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淵明 《四時》
春水满四泽 춘수만사택 봄 사방 연못에는 물이 가득차고
夏云多奇峰 하운다기봉 여름 기이한 봉우리에 구름이 가득하네
秋月扬明晖 추월양명휘 가을 휘영청 밝은 달은 차오르고
冬岭秀孤松 동령수고송 겨울 산에는 멋진 소나무 홀로 서 있네
寧齊 李建昌(이건창 1852~1898)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初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제(寧齊),
정종(定宗)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예이다.
소론(少論)의 핵심이자 강경파였던 이건창의 가문은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일시에 몰락하여
5대 조항(朝行)인 광명(匡明), 광사(匡師), 광여(匡呂) 형제가 강화도로 낙향하여,
한국 양명학(陽明學)의 태두인 정제두(鄭齊斗)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이건창의 집안은 6대에 걸쳐 150년 가까운 세월을 가학(家學)으로 양명학을 전수하여
한국 사상사에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건창 역시 동생인 건승(建昇) 종제(從弟)인 건방(建芳)과 더불어
조선 말엽 강화학파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893년 함흥부 안핵사로 가 난민을 다스리고 관찰사의 잘못을 조사 파직시키기도 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 특진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해주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군산도에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뒤에 풀려나 향리인 강화도에서 은거하다가 2년 뒤 47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이건창의 조부인 시원(是遠)은 같은 강화도 출신인 철종의 지우를 받아 벼슬길에 나아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사후에 김택영이 편집한 문집 명미당집(明美堂集)과 당의통략(黨議通略조선시대 당쟁 연구서 )이 있다.
제자로는 설주체로 유명한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1965
중국과 조선의 서예 명인들의 서체를 익혀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한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는
고종 11년(1874년) 율어면 금천리에서 출생하여
한말의 혼돈기, 일제의 강점기와 민족의 비극 6.25를 체험 하면서도
글씨 외에 한순간도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았으며,
1965년 임종때 까지도 붓으로 예도(藝道)를 실천했던 탈속웅필(脫俗雄筆)의 대가 였다.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