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파이는 어떤 면에서 그 또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소년입니다. 그는 진솔하며, 매우 많은 독서를 합니다. 긍정적이고 탐구심이 강하며, 상처입은 곳 하나 없이, 마냥 따듯한 봄날 같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동물들과 교감하기를 즐깁니다. 눈앞의 가시적 삶보다는, 신과 삶의 의미에 대해 참 많은 고민을 합니다. 사실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어여쁜 소년입니다.
하지만 파이에게는 없는, 혹은 파이가 아직 건너지 못한 무겁고 두려운 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유복하고 맑기만한 십대소년이 경험해본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우리네 인생을 관통하는 커다랗고 묵직한 주제, 고통. 파이는, 인간의 삶을 수놓고, 아프게 빛내는, 이 고통의 문제를 경험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피어나는 삶의 의미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픔을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엷게 웃는, 아름다운 사람의 단아한 삶의 향기를 모릅니다. 그는 그러므로 아무리 발버둥치지만, 여전히 어른일 수 없습니다. 그는 무언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는 삶의 척박함을 알지 못합니다. 폭풍우 한 가운데에서 창조주를 대면하였던, ‘욥’의 경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용히, 그러나 묵묵히 그 결핍에 메스를 들이 댑니다. 성장통이 시작되려는 것입니다.
파이의 고향 인도 땅에 정치적 분규가 계속됩니다. 파이의 부모님은 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모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결국 동물원 부지를 팔고, 전재산과 동물들을 싣고는 캐나다행 이민 선박에 몸을 싣습니다. 그러나 이 선박이 지구상에서 가장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를 지나갈 즈음이었습니다. 거대한 풍랑이 배를 덮쳐버렸습니다. 배는 불빛을 퍼뜨리며 심해로 침몰합니다. 오직 파이만이, 작은 소형 탈출선에 떠밀려 살아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가둔 그 배가 수장되는 모습은,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나 가혹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구명보트에 파이가족이 키우던 동물들이 옮겨탑니다. 오랑우탄과 하이에나, 그리고 '리차드 파커'라는 사람 이름의 뱅골호랑이가 떠밀려 옵니다.
황당할 정도의 설정이고, 언뜻 무슨 신비한 동화 속 이야기같기도 합니다. 멋진 호랑이와 오랑우탄과 하이에나, 그리고 꿈 많은 소년의 표류기라니. 이런 설정은 언뜻, 십오소년 표류기 같은, 밝고 흥미진진한 탐험영화의 설정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감 가득한 이 영화는 흥미로운 모험이 아닌, 구명보트 위의 잔인한 살풍경을 보여줍니다.
조각배의 한쪽 끝트막에 파이는 위태롭게 동물들을 바라봅니다. 배멀미에 반쯤 미쳐버린 하이에나가 가여운 오랑우탄을 먼저 물어 뜯습니다. 그러자 그 하이에나를 호랭이 리차드파커가 잡아먹습니다. 주인의 말을 잘 따르던 동물들이 야수적 속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작은 조각배는 금새 피범벅이 됩니다. 소년은 이제 호랑이가 자기를 물어뜯을 것을 알았기에, 조각배에 끈을 매달고, 바다 위의 나무조각에 올라탑니다. 조각배 위에는 언제든 소년을 먹어치우려는 리차드 파커가 있고, 나무조각 옆으로는 상어떼가 가득합니다. 이 조그만 공간 위의 살품경은, 그야말로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영화의 아름다운 배경과 화면의 근사한 감각은, 이 참혹한 슬픔을 다소 마취시켜줄 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소년과 호랑이는 그 좁은 배 위에서 서로를 노려봅니다. 배고픈 호랑이에게는 유일한 먹거리가 눈 앞에 있습니다. 파이는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징징대며 뛰어가 안길 부모도 없습니다. 소년은 이 위기 속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몇날 몇일을 울며 지새웁니다. 흥미롭고 재밌기만 하던, 하나님이라는 분은 대체 왜 이런 충격으로 자기를 몰아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은 고통도,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기억하는 마음도, 어느 것 하나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파이는 끊임없이 이 고통스러운 현실의 의미를 신께 묻습니다. 그런 그에게 신은 늘 그랬듯 말씀이 없습니다. 대답 대신 거센 폭풍우와, 따가운 햇빛만 선물할 뿐입니다. 몽상과 즐거운 동화 속에서만 찾던 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 몸소 깨달으며, 소년은 그간의 어리디 어린 자기 삶을 처음으로 객관화해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맞닥 뜨린 모든 현실이, 파이를 비관하게 하고, 죽음의 강렬한 욕구로 몰아갑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또 실제 살아남을 유쾌한 가능성도 없습니다. 오직 확실한 단 하나의 감각은, 지금 자신이 무척 고통스럽고 아프다는 것 뿐입니다. 만일 이 고통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이 삶도 역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년은 딱히 살아야할 의미도, 죽지 말아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처음으로 유혹처럼 느껴집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 지점에서부터 실존주의의 본격적인 주제의식으로 관객들을 몰아갑니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이 힘겨운 삶의 파도위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이 삶마저도 반드시 살아내야하는 의미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가. 삶에는 어떤 숭고한 의미가 내재해있는가.
소년은 매일 밤, 깊은 심연 아래로 아름다운 빛깔을 남기고 사라진 배를 떠올립니다. 보석같이 빛나는 수천개의 별이 하늘에, 바다 물빛에도 가득합니다. 야광색의 해파리떼는 마치 천국을 유영하는 천사같습니다. 소년의 아픔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세상은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그 황홀경이 도리어 슬픕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피조물들도, 그 누구도 파이를 위로하거나 애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인간의 슬픔에 관심도 없는 듯, 하나님은 침착하고 무심해보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누구나 한번쯤 떠올리는, 단 하나의 질문이 소년에게 생각납니다.
“왜 신은 우리의 고통에 무심하신가.”
문득 울음을 그친 소년의 눈에, 무서운 포식자이지만, 분명 소년처럼 멀미와 두려움과 배고픔에 떨고있을,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보입니다. 리차드 파커, 이 녀석도 이런 험한 경험은 처음일 것입니다. 문득, 이 벵골 호랑이가 불쌍해보입니다. 그의 처지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자신 뿐이고, 반대로 내 아픔을 똑같이 느끼는 이도 이 호랑이 뿐입니다. 야수와 인간 사이에,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싹트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에 신비로워하고, 흉포한 태풍에 함께 두려워 벌벌 떱니다. 그들은 동지입니다. 같은 고난과 같은 슬픔을 공유한, 동지.
소년은 이제 이 호랑이를 조각배에서 쫓아낼 궁리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대신 같이 살기위한 공존의 방법을 배워갑니다. 소년은 물고기를 잡아, 호랑이에게 생선살로 하루에 5킬로그램 이상씩을 먹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가 자신을 언제든 공격할 것이니까요.
이 즈음, 파이는 영화 속에서 독백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리차드 파커를 보살피는 일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 분명한 것은 그 녀석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 이런 고백은 말못할 호랑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처음 만난 세상의 거대한 풍랑 앞에서 벌벌 떠는, 이 두 미숙한 존재가, 서로에게 아슬아슬하게 기대며, 같은 목표인 '구원'을 갈망합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방주를 함께 탄, 공동체의 식구인 우리들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렇듯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우리를 이렇게 폭력적이고, 불안한 인생의 전선에 밀어놓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뇌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내내 이를 질문하고 답을 찾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비록 태평양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참혹한 생존기이지만, 또한 여행기이며 성장영화입니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최악의 유태인 수용소 체험 이후, 그의 회고록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이란 결국 아우슈비츠 가스실에 초대받은 존재이다.”
저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는 내내, 태평양 한가운데 표류하는 이 소년의 모습에서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난파된 삶이며, 의미를 향한 고된 표류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고된 표류가 꼭 혼자만의 투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혼자가 아니기에 결국 이겨낼 수 있는 싸움인 것 같습니다. 아웅다웅하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리차드 파커와 파이의 말없는 애정처럼 말입니다.
한편, 체력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한 소년은 점점 몽상과 현실이 구분이 안됩니다. 어느날, 거대하고 섬짓한 태풍이 조각배를 뒤흔듭니다. 소년은, 악을 쓰며 외칩니다.
"위대한 신을 경배하라!"
파도 속에서 소년은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다시 외칩니다.
"왜 겁을 주시는거죠? 전 가족을 잃었다구요. 다 잃었어요. 더 이상은 잃을 것도 없다구요. 더 내게 뭘바라시나요?"
태풍이 가라앉자, 이제는 찌는 듯한 열기가 뱃전을 달굽니다. 호랑이도 파이도 쓰러집니다. 파이는 지친 몸을 이끌고, 쓰러진 호랑이를 와락 앉습니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며, 소년은 지친 리차드 파커를 품에 안고 오열합니다. 그리고 신께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를 창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께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소년 파이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고통 속에서 창조주께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는, 이미 삶의 고통마저도 오롯이 긍정하는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더이상 자기 운명에 화를 내지도, 징징 대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조용히 독백합니다.
"이제 진짜 주인이신 신의 뜻을 기다린다."
바로 그때입니다. 배는 지도상에도 없는 어느 신비로운 섬에 도착합니다. 그것은 섬이라기 보다는 떠다니는, 거대한 밀림 같습니다. 발 밑은 고구마 줄기 같은 먹을 수 있는 뿌리 식물이 온섬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섬 가운데는, 수백만마리에 가까운 거대한 무리의 미어캣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피하지도 않고, 멀뚱멀뚱 거립니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도망치지도 않는 미어캣들을 잡아먹으며 오랜만에 마음껏 포식을 합니다. 소년도 오랜만의 평화를 맛봅니다. 온갖 운명의 혹사를 당한 인간이라면, 언제까지든 눌러앉고 싶은 신비의 섬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소년은 이 신비의 섬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미어캣들이 일몰 즈음이 되자, 두려움에 떨며 나무 위로 도망칩니다. 맑은 물이 흐르던 호수에는 죽은 물고기들이 떠다닙니다. 그리고 나무 위에 오래전에 죽은, 어떤 사람의 이빨이 발견됩니다. 그 섬은 죽음의 섬이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온갖 풍요와 안락을 선물하지만, 밤이면 화학적 변화가 발생해서, 강한 산성으로 대지와 물이 변해 살아있는 것을 서서히 죽이는 섬입니다. 이 섬의 배부름과 보호에 젖어 살면, 먼저 죽은 누군가처럼, 결국 그 섬의 안락함에 잡아먹히고 말 것입니다. 과연 이 섬의 죽음같은 평온, 혹은 평온과 비슷한 죽음에 눌러앉을 것인가. 과감히 떠날것인가.
"낮엔 희망을, 밤엔 절망을 주는 섬에서 미어캣을 말동무삼아 살다가, 결국 섬에 잡아먹힐것인가."
소년은 이미 굳센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 후 그는 과감히 여행채비를 챙깁니다. 그리고 소년의 호루라기 소리에, 리처드 파커도 어디선가 달려와 보트에 올라 탑니다.
소년은 독백합니다.
"그 섬을 못찾았어도 난 죽었고, 그 섬에 눌러앉았어도 난 죽었다. 신은 내게 희망을 주셨고, 또 그 희망에 멈춰있지 말고, 여행을 계속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멕시코 해안에 도착했다."
드디어 도착한 육지, 멕시코 해안에 내린 소년의 볼에 신의 얼굴을 비비듯 백사장은 포근했습니다.
리차드 파커는 앞장 서서 백사장을 걷습니다. 잠시 기지개를 켜곤 소년을 딱 한번 뒤돌아 봅니다. 그리고 이 벵골호랑이는 단호하게 밀림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작별인사도 없이. 리차드 파커는 그렇게 영원히 소년의 삶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소년은 사람들에게 구조되면서 엉엉 통곡하며 웁니다. 살았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리차드 파커가 야속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소년의 표류기는 끝이 납니다. 영화는 이제 중년의 대학교수가 된 파이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중년의 파이는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삶이란 결국 그런 것이지요. 모두 결국 다 떠나보내는 것. 하지만 이보다 더 슬픈 것은,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이지요."
그런 고백을 전기작가에게 말하고 나자, 파이의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 들어옵니다. 영화 말미의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가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삶의 험악한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며, 그 험악한 나날의 보상처럼, 파이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족을 잃고, 사랑했던 것에서 작별한, 그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흰 눈처럼 뒤덮은, 따듯한 가정이 생기고, 위로가 찾아왔습니다. 파이는 하나님께 진심어린 감사를 올립니다. 삶의 순간순간도, 죽음 앞에선 삶의 모습들이 모두 감사의 소재가 됩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중국 감독에 인도배우가 열연한, 특유의 우아하고 미려한 음악과 영상미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 몽환적인 영화적 아름다움 때문에, 현실은 훨씬 잔혹하고, 삶의 참혹함은 더 돗보여집니다. 그것은 초현실적 소재를 사용하였지만, 그러나 그 접근법은 도리어 살벌한 세상에 대한 리얼리즘의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인생이란 결국 난파된, 고독한 존재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표류의 시간이 고독하되 완벽한 혼자는 아닙니다. 같은 숙명을 함께 나눈, 경쟁자이자 동지인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있었으니까요. 그 동지이자 동역자 덕분에, 이들은 험로 속에서 의미를 찾고, 사랑을 나누고, 또 구원을 꿈꾸었습니다. 그 표류가 처음 시작되던 순간은, 이 둘은 순박한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류가 끝날즈음, 더이상 이들은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식인섬의 안락함마저도 단호히 포기하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씩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기 삶을 개척하고, 하나님 앞에 그 모든 환란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마저도 감사히 받겠다는 위대한 고백을 하는, 듬직한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근사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잘 그려낸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구원, 고난과 삶의 의미에 대한, 따듯하고 어여쁜 시선이 가득한 이 영화. 대단히 진지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곳곳에 유머와 웃음의 코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추천드립니다. /
첫댓글 유신론적 실존주의 시각을 기저로 하여 절망 속에서 인생의 존재 의미와 신과의 관계를 찾아가는 주제인 것 같네요..
그런데, 주인공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모든 종교에 몰두했었던 소년 파이가 결국 만난 신은 어떤 신이었을까요??
시간 내어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년이 예수님에게 관심이 많은 것은 맞는데, 정말 유일한 주님으로 영접하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영화가 상업영화이다보니 ^_^ 다만, 영화에서 소년이 묵상하는 신은 굉장히 인격적이고, 유일한 창조주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욥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원래 소설이 원작이라고 합니다. 소설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와~ 이런 영화 감상문(?)내지 리뷰 좋아요^^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