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음력 윤3월 6일), 부모님과 큰오빠의 산소를 이장하는 날이다. 청주에 사는 장조카 부부 라우렌시오와 마리아가 7시 30분에 우리 부부를 데리러 왔다. 다행히 비는 그친 상태이고 남아 있던 검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새벽까지 장대같은 비와 돌풍이 몰아쳤던 것을 생각하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8시 30분에 일산 동구 설문동 선산에 도착하니 작은 언니와 오틸리아, 그리고 작은 조카 내외가 먼저 와 있었다. 장묘사에서 보낸 사람들도 꼬마 포클레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8시 30분에 일산 동구 설문동 선산에 도착하니 작은 언니와 오틸리아, 그리고 작은 조카 내외가 먼저 와 있었다. 장묘사에서 보낸 사람들도 꼬마 포클레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파묘를 하기 전에 주과포酒果脯와 떡을 올리고 절을 하였다. 부모님 계신 곳)
(큰 오빠가 묻혀 계신 곳)
예를 올리고 나자 기다리고 있던 포클레인 기사가 아버지 어머니의 합장묘 봉분의 흙을 파기 시작하였다. 황토색의 부드러운 흙은 간밤에 비를 흠뻑 맞았음에도 찰지지 않고 부드러워 작업하기에 좋았다. 무덤 주변도 언제 비가 왔느냐 싶게 습기가 없었다. 부모님 묘에 이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큰 오빠의 묘에서도 같은 작업이 이루어졌다.
(황토색 흙이 부드럽고 물기가 없었다. 맨 오른쪽이 큰 조카, 좌측에서 두 번째가 작은 조카이다.)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맑고 드높았으며 바람은 상쾌하여 시작부터 오늘의 작업이 하늘의 축복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묘가 진행되는 동안 스테파노의 주례로 모두 함께 연도를 바치었다.
드디어 부모님 유골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85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물론 98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97년에 가신 오빠까지도 肉脫(살이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완벽하게 되어 모습이 전혀 흉하지 않아 지켜보는 자손들을 기쁘게 하였다. 칠성판에 유골을 모시어 뼈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백지로 싼 후 하얀 천으로 다시 묶어 관에다 모셨다.
(어머니가 모셔진 관과, 아버지는 유골이 적어 청주로 운구하는 동안에만 상자에 모셨다. 높은 구름 조각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비석은 가져갈 수 없어 관이 나온 자리에 파묻었다. 아버지 생전에 손수 장문의 비문까지 새겨 놓으셨던 것이지만 모시고 갈 공원묘지에는 똑같은 규격의 비석밖에 세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석 앞면)
(비석 뒷면)
죽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서도 새 생명은 움터 나와 나무는 연두색 빛깔을 반짝이며 바람에 한들거리며 있고 땅에는 쑥과 씀바귀 등 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앙증맞은 제비꽃이 무리지어 있고 이름 모를 보라색도 그 옆에서 피고 있었다.
언니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회상에 잠겨 있고, 오틸리아는 보랏빛 꽃을 바라보며 시심에 젖어 있으며, 작은 질부는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을 캐어 집에 가서 키워보겠다고 종이컵에 담고 있다. 큰 질부는 뜨거운 햇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쑥과 씀바귀를 캐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떤 일이든 몸 사리지 않고 재바르게 행동하는 모습은 큰 질부가 가진 매력이다. 나중에 보니 질부가 뜯은 쑥은 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비꽃)
(작은 질부가 가져간 이름 모를 보라색 꽃 사이로 쑥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인다.)
관을 리무진에 옮겨 모시고, 봉분을 다시 덮고 작업을 마친 후 우리는 상에 올렸던 떡, 사과 ,배, 그리고 김밥 한 줄로 요기를 하고
충북 청원군 가덕면 '성요셉공원묘원'으로 출발하였다. 리무진에 오틸리아와 작은 조카가 동승했고 언니와 스테파노와 나는 큰 조카 차를 타고 갔다.
조상님이 임금님으로부터 하사 받았던 30만평의 산, 남향에 토질이 좋아 묘를 쓰기에 더 이상 적합 할 수 없던 땅이 이제는 대부분 남의 소유가 되어 주변이 컨테이너로 덮혀 있는 어수선 한곳이 되어버렸다. 조카야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니 찾을 기회가 있겠지만 우리 자매와 조카 딸들한테는 다시 올 일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에 선산을 뒤로 하고 가는 마음은 허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