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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탁 - <탄로가>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싀 쥐고 늙난 길 가싀로 막고 오난 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白髮)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 출전 >청구영언 <연대> 고려 충혜왕
▶해설 한 손에는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더라.
▶감상 한 손에는 가시, 남은 한 손에는 막대를 들고 늙음을 막아 보려 하는 인간의 마음과 더욱 빠르게 찾아오는 세월의 무정함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세월에 대해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음을 절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는 아무리 막으려 해도 찾아오는 늙음은 어쩔 수가 없다는 뜻으로, 세월의 흐름을 인간의 능력으로 막을 수 없다는 무상감을 느끼게 한다.
▶성격 탄로가(嘆老歌)
‘탄로가(嘆老歌)’, 곧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로 잘 알려진 이 시조는 고려시대의 학자 우탁(禹倬, 1263~1342)이 지은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이 시조의 작가로만 기억하는 우탁이 사실은 우리나라 주자학의 비조(鼻祖)라는 점을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다. 고려원종 4년(1263년) 단양에서 출생한 선생은 출생 때부터 설화가 전한다. 탄생해서 3일부터 울기 시작하여 그치지를 않으니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아기가 잘못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한 늙은 스님이 지나가기에 물어보았더니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만. 큰 인물이요" 하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과연 보름이 지난 후부터는 울지 않고 정상으로 자랐다는 것이다. 후대에 창작된 것이 분명한 이 탄생설화에 주역이 등장하리만큼 선생은 주역에 통달한 인물이다. 고려에서는 우주의 변화와 인간의 길흉을 상(象)과 수(數)로 해명하려는 상수역(象數易)이 중심이었는데, 말기에 이르러서 성리학적 역학이 새롭게 수용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우탁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동국유사 (東國遺史)』라는 책에 따르면 우탁은 원나라에 들어가서 당시의 황제인 순제(順帝)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역(易)에 관한 새로운 책을 얻고 싶어한 우탁은 황제에게 “우리나라에 역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황제가 “그대는 역리에 통달하였는가?”라고 묻자 우탁은 “비록 박통한 군자라 할지라도 어찌 역리에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역은 이학의 두뇌이니 한번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천자가 역을 주니 역동이 옥하관(玉河館)에서 하룻밤을 읽고, 이튿날 순제 앞에서 배송(背誦)하는데 두루 외워 막히는 곳이 없었다. 황제가 경탄하여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정말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두기가 아깝도다. 주부자(朱夫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도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탁이 귀국하여 외운 것을 다시 더듬어 보니 조금 의심나는 곳이 있어 문을 닫고 한 달 쯤 연구하여 이에 해득하고 이듬해 중국에 보내어 본역(本易)과 대조하니 한 자도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정이(鄭臣+頁)가 주석한 『역경』이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 포 만에 터득하여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易)이 동(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역동(易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우탁은 역동선생으로 알려지게 된다. 선생의 가르침에 크게 깨우친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정몽주는 선생이 돌아가신 지 25년 만인 1367년(공민왕 16)에 역동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드는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목은 이색은 왕에게 청하여 역동선생에게 문희공(文僖公)의 시호를 내리게 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그의 학문과 덕행을 지극히 흠모하였던 퇴계 이황이 주창하여 역동선생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말년을 보낸 안동군 예안현 지삼리 근처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오늘 역동 우탁선생을 말하는 것은, 그가 주자학의 비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조선시대 강직한 선비들이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상소하는 방법인 ‘지부상소’를 몸소 실천한 강직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부상소(持斧上疏)’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도끼를 들고 가서 왕에게 드리는 상소로서,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달라”는 뜻이니 목숨을 걸고 상소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앞두고 올린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병자지부상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 곧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엎드리며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했던 조헌(趙憲 1544~1592)의 ‘지부상소’가 대표적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우탁이 행한 지부상소는 과연 벼슬에 있는 사람이 왕에게 올린 상소의 극단적인 모범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충선왕 1년(1308) 47살인 우탁은 관리들의 잘못을 따지는 감찰규정(監察糾正)이란 자리에 있었다. 충선왕은 그 해 8월에 즉위하여 10월 24일에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눈이 맞아 자주 들르게 된다. 이것은 부친의 부인을 범하는 것으로서 유교의 윤리로는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소문을 들은 우탁은 상복인 흰 옷을 입고 그 위에 거적을 매고 도끼를 든 채로 대궐로 들어가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왕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었다. “군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여 날마다 유신(濡臣)과 더불어 경사를 토론하여 정치의 토론하여 정치의 이치를 묻고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터인데, 만고(萬古)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습니다.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키소서.” 이같은 상소문을 올리자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상소문을 펴고도 감히 읽지를 못한다. 그러자 우탁은 호통을 치며 “경은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그릇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지금에 이르니 경이 그 죄를 아느냐? ” 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이에 신하들이 놀라 벌벌 떨고, 왕도 부끄러워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통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의 패덕(悖德)을 눈 앞에서 지적해주고 아첨하려는 대신들을 노성으로 꾸짖었던 그의 행동은 주자학, 혹 성리학의 덕목을 몸으로 실천로 추앙을 받는다. 『사단(史斷)』이란 책은 이렇게 그를 칭찬한다; 우탁이 항소하여 감히 말하고 스스로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여 조금도 몸을 돌보는 마음이 없었으니 임금도 얼굴빛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었는바, 천년 뒤에도 그 사람을 상상하여 볼 수 있고, 그의 고충(孤忠)과 준절(峻節)은 우뚝하여 범인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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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늙음은 필연이지요. 그러나 아름다운 늙음은 선택이 아닐까요? 좋은 선택을 위하여 화이팅!!!
세월의 무정함이 덧없이 흘러가면 따라서 늙음도 함께 오나요 ? 나는 시간도, 세월도, 모두 멈추게 하고 살아 보렴니다.. 멈춰버린 49세로 .... 말이에요... 항상 젊게 살려고 노력해 보렵니다. 글을 올려주신 석란향님 ! 고맙습니다. 희망차고 보람있는 9월을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