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과 송계선생을 모셔놓은 김해 산해정(신산서원)
진입도로 확장공사 및 산해교 준공을 축하는 행사가 2020년 7월 11일
개최되었는 데, 그때 배너전에 출품했었습니다.
金海 山海亭과 新山書院
산해정(山海亭)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25호로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학자 조식이 건립한 누정이다. 그리고 신산서원(新山書院)은 조선시대 조식과 신계성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산해정 옆에 창건한 서원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 건물이다.
조식은 22세 때인 1522년(중종17)에 김해에 살고 있는 있던 남평조씨(南平曺氏, 23세)와 결혼하면서 김해와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26세가 되었을 때 부친상을 당해 합천군 삼가현 판현 갓골(현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에서 장례를 치르고 3년 시묘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30세가 된 1530년(중종25)에 어머니를 모시고 당시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에 터전을 잡았다.
그는 대동면 주동리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인 강학소 산해정(山海亭)을 지었다. 이 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강학하였다. 이때 호(號)를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남쪽 큰 바다’, 즉 ‘천지(天池)’를 일컫는 ‘남명(南冥)’으로 지었다.
1545년(인종1) 김해에서 모친(인천이씨, 70세)이 돌아가시자 삼가현 갓골에서 장사 지낸 뒤, 갓골에서 시묘살이를 한다. 이때 그의 나이가 45세다.
1548년(명종3) 갓골에서 모친 3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그 해 48세의 나이로 김해에서 삼가로 이거한다.
삼가에서 뇌룡정(雷龍亭)을 건립하고 강학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61세에 산청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568년(선조1) 7월: 남명 첫째 부인 남평조씨(南平曺氏)가 김해에서 69세로 사망하여 그 묘소는 김해 대동면 주동리 산해정 앞산 오미등에 있다.
1572년(선조5) 72세에 조식은 산청 산천재에서 사망하여 묘소는 산청군 덕산에 있다.
현재 남명은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산청의 덕산서원(德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산해정(山海亭)과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우다.
1530년(중종25) 조식, 산해정(山海亭) 세우다.
1578년(선조12) 김해부사 하진보와 향인들이 산해정 동쪽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건원(建院)하다.
1608년(선조41) 인진왜란 때 소실된 신산서원을 황세열, 허경윤 등이 산해정 옛터에 중건하다.
1609년(광해1) 신산서원이 사액(賜額)되다.
1616년(광해8) 송계 신계성이 신산서원에 병향(幷享)하다. 송계 신계성은 조식과 교류하며 학문에 뜻을 두어 평생을 은거하며 석계정사를 지어 학문과 수양만으로 지낸 조선의 유학자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다. 이후 사림의 공의로 조식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山海亭)만 중건하다.
1871년(고종8) 신산서원 및 산해정이 훼철(毁撤)되다.
1890년(고종27년) 산해정을 중건하다. 1921년, 1946년, 1971년에 산해정을 중수하다,
1985년 산해정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25호로 지정하다.
1999년 신산서원을 복원하고 남명과 송계 선생을 병향하다.
-'남명 조식 연보'에서 발췌하여 정리하다.
진덕문 - 덕을 나아가게 한다
동재 환성재 -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서재 유위재 - 의로움을 쌓는다
숭도사 - 도를 숭상한다
이 곳에 남명과 송계를 제향하다
東齋 환성재-어리석음을 깨우친다.
西齋 유위재 - 의로움을 쌓는다.
첫댓글 7월 27일 김해향옥정 모임 때 오전에 일찍 도착하여 무여와 같이
미리 답사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모임을 한 지가 3개월이 지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