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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6~21(115) 어리석은 자가 누구인가 2024. 6. 9
성경을 배경으로 한 우스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이 부자는 잘 먹고 잘 쉬면서 몸 관리를 잘하여 80세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어릴 때 함께 생활하였던 소꼽 동무 친구들은 하나둘 다 세상을 떠나지만, 이 부자 영감은 매우 건강했습니다.
80세 생일을 맞이한 부자는 더 살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돈이 많아요. 좀 더 살고 싶어요. 제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떼어 드릴 테니 더 살게 해 주세요.”부자의 말을 들은 하나님은 반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네가 만일 재산 전부를 나에게 다 바치겠다고 말했더라면, 내가 너의 생명을 2천년 더 살게 해주었을 텐데,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다고 하니 나도 절반을 잘라 천년을 더 살게 해 주마.”
하나님으로부터 ‘2천년을 살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더라면 더 좋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천년을 더 살 수 있다는 말에 부자는 만족을 합니다. 만족을 한 부자는 그 즉시 인근 마을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천년을 더 살게 되었다’고 자랑하며 큰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그 다음 날 아침 부자는 싸늘한 몸으로 시신이 되어 버립니다. 80살 동안 건강했던 사람인지라, 갑작스런 죽음에 가족들 모두 매우 황당해 합니다. 아버지가 남긴 절반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이 이해할 수 없다며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약속을 지키셔야죠. 아버지께 천년을 약속해 놓고 하루 만에 불러 가시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너는 성경을 읽지도 않았느냐? 성경에 보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있지 않느냐?”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장난처럼 보이는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사람이 가진 물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하나님과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일을 할 때에 흥정을 많이 합니다. 어떤 물건을 살 때에도 주인과 흥정을 합니다. 물건의 가격을 더 깍거난 양을 더 받기 위해 흥정을 하기도 합니다. 사고자 하는 물건의 가격이 정찰제로 정해져 있다면,‘이 물건과 저 물건 중에 어떤 물건을 선택할 때에 더 가격대비 효용가치가 높은가?’를 두고 스스로 저울질합니다.
이렇게 저울질하고, 흥정을 하고, 가격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돈의 값어치를 가장 잘 사용하고, 낭비 없이 사용하고, 더 많은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돈이나 물질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뉴스를 크게 장식한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5월 30일,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K그룹의 회장인 최태원 회장과 아내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 판결이 났습니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가사2부는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금 1조 3808억원과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상상 속에서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세기의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금과 위자료로 책정된 것입니다.
최회장은 불복하면서 상고심에서 어떻게 판결날 것인지 세인들은 관심을 가집니다. 대기업 회장이 이혼 한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위자료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많은 돈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오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가지려고 하며, 누려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최태원 회장의 뉴스를 접하고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를 떠 올렸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우리에게 이로울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많아야 오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 말이 하나밖에 없는 정답이라고 다들 판단합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대한민국에서 행복은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행복의 질량 또한 달라집니다. ‘돈이 곧 행복이며 부자인 것이 행복’이라는 사고방식에 대다수 대한민국 백성들이 깊게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물질적 사고방식에 대해, 만화작가 윤서인씨가 지난 주간에 “불행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대한민국의 현실을 풍자하는 그림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림을 보세요.
아이들이 13만원짜리 망고 빙수를 못 사먹어서 불행하다고 우는 그림입니다. 13,000원짜리 빙수도 비싸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13만원짜리 망고빙수를 못 먹어서 불행하다는 말입니다.
5성급 호텔에서 돌잔치를 해주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엄마와 아빠가 웁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5성급 호텔에서 아이 돌잔치를 하는데 기본으로 들어가는 금액이 천만원이랍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자리가 쉽게 나지 않고 예약하는데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어떤 아들은 부모님에게 150g에 7만 5천원하는 한우등심을 사드리지 못하는 서글픈 처지라고 비관합니다. 부모님에게 매우 비싼 한우고기를 대접하지 못한 현실이 아쉬워 우는 것이라면, 효자라고 인정을 해 보겠지만 이 그림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불행한 것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래서 신세비관을 하면서‘이렇게 불행한 대한민국이 나라냐?’라고 말합니다. 결국 대통령이 정치 잘못해서 그렇고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결말을 맺습니다.
저는 생각하기에 13만원짜리 망고빙수를 먹으면 마냥 행복해지고, 5성급 호텔에서 아이 돌잔치를 해주면 부부 금슬이 깨어지지 않는 행복한 모습이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순간부터 행복이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많이 즐기는 것,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기치고 불법적인 일이라도 돈을 벌수만 있다면 개념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윤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악한 물질적 사고방식에 기독교인들조차 관심을 가지면서 따라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물질이 많으면 인생을 편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물질이 신앙을 만들어 주고 참된 행복을 건네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물질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로 등장합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찾아와 “예수님께서 자신의 형에게 명령하여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명령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집의 재산은 장남이 모두 상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재산에 욕심이 나서 형이 당연하게 물려 받는 재산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나서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에 탐욕이 가득함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돈이 많다고, 물질이 많다고 그 사람의 생명 또한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어떤 마을에 아주 큰 부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해에 큰 풍년이 들어 곡식을 저장해 둘 창고가 부족하자 이 부자는 심중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18절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8절 말씀에서는 부자의 행동과 계획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곡식을 더 안전하게 많이 저장하기 위하여 큰 창고를 짓는다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쥐나 해충이 들어와서 귀한 곡식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튼튼하고 큰 창고를 짓는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한 행동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곡식을 거기에 쌓아 둔다’는 부자의 말을 두고, 지혜로운 금융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금액이지만 알뜰하게 저축하면서 큰돈을 만들어 나가고, 만들어진 큰돈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더 큰 돈으로 불여 나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슬기로운 모습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19절부터 등장합니다. 19절 함께 봅시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러 해 동안 풍족하게 쓸 물건’이라는 말에서 철저하게 대비한 부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집안이나 개인에게 예고 없이 다가오는 어떤 불상사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보험을 들어 대비를 합니다. 부자의 입장에서는 창고에 풍족하게 쌓여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든든하게 세워주는 큰 보험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부자는 어떻게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말하나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라고 말합니다. 한글성경에는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원어는 훨씬 더 자극적인 문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Take life easy; eat, drink and be merry(인생을 편하게 지내라. 먹고, 마시고, 그리고 즐기라)’
창고를 지으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였던 부자의 지혜로운 모습이 한 순간 다 사라져 버립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과 물질을 가지고 흥청망청 마시면서 인생을 즐기는 탐욕적인 모습으로 바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런 모습을 염두에 두시고서 “모든 탐욕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의 이런 어리석은 모습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부자를 책망합니다.
우리는 부자의 어리석은 인생을 보게 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현실에서 돈을 모으고 저축하는 지혜로운 행동이 부자에게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저축을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것이 모두 다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있어서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게 됩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중요한 기준이 등장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인색한 자가 바로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물질을 나만을 위해 사용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1. 물질만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이웃과 나눌 줄 모르는 자였습니다.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물질을 쌓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로 인해 즐거움이 온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인 모습입니다.
17절부터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 보면, 전부가 다 ‘내가, 내가, 내가’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입니다. 가족을 위하여 나누어 쓴다는 말이 없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사용한다는 말도 없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로지 내 자신만 나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의식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 죄악은 아닙니다.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챙기는 것은 도리어 장려 받아야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죽어도 나 혼자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이기심에 빠진 추악한 모습입니다. 부자가 보여주는 추악한 이런 행동이 바로 극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을 보면 이웃이 고려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너가 없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본문 그 어디에도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차고 넘치는 곡식을 나누어주고 베풀어 준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창고 가득 가득 채우기만 하면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모습만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어집니다. 마냥 영원히 나에게 즐거움을 줄 것 같은 돈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처럼 한순간 덧없이 빠져나가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주신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의롭게 사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15세기에 스페인의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는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가 큰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비에르는 1549년에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에는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부대의 병사들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들로 구성되게 됩니다.
그는 일평생 인도, 중국, 일본 등에 복음을 전한 사역 때문에 “동양의 사도”로 불리는 분입니다. 1552년 선교하던 중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 때 포르투칼의 국왕이었던 주앙 3세 (1502~1557)에게 유서를 남깁니다. “폐하도 어느 날인가 하나님 앞에 서야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을 위하여 더욱 양심적인 국왕이 되십시오. 사람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왕이 되십시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결산의 날을 위해 준비하십시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 찾아오는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이는 매우 방종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주인이자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물질과 부요함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곡식과 돈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이 땅을 살아 갈 때에 물질이 없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요함은 절대 악이며 가난함이 존중 받아야 하는 미덕’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부자이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의 재물을 착취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것은 가진 자의 착취 때문이라는 물질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회주의 사상에서 말하는 아주 나쁜 편견입니다. 가진 자와 부자의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정당한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손이 수고하여 누리는 부요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 말합니다. 반면, 게을러서 가난함에 빠지는 것은 존중 받아야 되는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정죄 받아야 하는 수치스러움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열심히 돈을 벌고 물질을 모아야 합니다. 속된 말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모야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는 안 됩니다. 돈을 모으고 저축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 때,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결단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가난할 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할 때에도 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잊는 것이 아니라, 어김없이 하나님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논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돈을 대하는 두 가지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거울 앞에 서는 사람’과 ‘창문 앞에 서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거울 앞에 서면 자기 밖에 안 보입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자신의 모습만 더 크게 나옵니다. 거울 앞에 서는 사람은 돈을 가지고 자신만을 치장하고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창문 앞에 서는 사람은 창문 너머로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창문 너머로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해 물질을 쓰게 됩니다.
거울 앞에서 돈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고, 내 삶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6월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만을 찬양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