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9장1-15절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2차 귀환이 마쳤습니다. 출발과 도착 사이를 설명하는 자세한 문장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 걸어야 했던 그 먼 거리의 여정은 수많은 우여곡절의 문장을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여곡절을 넘어 무사히 예루살렘까지 도착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라는 몹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관계를 끊지 못하고 결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결혼은 단순한 결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2절에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라는 구절을 원어로 직역하면, ‘그들이 그 자신들과 그들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입니다. 즉 그들의 결혼에는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자신과 자기 아들이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방인과의 결합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하나님이 빠져 있고, 자신이 주체가 된 영적이고 신앙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심각한 결합이었습니다. 신앙의 공동체성을 바로 세워야 하는 중요한 이 시점에 이방인과의 결혼은 그 공동체성을 완전히 와해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율법에서 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더 심각한 것은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이 잘못된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포로 귀환도 이루어졌고, 성전도 재건되는 등 외형적으로는 무언가 공동체성을 이루어 가는 듯 보였지만, 실제적인 내면의 상태는 심각했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내면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형이 좋아 보여도 내면도 외형과 같으리라 볼 수 없습니다. 외형적 열심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외형적 열심이 반드시 내면적 열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형적 노력만큼 내면을 잘 돌아봄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섬기는 만큼 내면도 주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림을 받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포로의 아픔을 겪어야 했는지 충분히 돌아볼 기회가 있었음에도 또 귀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할지 충분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또 나태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소식을 들은 에스라의 첫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3절입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옷을 찢는 행동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듣거나 보았을 때 가지는 슬픔이나 놀람의 표현입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야곱이 보인 첫 반응이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이었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은 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명예와 자부심,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깎는 것은 수치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혀 앉은 모습은 참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세 행동이 이스라엘이 지은 잘못이 얼마나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중하고 심각한 죄임을 알게 합니다.
에스라는 이 반응 후 그 백성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6절입니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차마 하나님께 얼굴을 들 수 없는데, 이유는 우리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죄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하며 자신도 죄를 지은 그들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에스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언급을 하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셨는데 또다시 주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11~15절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금 범한 죄가 어떠한 죄인지를 고백하며 그 예로 과거 가나안 땅을 언급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우상을 숭배하는 땅이기에 구석구석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서 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여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못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또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지금 똑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고 있으니 이제 주님이 어떤 징계를 내리신다 하여도 핑계할 것이 없다며 죄를 구체적으로 솔직히 인정하고 자백했습니다.
에스라의 모습에서 2가지 적용 점을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무겁게 여기고 주님께 솔직하게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짓는 죄에 대해 결코 무관심하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 안에 두셨다는 것은 그 공동체도 나의 몸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두신 그 공동체는 나와 한 몸입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는 곳입니다. 공동체의 죄 또한 나의 죄로 끌어안고 주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에스라의 모습을 기억하며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을 꼭 붙잡고 내적 개혁, 내적 성숙이 일어나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기도
주님! 말씀 안에서 우리의 내면을 잘 살피게 해 주시옵소서. 죄를 가볍게 여기어 방치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또 우리를 두신 그 공동체를 나의 몸으로 끌어안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며 아름다운 성숙을 함께 이뤄가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