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박경미)
앎에 대한 인간 조건
(일본의 야만적 정복 전쟁을 멈추게 했던 원폭투하), 원폭 투하도 이왕에 만들었으니(했으니) 써봐야 하지 않겠나‘하는 심사였을 것이다. 역사상 중대한 결정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내려졌다.
그들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세계는 국가만 있고 국민은 그 국가의 일부분 또는 기계의 한 부품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 지도자들이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양 행동한다. 주제넘게 오만을 부린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 상상과 도덕과 양심이 멈춰버리는 왜소한 인간들의 무지를 인간은 알지 못한다. 인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거듭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해서 오만을 부린다면 그 결과는 파국이다. 그런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대중적 감각이 존재하느냐 여부가 실은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나타낸다. 교양이라는 것은 책 몇 권 더 읽고 안 읽고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장이나 전시회를 가고 안가고의 문제가 아니다.그것은 황우석의 사건이 무엇을 의미라는 알아보는 능력이고, 강은 강으로 흘러야 한다는 것을 아는 능력이다.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삶 속에서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 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겠는가? 자신이 안다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알지 못한다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도덕과 정의에 근거해서 행동했다고 여겼지만, 실은 부친 살해와 근친 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식의 출발점이냐는 뜻일 것이다. “아는 것이 무엇이냐,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라는 공자님 말씀 역시 무언가를 알려면 무엇을 모르는지 우선 알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성찰하면서 행동하고 결정을 내린다면 설사 불완전한 지식일지라도 유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알 수 있음’을 개인적 집단적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이야말로 오만이며 종교적 언어로 말한다면 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행동 할 때 무엇이 우리 행동이 기준과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웬델 베리는 이 때의 기준은 기술적 능력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의 성격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게 중심을 생산성이 아니라 지역의 어떤 적응성에, 기술혁신이 아니라 친밀성에 힘이 아니라 우아함에, 비용이 아니라 검소함에 두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건강과 관련해서 규모와 의도의 타당성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추상적인 수치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들의 공동체에 관심을 두는 지식과 행동이어야 한다. 어떤이에게 조국(국가)은 ‘삼풍’이지만 나에게 조국은 ‘어린 시절’이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용감하고, 검소하지 않으면서 널리 쓰고자하며, 남의 뒤에 설 줄 모르면서 남을 이끌려고 한다’고 했다.
무엇이 죄인가?
요한 9장은 예수께서 소경을 치유해준 이야기가 한편 나온다. 치유사화는 복음서의 반복적 주제이지만 요한복음서의 이 이야기는 독특한 것이 기적사화보다 그 후일담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후일담은 치유를 받은 당사자와 이웃을 바리사이 당국이 차례로 불러서 조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제자들이 질문인 ‘누구의 죄인가?’라는 사실은 유대교적 배경이다. 유대교는 죄와 고통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루가 13,2) 어른이 병에 걸렸을 때나 쉽게 그의 행동에 뭔가 잘못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했고, 어린이가 장애나 병을 가지고 태어나면, ‘조상의 죄 ’탓 (탈출 20,5)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매우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고통과 불행을 보고 그 당사자나 가족에게서 원인을 찾은 인과론적 사고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다. 예수의 답변은 고통과 죄의 연관성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다. 제자들은 결과론적 관점으로 보지만, 예수는 원인론적 관점 즉 목적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의 관심과 그 배후에 있는 관점이 모두 거부된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소경이 보지 못한다. 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이다. (원인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다. 물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예수는 그를 보게 해준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예수는 사라지고 바리사이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고 치유 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예수와 소경을 죄인으로 몰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바리새인들과 소경이 대결한다. 신문 과정에서 논증의 근거는 모세의 율법이고. 치유자의 진술은 고침을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정해놓은 법과 자신이 경험한 사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지금 경험한 곳에 확고하게 근거해서 말한다. 그의 하느님은 책과 법(法)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베풀어진 자비의 행위 안에 사신다. 바리사아파 사람은 그를 회당 밖으로 추방한다. 쫓겨난 이 사람을 만난 예수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고 말하자, 마지막에 예수는 본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9,41)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맨 처음에 제자들이 죄에 대해서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서 주어진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나.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것은 죄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보지 못하는 맹인이 아니라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바리사이인들이 죄인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의 언어로 말하자면 ‘보지 못하는 것’ 즉 ‘알지 못함’은 죄가 아니다.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고, 거기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 실은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주장하고 거기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죄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인식(론)의 핵심에 있는 것이고, 신구약 성서를 통해 반복해서 나온다.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고 결국은 ‘알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선악의 지식, 선악 판단의 중심이 되어 선악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죄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주장하는 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이야기의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그랬듯이 그럴듯한 이념이나 구호 명목상의 법과 규정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구체적이고 진실함 경험을 끝까지 지키는 길 밖에 없다.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배웠다는 사람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놓는 복잡한 요설에 속지도 기죽지도 말고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서로에게 전달되는 올바름에 대한 감각을 끝까지 신뢰하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소박한 감각은 지식이 구사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보다 훨씬 소박하고 정신적으로 고양된 것이다.
그리스어로 죄는 ‘하르마티아’ hamrtia 이다.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쓰여 질 때, 적당한 그리스어가 없어 이런 단어를 차용했다. 그러나 ‘하르마티아’란 말의 본 뜻은 ‘과녁에서 벗어남’이다. ‘실수’, ,과오’라는 말이 더 일차적이다. 그러나 성서의 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실수나 과오는 노력해서 고치면 된다. 말하자면 내가 열심히 도야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실수나 과오는 사라질 수 있다. 그리스어에서 도덕 개념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대개 장인의 수공업적 작업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했다. 반면 구약성서에서 죄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지은 죄이다. 즉 성서의 죄는 구체적인 관계를 전제하는 죄는 누군가에게 짓은 것이고 따라서 죄를 지은 사람이 훌륭한 인격자가 된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죄가 없어지려면 상대방이 용서를 해야 한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죄나 정의 등 도덕적 개념들은 대개 법적 언어로부터 유래했다. 바오로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 그 말도 역시 법적 언어로부터 나온 말이다. 죄인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듯이 상대방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죄 이해가 철저히 관계적 공동체적 개념임을 말해준다. 인간의 행동 선악 판단의 기준은 늘 구체적인 이웃.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현실화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가 인간의 완성에 대해 관념적 감상적 낙관적 신념에 근거하지 않고 철저히 현식적인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인간의 알지 못함을 깊이 인식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겸손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보지 못하면서 실은 보이는 것만 볼 뿐이면서 본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오만이고 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