것이야 (卽魔入心). 틈이 생겼으니까. 말하자면 창문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침입한다. 몸에 틈이 생기면은 병이 침범하고 그래요. 참 한시도 우리가 마음놓고 살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알고보면은. 몸도 정말 빈틈없이 관리를 해줘야 병이 침범하지 않고 또 마음도 정말 바른 이치로서 끊임없이 우리가 다스려줘야 우리 마음을 다스려줘야 거기에 이제 삿된 가르침, 삿된 생각, 그것이 이제 침범하지 않습니다. 如菩薩疑時(여보살의시)에, 보살이라 하더라도 보살의 경계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만약에 흔들림이 있을 때 의심이 있을 시는 生死魔得便(생사마득편)이야, 삶과 죽음의 마구니가 편의를 얻어. 짬을 엿본다 이거야. 벌써 편의를 얻어 틈을 이제 노려가지고 벌써 끼어들었다 이 말입니다, 生死魔란. 보살이라도 소용없는 거요. 生死魔가 편의를 얻으느니라. 但能息念(단능식념)이요, 다만 능히 우리가 할 일은 息念, 생각을 쉬는 것이요 更莫外求(갱막외구)하고, 더 이상 달리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고. 그러니까 밖에 뭐 아무리 부처 아니라 우부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쫓아가면 벌써 그것은 틈이 생긴 것이고 그것이 마음이 흔들린 것이고 그것이 의혹이야. 不受人惑 그랬죠, 의혹이라. 의심이라 그게. 그게 이제 밖을 향해서 뭘 구할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但能息念, 생각을 쉴 것이요,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고 物來卽照(물래즉조)하라, 무엇이든지 오거든 사물이 오거든 곧 비춰봐라 네 마음으로서 네 지혜로서 한번 관조해 보아라. 부처가 오더라도 한번, 거기 빠지지 말고, 혹하지 말고 일단 한번 이렇게 거울로 비춰보듯이 잘 이렇게 살펴보고 또 보고 비춰보고 살펴보고… 이렇게 하라는 거에요. 그만 우리는 아무런 비춰보는 그런 순간도 갖질 않고 검증은 뭐 고사하고 그냥 혹하고 넘어가 버리지 말라 이말이여. 物來卽照하고, 사물이 오거든 곧 비춰보고. 그대들은 但信現今用底(단신현금용저)하면, 다만 믿어라, 뭘? 現今用底, 지금 쓰고 있는 것. 쓰고 있는 게 뭡니까? 나는 지금 말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은 말하는 소리 듣는 그 사실, 그 작용이야. 지금에 사용하고 있는 그것. 지금 작용하고 있는 그것. 그것만 믿을 것 같으면 거기에 대한 확신이 딱 서면. 아 이거야 그냥 이게 나야 이게 모든 것이야 이것이 진리고 이것이 부처고 이게 불교고 이것이 나고 이게 세상사고.. 일체가 바로 이거.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거. 그게 주인공이고 모든 것의 근본이니까. 그것만 확신을 갖게 될 것 같으면 一箇事也無(일개사야무)니라, 아무런 일도 없다. 그 외에 밖에 아무리 화려한 부처가 등장하더라도 그건 나하고 관계없는 거다 이거야. 아무런 일도 없다. 참선이 좋다 화두가 좋다 뭐 오매일여 해야된다 깨달아야 된다, 뭐 그거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에요. 사실은 이게 이제 우리의 화두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송나라 때 생겨 가지고 그걸 가지고 이제 죽 내려오다가 그게 일반화 돼 가지고 모두 이제 그것을 어떤 통과해야만, 그 관문을 통과해야만 되는 줄로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육조스님 같은 이가 무슨 나뭇꾼이 나무하러 갔다가 그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라는 말 한 마디 딱 듣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일을 마쳤는데 일 마쳤는데 무슨 그가 뭐 참선을 했어요 화두를 들었어요 무슨 동정일여 오매일여가 어디 있어 세상에. 중간에 그렇게 사실은 뜬금없이 생긴 어떤 하나의 방편이야. 그런데 그 방편을 우리가 제대로 그 과정을 내가 밟아가지고 그 코스를 다 수용하지도 못하고 그 과거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책에서 보고는 아, 이렇게 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된다 라고만 자꾸 말할 뿐이지 아무도 그 과정을 가는 사람도 없고 갈 수 있는 사람도 없어. 그저 입구에서 맴도는 거야. 계속 끊임없이 입구에서 맴도는 거야. 한 사람도 그렇게 해서 해답 얻은 사람이 없어요 사실은. 수 천명이 하고는 있어, 하고는 있지마는 한 사람도 거기에 대한 답을 얻은 사람도 없고 해결이 난 사람도 없고 제대로 되는 사람도 없어. 돼야 답을 얻을 텐데 되는 사람이 첫째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방법은요 이제 지금 할 방법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여기 보십시오, 여기. 그대들이 다만 信現今用底, 현금에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것. 보고 듣고 뭐 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우리 본래의 근본인, 본래적인 나, 본인이죠 그게. 정말 그게 본인이여. 그게 무위진인이고 그것만 우리가 확신을 가지면은 아무 일 없다 一箇事也無라. 아무런 일도 없어요. 그러니까 중간에 그런 어떤 간화선을 통해서 어떤 코스를 정해 놓고는 그 코스를 밟아야만 꼭 된다라고 하는 것은 그건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어요. 물론 그 길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마는 지금 성과를 봐서는 거의 불가능한 거요 지금 사람들의 성과를 봐서는. 왜냐하면 오십 년 동안 내가 지켜봤지마는 한 사람도 그 코스를 통과한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서 설정해 놓은 그 코스를 통과한 사람이 없어. 그것도 내 말만 듣고 옳다 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가만히 우리가 심사숙고해서 스스로 판단을 해야 할 일입니다. 결국은 어떤 현란한 선문답을 하더라도 現今用底,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것에서 떠나 있지 않습니다. 허 그 높고 높은 선문답 하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무슨 도리인지 낙처가 무언지 그래봐야 現今用底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말하고 말하는 소리 듣고 춥고 더운 거 알고 기분 나쁘면 화도 내기도 하고 즐거우면 웃기도 하고 슬프면 울기도 할 줄 아는 바로 그 당사자, 그 당사자에서 떠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오로지 그것 뿐이야. 그것이 뭐 이러고 저러고 하고 이리 표현해보고 저리 표현해보는 것이지 다른 거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대 一念心(일념심) 한 생각 마음이 生三界(생삼계)하야, 삼계를 내어서 삼계를 만들어 내놓고 우리 한 생각이 이 세상을 만들어 내놓고는 隨緣被境(수련피경)이라, 인연을 따라서 경계를 입어. 지금 우리가 임제록 공부하자 이렇게 하니까 임제록 공부하자 하는 것을 우리가 만들어 냈어요. 한 생각 만들어냈어. 내놓고는 임제록 공부하는 그 인연을 따라서 공부하는 그 경계를 입고 있어, 지금 당하고 있는 거야. 가까이로 말하면 그렇고 우리 일상생활로 돌아가면은 分爲六塵(분위육진)이니, 나눠서 여섯 경계로서 나눠지는데 육진이 뭐죠? 色聲香味觸法이죠, 말하자면 사물이라든지, 눈의 상대인 사물, 또 귀의 상대인 소리, 코의 상대인 냄새 뭐 이런 등등으로 전부 경계가 말하자면 우리 삶의 전 영역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전 영역. 나눠서 뭐 간단히 나누면 여섯 가지로 되는데 如今(여금), 그대들 지금 應用處(응용처)가, 지금 거기에 맞춰서 사용하고 있는 그것. 예를 들어서 볼 것이 있으면 보고 들을 것이 있으면 듣고 냄새 맡을 것이 있으면 냄새 맡고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고 하는 그것에서 그 사실 그 능력에서 欠少什麽(흠소십마)오, 조금이라도 부족한 게 무엇이냐. 뭐가 부족하냐.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에어컨 없어서 그게 탈이지 더운 줄 안다고 하는 그 능력에 있어서는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거야. 추우면 난방이 잘 안 돼 있는게 그게 탈이라면 탈이지 추운 줄 안다고 하는 이 사실은 엄청난 사실이거든, 엄청난 능력이야 이거. 欠少什麽오, 부족한 게 뭐냐 이거요. 그래 내가 이걸 임제 명구 중에서 欠少什麽 이걸 또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無位眞人, 또 隨處作主, 欠少什麽, 글자 넉 자 씩이지마는 하, 이 정말 엄청난 말이거든요. 現今應用處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응해서 사용하고 있는, 맞추어서 사용한다, 應用, 뭐여, 추우면 추운데 맞춰서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데 따라서 더운 것을 알고 그리고 거기서 또 한 생각 더 일으키면은 아이 덥다 에어컨 좀 틀어라 뭐 선풍기 틀어라… 이렇게 발전해 가잖아요. 얼마나 신통묘용입니까. 아주 기가 막힌 신통이지. 그런 신통 놔두고 欠少什麽오, 뭐가 부족한 게 있느냐. 또 그 어떤 사실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환하게 감지해. 참 보통 신통이 아니야, 보통 능력이 아니에요. 그렇게 감지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데 정말 무량대복이지 무량대복이야. 그것이 一刹那間(일찰나간)에, 그것이 그놈이 일찰나간에 便入淨入穢(변입정입예)하며, 곧 청정한 데도 들어가고 반대로 더러운 데도 들어가. 그렇죠 식당에도 들어가고 화장실에도 들어가죠. 入彌勒樓閣(입미륵누각)이라, 저 화엄경 입장에서 보면은 미륵누각이 이제 선재동자가 마지막 들어간 곳이야 오십 삼 선지식을 친견하고 마지막으로 올라간 곳이 미륵누각인데 미륵보살 만나려고 미륵누각에 들어갔는데 그게 최상의 정신세계, 이런 뜻이죠. 최상의 정신세계, 거기에 또 설사 들어갔다고 하자. 그리고 入三眼國土(입삼안국토)라고 하는 데도 들어갔다고 하자. 이렇게 하면서 그놈이 處處游履(처처유리)하는 거야. 곳곳에 흘러다니나. 唯見空名(유견공명)이라, 오직 헛된 이름만 볼 뿐이다 이 말이여. 그 경계들은. 들어가는 그 놈만 있지 들어갈 그 경계는 사실 唯見空名이야, 헛된 이름이다.
첫댓글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儞如今應用處(이여금응용처)가 欠少什麽(소십마)오 ㅡ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응해서 모자라는것이 뭐가 있느냐 禪慧珠보살님, 고맙습니다. _()()()_
儞但信現今用底(이단신현금용저)하면 一箇事也無(일개사야무)니라...고맙습니다. _()()()_
但信現今用底....고맙습니다._()()()_
삼배 올립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但信現今用底하면 一箇事也無니라..다만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만 확신을 가질 것 같으면 아무런 일도 없느니라..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境卽萬般差別이나 人卽不別이라...但信現今用底하면 一箇事也無니라 _()()()_
감사합니다,현금용처 흡소십마,
감사 합니다.()()()...
諸佛之玄旨 경계를 쫓아가고 경계를 어떻게 바로잡고 경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꾸미고 하는 것은 이건 끝이 없다, 답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내 주인공 내 본래인을 인식을 해서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내 살림살이로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삼으면은 뭐 모든 문제 해결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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儞如今應用處 欠少什麽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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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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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唯見空名 ... _()_
선혜주님 고맙습니다_()__()_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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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_()()()_
녹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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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