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인수대비
조선전기 불교중흥 이끈 여장부…손자 연산군은 옥의 티
뛰어난 학식의 여성정치인
아들 왕 만들어 권력 쟁취
며느리 윤씨 폐서인 주도
연산군 잔인한 보복 요인돼
연산군 즉위 10년(1504) 3월의 어느날 밤,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왕의 배다른 동생인 이항과 이봉을 잡아와 곤장을 치라는 왕의 전교가 내려진 것이다.
신하들은 혼비백산했다. 한밤중에 대군들에게 형벌을 내리다니.
그러나 이미 연산군은 포악할대로 포악해져 있었다.
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변고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밤이 깊어 대부분의 신하들이 퇴청했음에도
숙직 승지 두 명이 다급히 옥졸들을 대동하고 왕명에 따랐다.
장을 80대씩 치고 나자 이번엔 다시 창경궁으로 끌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자다가 끌려나와 곤장까지 맞은 불쌍한 대군들은 넋이 나갈 노릇이었다.
옥졸들이 만신창이가 된 동생들을 대령하자 연산군은 주위의 모두를 물리쳤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대군들이 끌려온 대궐 뜰에는 두 명의 여성이 결박돼 있었다.
바로 대군들의 어머니이자 상왕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와 엄씨로,
마찬가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연산군에게 마구 차이고 짓밟히던 중이었다.
연산군은 두 대군에게 “이 죄인들을 치라”고 명했다.
이미 삼경(三更, 11~1시)이 넘어 주위가 어두웠기에
이항은 누군지도 모르고 마구 쳤고,
이봉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 ‘연산군은 마침내 참혹한 짓을 하여
두 아들의 눈앞에서 두 어머니를 죽이고
시신을 젓으로 만들어 산과 들에 뿌렸다’고 실록은 전한다.
이성을 잃은 연산군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포악했고 끝없이 악행으로 치달았다.
그는 장칼을 들고 곧장 할머니 인수대비전으로 향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이항과 이봉의 머리털을 한 손에 움켜쥔 채였다.
한밤중 침전 문을 박차고 들어온
손자의 서슬퍼런 모습에 인수대비가 얼마나 놀랐을지 두말할 것도 없다.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분노에 찬 연산군의 일갈이었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바로 폐비 윤씨다.
성종의 후궁으로 입궐했으나 심한 투기로 폐비돼 연산군 즉위전 사사당했다.
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게으르고 투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성종에게 화를 내다 손톱으로 용안에 상처를 냈다고도 전해진다.
인수대비는 이런 그녀를 용납하지 못하여 1479년 폐서인했을 뿐 아니라
윤씨의 근황을 허위로 조작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즉위 1년 비로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실록에는 “윤씨가 폐위돼 죽었음을 알게된 왕이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모두가 쉬쉬하며 숨겨왔던 친모의 죽음.
거기에 할머니 인수대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된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상을 초월한 연산군의 포악한 행태는
바로 친어머니를 폐비시키고 죽게 만든데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와 계모인 정씨, 엄씨가 친모를 죽게 만든 원흉임을 확신했다.
특히 인수대비를 향한 원한은 무척이나 컸다.
연산군은 폭언을 일삼다 못해 분노를 주최하지 못하고 대비를 머리로 들이받기까지 했다.
연산군의 광기어린 보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윤씨의 죽음에 관계된 239명이 죽임을 당했고 이미 죽은 이는 부관참시 당했다.
왕의 명을 받든 유례없는 살육이자, 말 그대로 숙청이었다.
“내가 끔찍한 폭군의 씨앗을 뿌렸구나.” 인수대비는 깊이 탄식했을 것이다.
어미의 바르지 못한 성품이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해가 되리라는 판단으로 며느리를 폐비시켰으나,
오히려 그 결단이 손자를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만드는 씨앗이 돼버렸다.
수많은 인명을 죽인 손자의 잔인함은 자신의 냉혹함에 따른 업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건은 인수대비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공덕을 쌓았다고 자부했으나,
손자의 살기어린 눈을 마주한 순간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뿌린 악업의 씨앗임을 깨달았다.
어찌 그리 냉혹했을까. 왜 조금 더 자비롭고 인자한 삶을 살지 못했을까.
깊은 회한의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인수대비, 그녀는 일찍이 남편을 잃었음에도 남다른 권력의지로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고
다시 손자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며느리까지 폐비시킨 냉혹한 여인이었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학식으로 ‘내훈’이라는 여성교육서를 집필하는 등 뛰어난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세조대부터 직접 경전언해 사업에 참여했으며
아들인 성종 즉위 후에도
불교 정책에 깊숙이 관여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드라마 등을 통해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그녀의 냉혹한 이미지는 불심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인수대비의 불심은 끊임없는 경전 탐독과 불사,
불교를 옹호하는 정치적 발언을 통해 기록에는 남았지만,
그녀의 삶 속에는 그리 깊숙이 스며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비로움보다 철저함이, 인자함보다는 냉혹했던 그녀의 성품이
불교적 가르침과는 적지 않은 괴리감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긴 세월 온갖 풍파에 시달렸던 위태로운 삶의 괘적일지도 모른다.
인수대비는 당대 권력가 한확의 딸로,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가 되어 입궐했다.
그러나 남편은 왕이 되지도 못하고 불과 20살에 세자 신분으로 급사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버지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업보를 받은 것이라는 풍설도 난무했다.
남편이 죽은 후 과부가 된 인수대비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만류에도 궐을 떠났다.
그리고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만이
권력의 중심부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고
치열하게 자신과 아들들을 연마해 나갔다.
본디 총명했기에 그녀의 학문과 지식은 나날이 굴레지워진 조선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세월이 흘러 그녀의 치열한 삶은 둘째아들을 왕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돌아왔다.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까지 이른 죽음을 맞자,
왕실의 최고어른이 된 정희왕후가 인수대비의 둘째아들 자산군을 다음 왕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정희왕후는 중신들의 섭정 요구에 자신보다 인수대비가 더욱 적합하다며 사양했을 정도로,
며느리 인수대비의 뛰어난 면모를 대단히 신뢰하고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성종의 즉위로 인수대비는 마침내 권력의 중심부로 복귀했다.
비록 왕의 아내가 되지는 못했지만 왕의 어머니가 되어 궁궐에 당당하게 입성한 것이다.
혼자 몸으로 자식들을 키우며 비로소 쟁취해낸 권력이었다.
남편의 죽음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결코 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런 인수대비에게 며느리 윤씨는
하찮은 사랑에 눈이 멀어 질투심으로 분란만 일으키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윤씨를 폐비시킨 것은 인고의 삶을 살아온 인수대비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자신에게 철저했던 만큼 타인에게도 혹독했던 인수대비.
그런 그녀에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유일한 약점이 있었다. 바로 ‘불교’였다.
인수대비는 ‘내훈’을 집필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전의 왕비들이 불교를 개인적인 신앙으로 지키려 했었다면
그녀는 한발 더 나아가 불교를 정책적으로 지키려 했다.
성종 집권기 동안 인수대비는 불교를 이유로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다.
주로 성종을 사이에 둔 언문 교서의 형식이었으나
대단히 강경하고 분명하게 호불 의지를 펼친다.
이에 신하들은 인수대비의 불교정책 관여를 개인의 신앙을 넘어선
‘여성의 정치 참여’으로 받아들이고 “암탉의 도 넘은 간섭”이라고
비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그 논쟁이 얼마나 격한 수준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논쟁은 성종 8년
인수대비의 봉선사 금자 사경 행위를 신하들이 문제 삼으면서 불거졌다.
논란이 거세지자 인수대비는 직접 입장을 밝히기에 이른다.
“본인의 사경은 상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요, 사적인 행위이니 국가와 관계없다.
불교가 허망하다지만 예부터 있어왔으며
이는 수륙재를 지내고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남편의 죽음을 직접 모시지 못한 감정적 호소도 덧붙였다.
선왕을 위한 불사라는 대비의 명분을 거절한다면 아들 성종은 불효자가 돼 버리는 꼴이다.
당시엔 성종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신하들도 온건한 태도로 넘겼다.
그러나 선종 11년 “원각사 본존불이 돌아섰다”는 소문으로 재차 논쟁이 맞붙는다.
월산대군이 원각사를 참배한데 대한 신하들의 비난에 대해
“이는 내가 시킨 일이며
불사를 좋아하는 나로 인해 온나라가 시끄러우니 가슴이 아프다”는 언서를 내린 것이다.
“선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에 비하면 불사를 날마다 해도 흡족하지가 않다.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다면 불교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 해로운가.”
불교를 숭상하는 개인적인 신심을 거듭 강조함으로서 그녀는 불사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다.
인수대비와 신하들의 갈등은 성종 15년 안양사 불사 건과 23년 도첩제 폐지 문제로 더욱 격화된다.
특히 도첩제 폐지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대립으로 기록돼 있다.
도첩없는 승려의 증가로 군역의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에서는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도첩제의 전면 폐지를 논의했다.
이때 인수대비가 도첩제 폐지를 반대하는 언서를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공표한다.
선왕의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점,
불교를 완전히 끊으려 한다면 민심이 동요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로
그간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더 나아가 몇가지 이유를 추가했다.
군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승려를 금지한다면 오히려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며
중국은 조선보다 불교를 더 숭상하지만 오랑캐를 잘 막아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승려가 탄압을 받아 죽게 된다면
나라의 기운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승려가 산중에 살기 때문에
오히려 도적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이유였다.
군역을 빌미로 불교를 완전히 배제하려는 유학자들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그들의 논리에 비추어 조목조목 반박한 셈이다.
숭유억불의 움직임이 거셌던 성종대,
인수대비의 이같은 호불의지는
조선전기 불교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주된 요인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녀의 삶속까지 스며들었다면,
그녀가 조금더 자비로웠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조선 최고의 폭군 연산군도, 그로 인한 무수한 죽음도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 또한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악업의 끈을 멈추지 못한
가여운 손자를 생각하며 깊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2. 12. 11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