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잘 다스려야 행복 얻는다. / 지원 스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사계처럼 무상하게 변화한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없었다면, 온전히 한 생을 다 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조금만 추워도 춥다고 하고, 조금만 더워도 덥다고 투덜거린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일상의 작은 변화에도 어쩔 줄을 모른다.
이는 바로 중생심(衆生心)탓인데
고통이 있으면서도 그 고통이 들어오는 문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의 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우리의 주인공인 ‘마음’에 있다.
누구나 제대로 이 마음의 문을 열고 닫는다면
일일시호일(一日是好日)이 되어 행복의 지름길로 갈 수 있지만
정신없이 바쁜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이 가진 마음의 문을 제대로 열고 닫을 수가 없게 된다.
일찍이 원효 스님은 중생의 마음을 두고
‘미혹의 세계도 되고 깨달음의 세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도 보살도 중생심을 바로보고 마음을 정화해 마침내 깨달음을 얻듯이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세상을 살다보면, 물질과 문명 속에 가장 헤매는 건 바로 ‘마음’이라는 놈이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행복은
내가 가진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다.
그럼, 그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의 구조를 불교에서는 팔식(八識),
현대 심리학에서는 의식(意識)이라고 하는데
넓게 말해 잠재의식(潛在意識), 초월의식(超越意識)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의식이란 ‘의식하는 마음이나 사고’를 말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창조하는 마음’이 있다.
‘의식하는 마음’은 무언가를 하려는 생각의 추리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일을 하겠다고 의식한 마음이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가령 ‘오늘 내가 법회에 참석하겠다’든지 ‘누군가를 만나 식사를 하겠다’ 등
어떤 행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모든 생각들은
‘의식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현실은 반드시 의식하는 마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엉겁결에, 무심코, 나도 모르게, 저절로, 괜히,’ 등
평소 규정할 수 없는 숱한 그 무엇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장의 고동, 혈액의 순환, 호흡과 같은 신체의 대사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심장의 박동은 ‘내가 심장을 박동시켜야겠다’라고 의식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며
또한 ‘심장을 멈추고 싶다’고 해서 심장이 멈추어 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심장박동을 정상적으로 해야겠다고 해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더 더욱 아니다. 혈액과 호흡도 이와 같다.
잠들거나 정신을 잃을 경우에도 항상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 의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들로서
자율신경계에 의해 작용한다. 곧 의식은 ‘머리카락이 자라고 싶다’라든가
‘손톱이 자라고 싶다’라든가 ‘몸 속 세포를 분열해야겠다’는 것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의식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
‘의식하는 마음’은 일상생활을 거의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생의 향취와 빛깔을 만들어 낸다.
도덕과 윤리, 종교와 철학, 문학과 체육 등
인간의 의도적인 생체와 정신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것들이 모두 의식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이 ‘의식하는 마음’의 문을 잘 다스려야만 진정한 마음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다음에는 ‘창조하는 마음’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
지원 스님은
△1964년 범어사 석암 화상 계사로 사미계,
1970년 통도사 월하 화상 계사로 비구계 수지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포교국장, 9·14대 중앙종회의원
△1991년 삼보사 창건 △현재 삼보사, 육지장사 회주
2010. 01. 05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