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sia Sentinel 2007-3-1 (번역) 크메르의 세계
[르뽀] 태국 왕실의 자산운용 방식 (하)
Thailand's Royal Wealth : Part 2
기사작성 : 현지 특파원
역사적 축적 과정
태국 군주 및 "왕실재산 관리국"(Crown Property Bureau: CBP)의 토지 소유 역사는 13세기에 존재했던 "수코타이 왕국"(kingdom of Sukothai)에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관념은 태국의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1800년대에 태국 왕실은 왕실 무역에서 발생한 수익 중 왕실 지출에 사용하는 내탕금(Privy Purse, 內帑金)을 설치했고, 이것이 나중에 왕족들의 교육을 위한 재정으로 운용됐다. 매년 최소 5%의 세수가 내탕금으로 할당됐다.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와 파숙 퐁파이찟(Pasuk Phongpaichit)이 공동으로 저술한 <태국사>(A History of Thailand)에 따르면, 라마 5세(쭐라롱꼰) 시대인 1890년에 내탕금 관리부서가 "내탕금 관리국"(Privy Purse Bureau: PPB)으로 승격하면서, 국왕의 투자기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정부의 세수 중 PPB로 들어가는 금액도 15%로 높아졌고, 이 돈은 정미업과 부동산과 상점, 그리고 지방의 시장에 투자됐다.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의 경제학 교수인 뽄판 오야논(Porphant Ouyyanont)은 한 논문에서, "도로 건설이 지가를 상승시켰고, 상류층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면 PPB가 시장이나 공동주택과 같이 토지 혹은 그와 관련된 비지니스에 투자했다. 20세기 최초 10년간에 행해진 한 지가 조사사업을 보면, 도로의 종착점들이 가장 비쌌다"고 적었다. 이 시기에는 "화교계 가문들"이 왕실의 후원 하에 은행업과 쌀 수출 회사들을 차려 번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04-1908년 사이의 흉년으로 인해 재정적 위기가 도래했다.
바로 이 시기에 라마 5세 국왕은 불황 극복을 위해 정부의 세입으로 "시암 상업은행"(Siam Commercial Bank: SCB)을 설립했다. SCB는 화교 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주었고,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 그 자산을 압류했다. 그리고 1910년이 되면 PPB가 방콕 중심부 땅의 약 3분의 1을 소유하여 태국 최대의 부동산 소유주로 부상했다. 이후 PPB는 철도, 전차, 전력, 금융, 시멘트, 증기선 부문에 투자를 지속했다. PPB는 채무불이행에 대한 자산압류 뿐만 아니라, 공공용지 점유가 가능했기 때문에, PPB가 원하는 땅이면 누구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매입이 가능했다. 뽄판 오야논은, PPB가 "도로건설과 지가, 토지 위치 등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이익을 보았다"고 적었다.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PPB는 수많은 금싸라기 땅과 상업 중심가의 필지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PPB는 종종 주택용지들을 매입하기도 했고, 이 경우 지가나 부동산 가격을 올리기 위해, 정부로 하여금 도로를 건설토록 하기도 했다. 뽄판 오야논은 "방콕 행정부와 국왕의 이해관계가 결합되면서, 그 활동이 방콕의 물리적, 경제적 외관을 결정했고, 그러한 점은 이 도시의 발전과정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적었다.
절대왕정의 종식
1932년 "입헌혁명"이라 불리는 쿠테타가 발생해 절대왕정은 종식됐다. 군부의 지도자들은 국왕이 상징적 위치로 머물면서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랬다. 빠차티뽁(Prajadhipok: 라마 7세) 국왕은 자신의 축소된 역할에 대해 협상하면서, 왕실의 여러 재산들을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한 자산 목록에는 왕궁들과 사원들, 심지어는 오늘날의 왕궁사원에 안치되어 있는 에메랄드 불상까지도 들어 있었다.
새로운 군사정권은 PPB의 통제권을 정부로 귀속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국왕도 상속세를 물도록 했다. 빠차티뽁 국왕이 이 법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1935년 빠차티복 국왕이 퇴위를 하자, PPB의 내탕금은 빠차티뽁 국왕의 개인 자산과 "왕실재산 관리국"(CPB) 자산으로 분할된 후, CPB는 재무부의 감독 하에 놓여졌다.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보도에 따르면, 국왕의 자산이 당시 화폐가치로 매년 50만 파운드 또는 6,500만 바트 상당의 수익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방콕의 일용잡부가 하루 1바트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고 한다.
1936년 제정된 <왕실자산 조직법>(Royal Assets Structuring Act)은, 국왕이 비록 그 개인자산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야한다고 했지만 CPB의 수익에 대해 전액 면세 혜택을 부여했다. 이 법률의 제8조는 "국가의 자산은 면세된다. 따라서 국왕의 자산도 국가의 자산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국왕의 자산도 면세된다"고 규정했다.
폴 핸들리(Paul Handley)가 저술한 <왕은 절대 웃지 않는다>(The King Never Smiles)에 따르면, 라마 6세의 측근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유학한 바 있는 타위웡 타왈야삭(Thawiwong Thawalyasak)이 군사정부를 설득하여, 빠차티뽁 국왕 퇴위 이후 사유화됐던 부동산에 대해 왕실의 수유권을 인정해주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타위웡은 이후 수만 명의 주민들에게 CPB에 임대료를 납입토록 만들었고, 임대료를 내지 않을 경우 해당 토지에서 추방하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국회의사당마저 퇴거시키려 했지만, 국회의원들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사진) 태국 최고의 금서
<왕은 절대 웃지 않는다>의 표지(우)와 그 저자 폴 핸들리(좌)
CPB를 통해 자산이 축적되면서, 다시금 국왕은 서서히 그 부(富)를 재건할 수 있었다. 1960년대가 되면, 경제성장과 함께 왕실(CPB)이 대주주인 기업집단 "시암시멘트 그룹"(Siam Cement Group: SCG)과 "시암 상업은행"(SCB)도 성장했다. 왕실은 이상적인 합작 파트너이기도 했다. 왕실이 소유한 토지는 "시암 인터내셔날"(Siam Intercontinental), "에라완"(Erawan), "두싯타니"(Dusit Thani)와 같은 주요 호텔의 부지로도 사용됐다. CPB는 보험업, 농업, 타이어, 섬유에도 투자했다. 폴 핸들리에 따르면, CPB가 1960년대 말에 이미 500명의 직원들을 두고 투자된 자산과 부동산들을 관리했다고 한다.
타위웡이 1970년에 사망하자, 이어진 10년 동안 CPB의 투자활동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사업들에는 "타이항공"(Thai Airways)의 경쟁사였던 "에어 시암"(Air Siam)도 포함된다.
CPB 제국에 대한 또다른 도전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례는 CPB가 상업적 개발사업을 위해 "무반 탭빠탄"(Mu Ban Thaepprathan)의 빈민촌 주민들을 퇴거시키려 할 때 발생했다. 폴 핸들리는 "주민들은 강제철거에 대항해 투쟁했고, 이 사건은 쓸모없는 국유 산림에서 가난한 농민들을 철거시킨 공무원들과 CPB를 비교하게 만드는 효과를 연출했다. 그리하여 학생운동가들이 이 사태에 개입하여 왕실을 토지를 소유한 봉건주의자라고 비유하자, 당황한 왕실은 결국 이 사업을 백지화시켰다"고 적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태국 공산당"(CPT)이 왕실의 사치로움을 비판하면서 군주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공산당이 운영하던 방송은 "국왕이 더욱 강해질수록, 인민은 더욱 가난해진다. 그리고 국왕의 토지임대료 수입이 증대될수록, 기업들에 대한 국왕의 지분과 국왕 소유 은행의 예금고도 증대된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안정을 가져다준 쁘렘 띠나술라논
1980년대 초반, 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정부군에 의한 일련의 공격에 고통받고 있었다. "왕립 태국육군"(RTA) 사령관 출신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총리는 많은 수의 공산반군들에 대해 사면령을 내리면서 사회적 안정을 거뒀다. 쁘렘은 현재 국왕의 자문기구로 1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추밀원"(Privy Council) 의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쁘렘의 치세 하에서, CPB의 왕실사업은 괄목할만하게 확장됐고, 이와 동시에 왕실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왕실모독 처벌법>(lese-majeste laws)도 더욱 강화됐다. 1988년에 이르면, CPB는 약 40개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주식거래도 붐을 맞이하고 있었다. CPB가 대주주인 2곳의 주요 회사들인 "시암시멘트"와 SCB만 해도 그 자산가치가 6억 달러 이상에 달했다. 물론 주요한 자산인 부동산의 경우, 방콕에 1,628만 1,911평의 면적 토지와 지방에 4,896만 8,153평의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증식되는 CPB의 자산은 결국 외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는 1988년 6월에 CPB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보내고, 그 제목을 "국왕의 기업집단"(The King’s Conglomerate)이라 뽑았다. 이 보도에 따르면, 현재까지도 CPB 국장을 맡고 있는 찌라유 이사랑꾼 나 아유타야(Chirayu Isarangkun Na Ayuthaya) 씨가 당시에는 취임한 지 불과 몇개월 되지 않은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찌라유 국장은 CPB가 공공기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소유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양쪽의 성격을 다 갖고 있다. 정관과 법률을 보면 공적 법인에 더 초점을 맞춘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전부는 아니지만] 사적인 기업과 유사한 유연성 또한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CPB의 운영은 재무부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5인의 이사회가 "감독한다"고 첨언했다. 이 보도는 국왕이 중요한 문제만 자문을 하는 것으로 추정하면서, "국왕이 실제적인 개입을 하는 일은 드물다"고 적었다.
그러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보도는 이 혼성적 회사의 불공정한 이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CPB 운영과정에 존재하는 법률적 회색지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가령 "CPB가 국가적 특권을 누리고 있고, 재무부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 연례 대차대조표가 오직 국왕 한사람에게만 보고되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회계에 밝은 재무부의 한 전직 관료는, 정부가 CPB를 기술적(행정적)으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바로 푸미폰 국왕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지에 밝히기를, "실제로 국왕은 상징적 역할만 하도록 상상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는 태국"이라고 말했다.
국왕의 개인적 자산은 내탕금으로 관리된다. 그리고 왕실이 CPB로부터 지원금을 받기는 하지만, 그 외의 돈은 군주제라는 제도를 지탱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한 일들에는 여러 종류의 "왕실사업들"과 선전활동(역주: 우상화 작업)도 포함된다. 그러나 누가 얼마만큼을 공적 목적 외로 상용했는지 하는 세부사항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폴 핸들리는, 저가의 임대사업과 언론홍보 등과 함께 왕실사업들이 국왕의 권좌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왕실이 기획한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시골 주민들이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국왕에게 직접 청원을 한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하지만 폴 핸들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러한 소원수리들의 세부적 사항은 여전히 왕실의 비밀로 유지되고 있고, 그러한 은밀성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국왕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신비주의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좀더 비밀이 누설된 내용들을 보면, 쁘렘이 총리를 할 당시에 정부예산으로 사업을 하고서 국왕의 업적이라고 한 것들이 더 있다. 그리고 국민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정부를 제쳐놓고 국왕에게 직접 호소한 형태의 사례들은 CPB의 자금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
빠른 팽창
이후 왕실의 비지니스들은 1990년대 초에 들어와서 다시금 나아지기 시작했다. 찌라유 국장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부동산 개발사업자들과 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통해 CPB는 부동산 임대 수익과 주식지분을 확보했다. 이 사업들은 수많은 중소형 레스토랑들과 럭셔리한 아파트들, 복합 쇼핑가, 호첼, 사무용 공간 등에 더 많은 돈을 쏟아붓는 일이었다. 이러한 임대사업은 CPB의 수익과 국왕 개인의 재산을 실질적으로 증대시켜 주었다.
폴 핸들리는 적기를, 1990년도에 마히돈 일가(Mahidol family: "마히돈"은 푸미폰 국왕 직계가족의 성씨임) 앞으로 면세로 돌아온 배당금이 3,000~4,000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왕실 가족이 소유한 주식지분들도 10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한다. 푸미폰 국왕 개인의 재산만 현재 20~80억 달러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실은 또다른 야심찬 계획도 진행시켰다. 왕실의 언론부문이 태국어 일간지들과 TV 방송 1곳을 사들였고, 새로운 영화제작사와 미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와도 경쟁할만한 관광명소도 건립했다. CPB는 광고회사, 케이블 TV, 금융서비스, 건설업, 영화사, 보험사, 병원들, 석유화학기업 등을 포함하는 수많은 자회사들을 갖게 되었다.
이 기간에 몇몇 거래들에 대한 의혹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1996년, 태국 정부는 CPB와 SCB의 합작사인 "시암 TV & 코머샬"(Siam TV & Commercial)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시암 TV & 코머샬"이 단돈 1억 2,000만 바트(약 40억원)만 로열티로 지불하고 30년간 상업방송인 "iTV"의 운영권을 따낸 시점이었다. 당시 경쟁사는 6억 2,650만 바트를 로열티로 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조사결과는 한번도 발표된 바 없다.
역시 같은 해에, CPB는 회생 중이던 "방콕 제일은행"(First Bangkok City Bank) 주식 15%를 1주 당 8.5바트의 가격으로 "태국은행"(Bank of Thailand: 중앙은행)으로부터 매수했다. 당시 이 은행 주식의 시세는 22.5바트였다. 당시 이 거래를 주도한 사람은 시리낏(Sirikit) 왕후의 조카딸 --- 왕후의 누이동생인 멈루웡 붓파 끼띠야꼰(Busba Kitiyakara)의 딸 --- 의 남편인 수라끼얏 사티얀타이(Surakiart Sathirathai, สุรเกียรติ์ เสถียรไทย) 재무부장관이었다. 하지만 탁신 정부에서도 재무부장관을 역임하게 될 후임자가 이러한 결정에 대해 "공적 기금이 너무 손실을 본다"며 취소시켰다.
경제적 충격
1997년 7월 2일, 태국 정부가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하고 환율을 시장에 맡기자, CPB는 망연자실에 빠졌다. 이 "태국발 금융위기" 이전부터 CPB의 미디어 부문은 허덕이고 있었는데, 변동환율제가 시작되자 곧 파산에 이르렀다. 양대 주력기업인 "시암시멘트"와 SCB도 휘청했고, 찌라유 국장이 이 두 기업의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시암시멘트"는 42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부담을 방어하지 못하고, 1997년에만 12억 달러의 환차손을 입었다. SCB 은행도 보유자산이 갚아야 할 금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1998년, 찌라유 국장은 "고통을 참아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CPB는 1,430억 바트(약 5조원)에 달하는 신규사업들을 보류하고, 푸미폰 국왕이 주창한 "충족경제론"(sufficiency economy)을 채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주력기업인 "시암시멘트"와 SCB에 투자를 집중시키면서, 부동산 임대사업에서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자 한 것이었다. 찌라유 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돈 욕심을 너무 안 냈었다. 경제상황이 좋았던 이전의 시대에 우리가 가진 문제는, 너무도 많은 투자 제안들에 대해 우리가 동의했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더욱 주의하게 될 것이고, 투자계획 역시 거시경제적 관점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위험한 사업에는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
"공정한 보상" 받기
CPB는 금융위기 직후에 커다란 수혜를 입었다. 1998년 수익은 80%나 감소했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CPB가 부분적으로 지분을 갖고 있던 "혼다 자동차 태국"이 자본 문제에 부딪치자, 10년 동안 장부가로 반환한다는 조건 하에 CPB로 지분을 넘겼다.
이와 동시에 찌라유 국장은, SCB가 비록 사적 기업이긴 하지만 정부가 면책을 시켜줘야만 할 것이라 요청하기도 했다. 태국 정부는 SCB의 면책을 위해 10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고, 정부 보유 지분 역시 이후 수년 간 CPB로 넘기기로 했다. CPB는 2004년에 "전승기념탑"(Victory Monument) 주변의 토지 일부를 행정적으로는 CPB의 감독기관인 "재무부"에 양도했고, 이로써 정부가 보유했던 SCB 지분 13%를 취득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역시SCB가 보유하고 있던 "iTV" 지분을 6,000만 달러에 매입하여 왕실을 도왔다. 이후 "iTV"는 잠시 동안이나마 태국에서 유일한 독립성을 가진 TV 방송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폴 핸들리는 "당시로서는 별로 회생가능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탁신이 SCB 은행과 왕실을 효과적으로 도와준 셈"이라고 적었다.
CPB는 또한 2000년도에 새로운 목표를 수립하고, 매년 3억 바트(약 150억원)던 임대사업 수익을 2005년까지는 10억 바트 수준으로 올리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은 행정상으로는 CPB를 감독하는 기관인 정부의 여러 빈곤한 부처들 건물의 임대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찌라유 국장은 "우리는 양대 주력기업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가진 자산에서 극한의 수익을 창출하고자 한다. 우리는 신규사업들은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금융위기의 교훈에 힘입어, CPB는 2001년에 재조직을 단행했다. 찌라유 국장은 발표를 통해, CPB가 지분을 통한 "공정한 보상"(fair return)을 받을 수 있도록, "고풍스런"(antiquated)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리하여 CPB는 "CPB 지주회사"(CPB Equity: CPB 사모펀드)를 설립하여 주식투자와 합작사 설립을 담당토록 했고, "CPB 부동산"(CPB Property)을 설립하여 보유한 토지를 관리토록 했다.
이듬해의 상황은 매우 개선되었고, 투자 중지 결정도 철회했다. "시암시멘트" 이사 중 한사람인 욧 으어추끼얀(Yos Euarchukiati)에 따르면, CPB는 미국의 저명한 비지니스 컨설턴트인 마이클 데이빗 셀비(Michael David Selby)가 이끄는 팀의 조력을 받아 구조조정을 했고, 금융위기 당시의 부채를 모두 상환했으며 "이제는 재정적으로 더욱 강하게" 되었다는 선언까지도 했다.
실제로 이후 몇년 간 CPB가 내놓은 계획들은 사상 최대의 규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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