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1~22)
세상의 부조리를 척결하고 나은 세상을 바랬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왕이어야 했지만,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탔던 것은 (모양 빠지게도) 새끼 나귀이다. 예수님은 좀 다른 의미의 왕이기
도 했지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절차를 집행하는 대제사장이면서도 그
제사의 제물(!)이 되는 일이다. 이전 본문까지가 고별 설교인데 반해서 오늘 본문은 고별 기도로 된
내용이다. 고별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뜻을 새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 다음으로 「제자」를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제자를
통해 「세상」으로 향하는 기도이다. 성경 읽기의 중요한 방식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읽는 것’
이다. 이러한 방식은 나를 새롭게 투영하게 한다. 세상이 험하고 위력적이며 사람을 충분히 절망과
비탄으로 이끌어 가기 충분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세상에 대항하여 「승리」하심을 깨닫게 된다. 우
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 최후의 순간에 “어찌하여 나를 버
리시나이까?”라고 힘겹고 절망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내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고백하시며 숨을 거두셨다. (내 의견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수십만 번 이상, 하나님을 선택할 기
회를 주시지만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매우 의미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다고 추정한다.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고백하실 정도로 밀도 깊은 교통의 순간일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 (아무도 간섭할 수 없
는) 견고한 나의 선택권을 드리게 될 때......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미 깊이 박힌 영혼의 쓴뿌리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
질 정도로 고치기 힘든 일이다. 틀어진 사랑을 예수님은 사랑으로, 틀어진 신뢰를 예수님은 신뢰로
회복하려 하셨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명의 이탈자(유다)가 생길 정도로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들이 시련을 이기고 세사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쁨’과 ‘자유’를 누리기를 소원하셨다. 그것은 ‘진리’를 따를 때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기도로 인하여 제자들은 멸시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멸시하는 세상을 섬
기는 방법으로 살아갔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과 신뢰의 회복을 위한 노력을 제자들이 따르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이 회복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했다. 세상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고 ‘위해서’ 기도할 때 ‘자유’를 얻는다. 방법은 「말」과 「하나 됨」이다. 말은 언어적
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언어적인 모습, 태도, 선택 등 삶의 전체가 ‘말’이 된다. 어쩌면 크리
스천들은 그동안 ‘언어적 말’에 편중된 실천을 하지 않았는가? 말을 앞서고 삶이 바쳐주지 못할 때
영혼들은 우리에게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오히려 사랑과 신뢰는
더 무너질 것이다. 교회가 하나됨으로 세상이 회복되어진다. 사랑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세상은 먹
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됨, 사랑이 없어서 죽어간다. 실제로 세계인들이 소모하
는 식량자원은 적정자원의 160%라고 한다. 남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촌 곳곳에는
너무도 많은 영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왜냐하면 소수의 선진국들이 그 음식들을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음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죽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분열 등은 하나됨을 파
괴하는 죄악들이다. 사랑이 없어서이다. 유일한 생존의 방법은 사랑인데 이를 배반하는 행위들이다.
교회 안에 사랑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 됨’이다.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를 통해서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유일하다. 사랑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의 언어와 삶으로 하나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