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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주님의 다급한 당부
시 119:1-2 눅 9:1-6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하며 ....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
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지난 몇주간 동안 저희 교회에서 개척한 교회를 순회하며 격려를 했습니다. 모두 교회를 아담하게 짓고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마다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들어오면 신이 나고 환호하고 또 한 사람이 나가면 모두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 제 군목생활 때가 생각났습니다. 전방에서 근무할 때 오지에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 지역 안에는 4-50호 되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군부대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주일날이면 동네 사람 5-6명이 출석을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농번기가 되면 그중 한 두 사람만 나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날마다 그 심정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개척교회를 방문하면서 이 마음을 되새기며 영적재충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참 뜻
교회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도하고 양육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일입니다. 오늘 교회는 전도해야 하는 분명한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전도는 교회를 살리고 나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도 안하는 교회와 신자가 있습니다. 전도를 안하면 목표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모두 생명력이 약화되고 불필요한 일에 갈등합니다. 그래서 오늘 전도 안하는 교회들은 한결같이 갈등이나 불화를 겪습니다. 전도는 교회와 나 자신의 생명력을 강화시켜 주는 일입니다.
본문은 전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훈련하고 양육하셔서 세상에 내보내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참 뜻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하고 높고 많이 모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본래 교회를 에클레시아(ekklesia) 라고 합니다. 이는 “부름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왜 부르셨을까요? 바로 부름자의 뜻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즉 나를 소집한 소집자의 뜻을 충족시키는 것, 그것이 나의 할 일이고 의무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유언의 당부로 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이 전도를 안합니다. 대부분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갈등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학자 호켄다이크는 열심히 전도하며 선교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방가르(avantgarde)”라고 말했습니다. 아방가르라는 말은 “전위대”라는 뜻입니다. 전위대는 혁명적인 전환기에 새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전령자를 뜻합니다. 그래서 전위대는 적극적이어야 하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꾸물대거나 확신이 없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신자들 중에는 전도에 적극적인 사람이 있고 그에 반에 느린 사람도 비참여자도 부정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앞서 발벗고 나서야 합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북군 사령관 맥클레런(George McClellan)은 성격이 아주 꼼꼼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진력이 없고 일이 지지부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링컨 대통령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장군이 지금 휘하 군대를 출동시킬 생각이 없거든 그 군대를 잠시 내게 빌려주시오.” 그것이 미국식 표현입니다. 우리 정서로 말한다면 “당신은 지금 전투할 능력이 없어. 그러니 사표 내”라는 말입니다. 사역자 중에도 일을 할 때 꼼꼼하기는 한데 지지부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진하지도 치고 나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패배하고 실패하고 뒤쳐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방가르입니다. 이 시대의 전위대입니다. 복음전파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교회는 다음에 책망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보내며 나가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내실 때 몇가지 조건을 부여하셨습니다. 첫째로 둘씩 짝지어서 내보내셨습니다. 마가복음 6:7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내보내셨습니다. 전도는 둘씩 나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혼자서는 약합니다. 지혜도 용기도 힘도 약합니다. 혼자 여행해 보십시오. 재미도 즐거움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 둘이면 재미가 즐거움이 기쁨이 배가됩니다. 그래서 둘씩 짝지어 살게 하신 것이고 전도도 둘씩 짝지어 내보내신 것입니다. 둘째로 능력을 부여하셔서 보내셨습니다. 1절을 보면 귀신을 내쫒는 능력과 병 고치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10장 17절에서는 전도할 때 귀신들이 나가고 병자들이 치유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돌아와 “귀신이 나가더이다”라며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안다. 나도 보았느니라”하시며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전도를 내보내면 죽으러 가는 짐승 모양으로 억지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나가 전하고 돌아다니면 기적이 수반되게 되어있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기적은 무엇인가를 이루려 할 때 주어집니다.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일본으로 선교를 나갔습니다. 거기서 방을 얻었는데 옆방에 무당이 살고 있었습니다. 밤새워 주문을 외우고 시끄러웠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방을 잘못 얻었구나. 이사 가자”고 할텐데 이 분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쪽에서 크게 나오면 이쪽은 더 크게 기도했습니다. 저쪽에서 소리를 죽이면 이쪽도 조용히 찬송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수 없이 무당이 이사를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응답이 방언이 치유가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허가받은 교회를 삼자교회라고 합니다. 30명이 한도입니다. 이를 넘으면 반드시 갈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고발당하여 모두 유치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치장에서도 하루 종일 찬송을 하고 밤새워 기도를 했습니다. 심지어 잡혀온 사람들까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다가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러자 경찰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유치장에 넣어놨더니 국가 돈으로 밥 먹여줘, 합법적으로 예배 보고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석방하면서 나가서 조용히 예수 믿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선교사가 잡혀서 유치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전도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전도할 때 너무 순순히 회심하는 것입니다. 이상할 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위협을 느끼고는 그를 석방시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전도 나가는 제자들에게 조건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전도했더니 귀신들이 항복하고 나갔습니다.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네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할 때 한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도 사람들이 잘 따라 나서지 않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열 번 해도 하나도 따라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그 영혼이 은혜입고 멸망하고는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 단지 나는 씨를 뿌릴 뿐입니다. 싹이 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인간 이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믿기는 믿는데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집을 나갔어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습니다. 그 절절함이 위기 시 더욱 커졌고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건강하면 평소에 별 소리를 다 합니다. 그러다 위기에 직면하면 잠재되어 있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되는 곳은 위기가 있는 곳입니다. 예를 들면 병원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점이 위기나 중병에 있을 때입니다. 또 전도가 잘되는 곳이 타향입니다. 타향은 고향에서 보다 위기감이 더 큽니다. 그래서 잘 믿게 됩니다. 더 전도 잘되는 곳이 타국입니다. 거기서는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들도 잘 믿습니다. 그만큼 위기감이나 불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일찍 발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방황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데 선택을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것을 하나님 대신에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길까요? 그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안갑니다. 바로 그 심정입니다. 또 사람은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과는 멀리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이름난 무신론자입니다. 그가 왜 하나님을 부정했을까요? 신은 모든 일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목격자가 내 가까이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정직한 철학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가지 부담스러운 것이 많아집니다. 질서를 지켜야하고 정직해야하고 간섭도 받아야하고 율법도 지켜야 합니다. 십일조도 내야하고 술, 담배도 멀리해야 합니다. 주일날 놀러 다니는데 장애도 많아집니다. 그래서 안믿을 수는 없고 믿기는 해야겠는데 하나님 말고는 없을까 하다가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나를 간섭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왜 안왔느냐고 전화하지 않습니다. 십일조 내라, 술 마시지 마라는 요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지해서입니다. 사람은 종교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하다가 고발당해서 아레오바고 법정에 서서 증언을 합니다. 그 때 바울은 아덴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고 말을 합니다.(22절) 실제로 아덴에는 3만개 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많은 신들에게 해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혹시 명단에서 빠진 신들이 해코지 할까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만들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속물근성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나라는 우상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바치기도, 처녀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도 했습니다. 무지하게도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식이 그랬다면 부모 입장에서 용납이 되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는 맹목적 신앙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주 맹목적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오늘 맹목적인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청소년들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있으면 맹목적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 스타의 생일날이 되면 문 밖에서 선물을 사 들고 기다리고, 그 스타가 병이라도 나면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샙니다. 밤샘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앓고 누워있는 사람도 있는데” 라면서 지성으로 기다립니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일본 부녀자들이 한국의 스타를 보기 위해서 전세기를 타고 한국에 오는 것입니다. 와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먼발치서 보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그 보다 더 열렬한 신앙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또, 음식점에 가보면 방마다 부적들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론이나 신학이나 중심이 없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잘 되고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믿음만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타협해서 얻는 신앙입니다. 건물 공사를 시작하거나 완공했을 때 사람들은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고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그 심리가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모습이 가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4에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전도는 그런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 나와서 인격적인 신앙을 갖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셔서 내보내시며 나가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유언으로 당부하시기를 다니며 전도해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
세상에는 시간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빈둥거리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빨리 전도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속을 썩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내일 주일예배에 가고 싶다고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대답입니까? 그러면 만사 제쳐두고 교회에 데리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내일 바쁜 일이 있다고 다음 주일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아들은 주일 다음날 자살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 셋을 키웠습니다. 큰아들, 작은 아들은 성실했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반항적이고 매사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 셋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큰 아들아 잘 커 줘서 고맙다. 너는 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 다음 하늘나라에서 보자”, “둘째, 너도 잘 커줘서 고맙다. 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도 이 다음 하늘 나라에서 보자.” 이제 셋째아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셋째아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너는 부디 몸조심하며 잘 살아라. 그리고 잘 있거라.” 그리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막내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돌아서서 통곡을 했습니다. 좀 더 일찍 그 의미를 알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성경속에는 두 가지 중심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또 한가지는 “누구든지 이 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도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성경의 중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하는 교회, 전도하는 신앙인, 전도하는 그 장소, 그곳이 가장 건강합니다. 거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 미션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