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데 여러 해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깨달음에도 수준이 있습니까?
라마나 마하리쉬님은 이 질문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티루반나말라이에 오기 전 한 번 그것을 물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어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누가 죽어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몸, 감각, 마음, 지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죽더라도 그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아루나찰라로 가서 마지막 호흡 의 순간까지 침묵을 지키면서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 침묵은 모든 이의 진정한 성품이며, 이 질문을 하는 사람 또한 침묵해질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깨달음에 수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접근하는 방식에 수준이 있습니다. 진지한 접근, 평온한 접근, 그리고 세 번째 접근이 있는데, 세 번째는 노년에 하는 접근입니다.
이 소년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곧바로 쉬바 신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의 예전 환경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수준은 결심에 따른 것입니다. 이들 수준은 자아의 것이지, 깨달음의 것은 아닙니다. 빛이 거기에 있습니다. 눈을 반만 뜨면 그대는 태양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태양은 늘 거기에 있으며 지구에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지구가 태양에 등을 돌리면, 그 결과가 밤입니다. 태양에는 아무런 밤도, 수준도 없습니다. 의식에는 수준이 없습니다. 왕의 자아가 수피 성자 피르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자아가 사라질 때, 왕은 즉시 피르에게로 돌진합니다. 그대 자신의 빛과 지혜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대는 빛과 지혜를 수백만 년 동안이나 지연시켜 왔습니다.
물론 수행도 필요치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늑대처럼 동굴에 숨어 지내야 했지만 그대에겐 동굴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대는 인간입니다. 그대는 질문하려고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답을 발견하십시오. 노력도 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생각의 근원을 발견하십시오. 지금은 그대가 얼마나 진지한가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지적으로는 생각의 근원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냥 침묵으로 앉으십시오. 선술집으로 가지 마십시오. 달려가지 마십시오. 그냥 침묵으로 앉으십시오. 그러면 희열이 올 것입니다. 침묵하십시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희열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대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잃겠습니까? 그대가 잠잘 때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 무엇을 잃습니까?
베일을 걷고 싶습니다. 매 순간 자유이고 싶습니다. ‘나’를 공(空) 속으로 녹이고 싶습니다. 저는 영원을 목격하고 싶습니다.
영원에 대한 목격은 없습니다! 누가 이 영원을 목격합니까? 누가 목격을 합니까? 목격의 이 개념이 목격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목격 너머로 그대의 얼굴을 돌리십시오. “어떤 목격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압니까?”로 얼굴을 향하십시오. 그때 목격은 끝날 것입니다. 이것을 한계 없음, 영원이라 부릅니다. 영원에 대한 단어는 없습니다. 영원의 경험을 말하는 자도 없으며, 영원히 그대와 함께 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그 침묵은 경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내가 말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침묵하십시오. 그대의 침묵을 혼란시킬 어떤 것도 일어나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목격을 초월한 침묵 홀로입니다. 그 바다에는 파도들이란 전혀 없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스승님과 함께 이렇듯 침묵에 앉을 수 있어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대의 질문이 이 침묵에서 일어납니까?
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누구의 마음입니까? 이 마음이 어디로부터 일어납니까? 그대는 입고 있는 옷을 압니다. 그렇지요? 그럼 그대가 입고 있는 이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거기에 일어나는 ‘나의’라는 느낌일 뿐입니다.
마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기 위해 그대는 ‘여기’에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머무르며 몸, 마음, 감각, 현상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시장에 있지 말고 집에 머무르십시오.
그것은 그냥 무(無)인 듯 느껴집니다.
그대의 질문이 이 무(無)에서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리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십시오.
아무런 질문이 없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이곳에 머무르십시오. 거기에는 아무런 질문도, 의심도, 고통도, 어려움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집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이 그대의 성품입니다. 모든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이 일시적인 것은 그대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모든 개념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대의 성품인 여기에 머무르십시오. 그리하면 그대에게 어떤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사랑과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개념들을 초대하거나 개념들을 따른다면, 그 순간 고통의 수레바퀴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나는 몸이다!”가 모든 개념의 시작입니다. 몸은 시간, 현재, 과거, 미래, 탄생과 죽음이라는 끝없는 윤회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기 지금인,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아마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안에서 여기 지금인, 그대의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미루지 마십시오.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 순간을 보십시오. 이 순간이 그대의 진정한 얼굴입니다. 이 순간 안에는 아무런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이 순간 안에서 영원한 것을 보십시오. 이 순간 안에서 이 순간 안에 존재하기 위해 무슨 노력이 필요합니까?
그대가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이제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대는 평화입니다. 그대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분명히 그대는 고통을 벗어나 있습니다. 즉시 그대는 안과 밖 그리고 모든 곳에서 느낄 것입니다. 자, 방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하십시오.
무슨 질문이었는지 완전히 잊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질문될 수 있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망각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을 분리시켜 묶어 버리는 개념들을 망각합니다. 그대가 개념을 망각한다면 죽음의 개념조차도 그대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사랑입니다.
(웃고 또 웃는다)
가까이 오십시오. 망각한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내면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거기에 굴레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굴레라는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상태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오. 이름을 붙이면 해방과 자유라는 또 다른 개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묶여 있다.”를 그냥 사라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어떤 질문도 없습니다. 묶여 있다는 생각인 이 ‘나’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지를 그냥 찾아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