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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100년 2월 1일 일반법회
> 제목: 성즉성(誠卽聖)
> 김제원 교무님 설법
> 타이핑: 소대용 간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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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산 상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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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2월 1일 일요법회, <좌산상사님 법문> 김제원교무님 설법
(출가자 이야기 생략)
저는 원기 100년을 맞이하면서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어깨가 무겁기도 했고요. 이제 세 자리 수(100년 대) 역사의 교단을 맞이하는데, 어떻게 맞이해야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마음이 기쁘셔요, 편안하셔요, 덤덤하셔요, 아니면 오늘도 내일도 답답하세요? 어떠신가요?
유념이라는 것은, 경계 경계마다 마음을 챙겼느냐 못했느냐, 더 들어가서 일을 성공을 했느냐 못했느냐, 또 더 들어가서 사은의 은혜 속에, 대중의 환영과 보호 속에 성공 했는가 못했는가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유념은 하루를 잘게 쪼개서 체크할 수도 있고,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 잠자기 전 4번 나눠서 할 수도 있고, 공부가 깊어지면 하루를 통으로 묶어서 체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유념공부는 오늘 하루를 지내고 나서 ‘기쁘고 감사했느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면 무념입니다. 결국 강급하는 것입니다.
이 법을 공부하면서 사은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고, 내가 변화되는 것, 이 세상을 보는 내 시각이 바뀔 때 어찌 큰 기쁨이 없겠습니까? 저를 볼 때 안 느껴지십니까? 제가 젊었을 때 이 공부를 하면, 우리 법으로 공부하면 몇 백 년 공부할 것을 몇 년 안에 할 수 있다, 사통오달의 도를 얻게 되고,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고, 기질 변화가 되고 한다는 일상적인 법문들을 받들 때, 그저 좋다, 좋다, 합리적이다, 사실적이다, 과학적이다, 생활의 종교구나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삶에서 변화를 하면 그 감사심은 더욱이 말할 수가 없고, 스승님이 다시 보이고, 이 법이 정말 틀림없이 맞구나, 정말 고맙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경계에 따라서 적당히 하거나, 나태하거나, 스스로 확신이 없거나, 습관을 놓지 못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합리화를 하면 그런 맛은 없어집니다. 일생을 통째로 묶어서 유념할 수 있는데, 내 스스로 스승 앞에 진리 앞에, 참 나 앞에 자기 스스로 ‘너 열심히 했느냐, 정성을 들여 끊임없이 해 보았느냐, 자빠지고 무너지고 자꾸 넘어져도 다시 일어섰느냐.’ 반조했을 때, 스스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효제(孝悌)요, 대종사님의 효녀, 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좌산상사님의 이 법문을 읽다가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기적의 100년 감동의 100년
원기 100년의 새 아침이 열렸다. 동천에 떠오른 태양처럼 뜨거운 새 아침이다. 스쳐온 지난 100년의 세월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예사롭지 않은 것 정도가 아니라 기적의 100년 감동의 100년이다.
기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지요. 그런데 원불교의 기적은 신비, 이적(異蹟)적, 비인간적인 기적이 아니라, 평범 속에서 쭈욱 나아가는 기적입니다. TV에서 우리 선진님들의 일화를 프로그램으로 만들려면 참 어렵다고 해요. 세상은 뭔가 특이하게 물구나무서고, 밥을 한 달 간 안 먹는다든지 해야 보는데, 우리는 때 되면 밥 먹고, 때 되면 잠자기 때문에 평범해서 힘들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미래 시대, 미래 성자의 기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돌이켜보면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무엇이 가장 어려운 일인가요? 꾸준히 하는 것, 쭈욱 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 즉 성(誠卽聖)이라고 말합니다. 성인은 바로 정성스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중생은 온갖 핑계를 대며 빠집니다. 감기가 걸렸고, 아프니까, 자식이 어쨌느니, 회사가 잘 안 되니, 시험이 떨어졌다는 등의 온갖 핑계를 대니 간단(間斷), 그 사이가 끊어지고, 정성이 끊어집니다. 정성이라는 것은 ‘간단없는 마음’을 이른다 했지요. 우리가 힘들면 잠시 멈출 수 있고, 자빠지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7전8기의 오뚜기 같은 정신으로 다시 일어서고 이겨내는 것이 바로 성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여기에 대종사님의 법이 들어가, 정도(正道)와 이치에 바탕한 정성이라면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감동의 100년, 기적의 100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발부터 平地造山의 꿈이 있었기에 혹독한 추위도 더위도 이겨 내야 했고, 찌든 가난과 배고픔도 견뎌내야 했으며 백지혈인으로 법계인증도 받아내면서 세상의 비난 조롱도 이겨내야 했었다.
한국 사회 이전에, 세계사를 보면 서양 열강, 제국들이 판을 쳤지요. 인도에서 영국에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데모해서 겨우 찾아왔는데, 영국을 몰아내고 봤더니 어떻게 통치할 줄을 몰라 다시 영국 사람들을 데려 왔거든요. 그래서 서양 열강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자기네가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되는 것이라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전쟁이 일어나고 식민지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 당시에 지금처럼 밥을 세끼를 먹었나요? 그땐 그저 사람 산다는 것이 전쟁 속에 살든지, 밥 한 끼라도 먹고 사느냐가 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불교는 평지조산의 꿈, 평지 속에서 산을 만드는 꿈이 있었습니다. 제생의세의 꿈, 낙원세계, 일원세계 만드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추위와 더위를 이겨냈습니다.
제가 광주에서 모셨던 연타원님은 겨울에 불을 한 번도 땐 적이 없어요. 원래 추위를 잘 타신 분이었는데, 하도 춥게 사니까 체질이 바뀌셔서 겨울에도 부채질 하시고 그랬어요. 제가 하도 추워서 감기도 걸리고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하고 불을 때버렸더니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 선진님들은 이렇게 사셨습니다. 전농교당에서 모신 밀타원님은 밀양에 개척교화를 혼자 나가셨다고 해요. 처마 밑에서 앉아 솥에 불 때서 몰래 밥해먹다가, 교도들이 오면 얼른 치워버리고 한 분 한 분 불공을 했다고 해요. 그런 스승님들 한 분 한 분 역사를 보면 정말 감동입니다. 제가 출가를 해서 구도역정기를 보면서 너무 좋아, 출가 할까 말까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었는데, 보면 두부류로 나뉘어요. 정말 좋다는 사람과, 너무 고생스러워서 이렇게 안 살란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군인들은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더구나 우리나라가 처음에 일본과 미국이 들어왔을 때 그 문화가 참 찬란했지요. 그런데 정치인들의 장난으로 전쟁통이 되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이야기 들으셨지요? 대중을 데리고 사는데 총부에도 밥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종사님, 정산종사님만 밥을 드리려고, 밥 먹으라는 종을 치면 아무도 밥을 안 먹고 종법사님 밥만 준비한 것입니다. 종법사님은 그것을 또 어떻게 아시고 ‘오늘은 배가 살살 아프니까 안 먹겠다.’고 하셔요. 당시에 얼마나 가난했으면 대중들이 유일학림을 잠시 휴교하려고 뜻을 모았습니다. 그랬더니 정산종사님이 ‘대중의 공의이지만, 이것만은 포기하지 못한다.’고 강권으로 결정을 하시어 번복하셨습니다. 그때 유일학림을 당장 휴교했다면, 원불교가 이렇게 못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들의 지혜는 다른 것이지요.
백지혈인 법인성사, 그 때 주변에서 얼마나 불법연구회를 보고 멸시했습니까? 저축조합의 방언공사가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어요. 그래도 사필귀정을 내세우면서 밀어붙였지요. 온갖 세상의 비난과 조소가 있었고, 다 해놓으니까 또 누가 뺏으려고 했지요? 그런 위태위태한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정을 꾸려도, 회사 하나를 경영해도 참 불안하거든요. 어떤 한의사 교도는 손님이 안 오면 참 불안해합니다. 대종사님은 이 회상을 내놓으시고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을까요.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목 뒤에 뭐가 부어계셨잖아요. 주세불로 오신 대종사님도 육신은 갖고 계신 것이고, 고민은 해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처음 총부에 가서 공부할 때 27~8년 전에 보면, 대종사 당대 제자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대종사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선진 모시기 시간이라 하여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시는데, 주로 여자 선진님들은 거의 다 눈물을 흘리셔요. 좋은 음식만 나와도 우시는데, 대종사님은 이렇게 못 드셨는데 못난 내가 이런 상을 받아도 되나 하시면서요. 대종사님이 당대에 그런 말 하셨죠. ‘너희들 나중에 나 눈만 봤다고 대우받을 것 생각하면 눈 꼴 시려서 어떻게 볼까나’ 그러셨다고 하잖아요. 왜 우셨을까요? 그 고생하고, 인내하고... 인간적 편안함, 쾌락을 그분들은 왜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셨지요.
더욱이 일제의 시퍼런 칼날도 피해가야 했었다. 세계대전으로 식민통치도 견뎌 내면서 바쁘게 바쁘게 창립사를 가꿔가야 했었다. 세 번을 관아에 불려 갈 때마다 영어(囹圄)의 생활을 몸소 겪으신 대종사님의 심경은 어떠하셨을까. 마루 밑에 숨어 감시하며 민족단체라고 해체 시키려는 일경들의 틈바구니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떻게 용케도 견뎌 내셨을까. 오히려 그들을 감복시켜 알뜰한 제자까지 만드셨을까. 실로 굽이굽이 기적이요 감동 아닐 수 없다.
좌산 상사님 글이 참 좋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당시 심정을 잘 표현하셨는지, 글을 멋있게 쓴다고 잘 쓰는 것이 아니에요. 얼마나 투박합니까. 일제의 시퍼런 칼날, 식민통치로 인해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더군다나 영광은 농토도 없고 밭떼기 조금씩 달린 해변가로 산밖에 없는 깡촌 중의 깡촌인데, 그런 그곳에서 창립역사를 방언공사와 기도로써 해내셨고, 중간 중간 관아에도 불려가셨지요. 한 번은 정산종사 아버지인 구산 송벽조 교무가 마령교당에 갔는데 일본 천황을 보고 똑바로 하라고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백일장을 열어서 누가 문체가 같은지 확인했더니, 정산종사 아버지셨어요. 그래서 대종사님을 잡아다가 제자들 똑바로 교육 시키라고 했지요. 영어囹圄)라는 것이 감옥을 말하는데, 세 번이나 들어가셨어요. 영광, 익산, 김제에서도 들어가셨어요. 여러분은 들어가 보셨어요? 대종사님의 심경을 느껴보시라고 감옥 하나 만들어야겠네요.
대종사님께서 해방 전에 일찍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 사람은 ‘인도의 간디’같은 사람이다, 불법연구회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지령으로, 일제 경찰이 수시로 감시하고, 법회를 볼 때마다 칼을 차고 감시하고, 식순 갖고 뭐라고 하고, 대종사님은 어떻게든 이 회상을 키워보려고 하는데 일제 때문에 없어지게 생겼었거든요. 지금 대종사님 당대에 생겼던 종교들이 거의 다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당시 천도교 세력이 엄청 났습니다. 독립운동, 3․1운동 다 지원했는데, 지금은 힘을 잃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원불교는 기가 막히게 이겨 냈는데, 얼마나 가슴 졸이셨을까요.
구 상주선원(공회당)가보면 문 들어가는 밑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거기에 경찰이 들어가서 듣고 있었다고 하고, 법회 보면 뒤에서도 보고 있고, 화장실에서도 앉아 있어서 혹시 남녀문제가 있나, 독립운동을 하는가, 경제 문제가 있나, 사상문제가 있나 온갖 것들로 불법연구회를 없애기 위해 감시했어요. 그것을 앞장 선 사람이 황이천(가봉) 선진이잖아요. 영국도 인도를 통치할 때, 인도 사람들을 고용해서 통치를 했듯이, 우리도 한국 사람을 앞잡이로 시켜서 통치를 했지요. 그때 사산 오창건 선진님이 황이천이 대종사님을 함부로 하니까 혼을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도 대종사님은 그래도 기가 막히게 불공을 잘 하셨어요. 옆 사람이 볼 때는 꼴불견일 정도로 하셨다고 해요. 대종사님은 그 일본 경찰이 불법연구회를 없애러 왔지만 부처님으로 대한 것이지요. 그래서 황이천이 나중에 전국순회하면서 내가 대종사님을 이렇게 괴롭혔다고 고백하면서 결국 감복 받아서 지금은 이렇게 와서 시자가 되었다고 하고요. 자기 딸도 출가시켰는데, 그 사람이 황명신 교무님이에요. 일제 경찰들이 기생들도 데려와서 술도 먹입니다. 기생보고 대종사님 한 번 품어 봐라 하면서 온갖 약점을 잡으려고 했음에도 버텨온 것이 우리 원불교 교단인 것입니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 문맹퇴치하면서 큰 희망을 꿈꾸던 때, 하루 아침에 동족상잔의 동란이 발발하여 익산총부가 그들의 점령을 당하는 질곡의 역사 속에서 고비 고비 흔들려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고, 공중분해가 되었을 수도 있고, 블랙홀에 빠져 들 수도 있었던 순간순간들이 수없이 많았다.
해방을 하니까 우리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해외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겠냐며 도왔지요. 그래서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익산, 부산, 전주, 서울 4군데에서 했지요. 사실은 주산종사님이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리고 시골에 가서 문명 퇴치운동을 했지요. 전북 금평에 가면 그 동네 모든 사람들이 원불교 사람이잖아요. 알고 보니, 거기에 교무님이 가서 한글 가르쳐 문명퇴치운동을 한 것이에요. 가수, 승보라든가 가면 90%가 원불교입니다. 거기 가면 교회 목사가 교화 안 된다고 힘들어해요.
또 하루아침에 6․25 전쟁이 나지요. 그래서 간판을 숨기고, 정산종사님은 송대에서 반야심경을 하루에 수십 독 씩 하셨다고 하지요. 제자들도 여기저기로 보내고요. 북한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총부가 시내에서 좀 떨어져서 집도 있고 좋잖아요? 당시 신흥종교들 다 산산조각 났거든요. 원불교만 살아서 버티고 있는 것이에요. 공중분해, 블랙홀로 표현해주셨듯이 실제로 다 없어졌어요.
이 수많은 순간순간을 어떻게 무사히 넘겨 냈을까. 이러한 와중에 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 세 스승님 열반상 나투 실 때도 어떻게 흔들림 없는 교단의 법통대의를 지켜 냈을까. 이 모두가 기적이요 감동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지난 100년의 역사가 모두 금이요 옥이다. 물론 옥의 티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도 오히려 이 모두가 무늬로 화하여 아름다움이요 거룩함이다.
종교가 재색명리 중에, 재, 색이 오면 그냥 문을 닫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명예가 그 경계 중 가장 큽니다. 종통 문제가 정말 중요한데, 대부분 한 대가 그 뒤로 못 이어집니다. 증산도도 보면 증산 선생 돌아가시고 나서 40개 파로 나뉘어버립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제자는 제자대로 다 종통을 받았다고 주장했죠. 그 중 하나가 대순진리회죠. 지금도 고창에 가면 증산도가 남아 있어요. 거기 가서 대장을 만나고 왔는데, 7일 통령이라고, 7일 동안 지성으로 기도하면 영이 열린다고 해서 죽어라고 한다 해요.
그런데 우리는 대종사님이 일찍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산종사님이 제대로 틀을 잡으셨잖아요. 그 때 당시 전음광 선진님 같은 경우는 정산종사님과 거의 맞먹었어요. 글도 잘쓰시고 강남 이남의 3대 천재 중 하나였다고 하죠. 그런데 교정원장을 제의해도 안 하셨어요. 그래도 별 무리 없이 정산종사님이 지켜오셨고, 대산종사님으로 이어오셨죠. 대산종사님이 되실 때, 구타원 이공주 선진이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김대거가 되었다고?’ 하셨다고 하지요? 한참 아래 어린, 간사처럼 데리고 있던 사람이 종법사가 되니까요. 또 좌산님이 종법사에 오르실 때는, 상산 종사님이 종법사님으로 추대가 되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오체투지로 좌산님을 받들었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원불교의 기가막힌 대의 정신, 법통, 신맥, 법맥 정신이지요. 이것이 참 무섭습니다. 대개 종교는 그 사람이 죽고 나면 대를 잇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산종사님께서는 죽기 전에 후대를 물려주는, 상사 제도를 만든 것도 그렇지요.
우리 100년의 역사는 이렇게 끝내기에 아쉬울 정도로 수많은 역사가 있어요. 여기 뒤에 동대문병원 뒤를 보면 예전 팔타원 황전신행 선진님 집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뺐어갔죠. 예전에 거기에서 여자 간사님들이 위안부, 정신대 피하려고 피해 숨어 살고 그랬어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역사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원불교가 망한다, 없어진다고 하던 사람들이 수천 명은 될 것이에요. 하지만 대종사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신데요, 그리고 정산종사, 대산종사님까지 그 세 분은 어떤 분이신데요. 그 분들은 영통, 도통, 법통 다 하신 분들이에요. 수천 년 수만 년을 바라보는 분들이에요.
그래서 지금에 다시 뒤돌아서 보니까, 세계 종교 역사 속에서 100년 내에 이렇게 빠르게 큰 종교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가 빠르기도 하지만 기가 막힙니다. 미국 선학대학교가 괜히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인도에 가봤는데, 인도에는 아무리 교회를 세우려고 해도 못 세워요. 그런데 우리는 델리교당을 딱 세웠잖아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놀라워합니다. 지금 해외 22개국에 나가있지요, 미국에는 동부, 서부 교구가 있지요.
반타원님 지금 몇 학년 몇 반이세요? 8학년 6반이면 거의 100년을 살았는데 86년 동안 뭐 하셨어요? 원불교는 100년 동안에 어떤 한 개인이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기업은 세상을 확 장악했다가 또 흥망성쇠 합니다. 그런데 이 종교는, 과거의 모든 성자들은 과거의 선천시대의 성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종사님부터는 후천개벽의 초석이라고 하셨어요. 역사를 보면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 하는데 이제 그런 구분은 없어졌고 모두 세계사요, 세계 살림입니다. 이미 일원화가 되었습니다. 기업을 해도 한 나라만 보고 할 수 없어요. 한 나라가 문제가 생기면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는 세계에, 세계 전체를 하나로 구제하기 위해 나오신 분이 대종사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100년을 탄탄하게 인재양성하고 교단의 체계를 잡아나가고, 한 사람 한사람 훈련을 시키며 해가는 것이에요.
여기 앉아 계시는 반타원님도 초창기에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제가 삼삼회 강의 가서 다음 생에 전무출신 할 사람 손들라고 하면 안 들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 교무님들 너무 고생하는 모습을 봐서 그냥 내생에는 교무님들 후원하겠다고 그래요. 그 분들은 교무님들 한 분 한분이 고생한 것을 알아서 그렇지요. 사실, 재가 교도님들 중에 항마위, 출가위에 올라가신 분들은 타종교의 어지간한 출가 이상으로 훌륭한 분이에요. 재가로 하면서 교단에 헌신하기가 정말 쉽지 않거든요. 출가는 처음에만 어려울 뿐이에요. 재가가 정말 힘들어요. 이렇게 출가 재가가 똘똘 뭉쳐서 이 회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박수한 번 칩시다. 이것이 바로 감동의 100년, 기적의 100년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뒤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읽어 보시고요. 일원 대도가 있고, 법과 스승과 회상, 동지가 있잖아요. 이제는 한국의 종교가 아니라, 4~500년 결복 시대가 되었으니 국한을 툭 터서 일원주의, 대(大) 세계무아주의로서 대 세계의 일을 하는 종교로서 프라이드를 갖고, 일신 하나만을 위해, 가족주의로 살지 마시고 국가주의마저도 넘어서 대 세계주의로 폭을 크게 잡고 나아갑시다. 폭은 크게 잡으면 커집니다.
이제 우리는 세 자리 수 교단사 출발선상에 있다. 결실교운을 듬직하게 마감하고 결복교운을 열어가는 출발선상에 놓여있다. 지난 100년사 속에서 겪은 악몽은 다시 없으리라 믿으나 어찌 미래인들 순탄할 수 만 있으랴. 우리는 지난 100년의 역사가 있었기에 앞으로는 그 보다 더한 질곡이 있을지라도 능히 이겨 낼 수 있다.
이제는 축적된 저력이 있지 않은가. 끼쳐주신 일원대도의 교법은 세상의 태양이요. 온 생령의 희망이다. 일원대도 회상은 바로 반야용선이다. 만생령 품어 안고 고해바다 건너 저 언덕 선착장에 안착 시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결복교운에 해 내야하는 과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 법이 있고, 그 회상이 있고, 스승이 있고, 동지가 있어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만생령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밖으로 미래로 사회로 세계로!
첫댓글 이번 설법타이핑은 소대용 간사님께서 애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두 분 고생 많으셨어요.
긴~글... 읽기도 어려운데, 타이핑하는 에너지도 대~단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좌산 상사님께도, 해설법문 해주신 우리 교무님에게도,
애기 엄마 나인명 교도에게도, 소대용 간사님에게도 큰~ 박수 짝짝짝^^
당분간 심고 대신, 이 법문을 읽으며...마음에 새길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