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십일조(十一條) 내라 하셨을까?”
말라기 3:7-10 누가복음 11:37-42
1.
정말 무더웠던 한 주간이었죠? 계속되는 열대야로 매일 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열이 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게다가 가슴을 타들어가게 하는 뉴스 때문에 더욱 뜨거워진 주간이었죠. 역대 정권들이 세금 올렸다가 대접 받지 못했는데, 증세 문제로 온 나라가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신문과 인터넷을 달군 또 하나의 기사로 열불이 나기까지 했습니다. 제목이 “십일조(十一租) 안 내면 교인 아니다?” 입니다. 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가 교회직원의 의무 규정으로 6개월 예배 참석하지 않거나,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으면 교인의 권리가 중지되도록 하는 헌법 법안을 헌의하기로 한다는 기사였습니다. 교회직원은 집사, 권사 장로를 말한 것이죠. 신문기자가 몰라서 그랬는지, 알고도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알 수는 없는데 “십일조”(十一租)라 “부세 조(租)” 자를 썼어요. 교회에서는 성경에서 “십일조”(十一條)라 “곁가지 조(條)”를 사용한 그대로 하죠. “십일조”(十一條)의 어원은 “십일제”(十一除) 였답니다. 물건을 주문하면, 그 물건을 파는 상인은 받은 물건 값의 1/10을 심부름 온 사람에게 주는 일이 십일제랍니다. 곧 “제(除)한다”는 의미로 “나누고, 더는” 관행에서부터 십일조라는 말이 왔다고 합니다. 상인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얻는데 9/10은 자신이 쓰고, 1/10은 수고하는 사람에게 나눕니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부자일리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죠. 십일제 관행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담깁니다. 우리의 “십일조”(十一條) 헌금 정신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신문은 “십일조”(十一租)를 사용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한마디로 세금입니다. 중세 유럽의 교회가 교구민에게 강제로 징수한 세금을 “십일조”(十一租)라 했습니다. 십일조의 한자 사용의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교회의 헌금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설교 제목을 “하나님께서 십일조(十一條) 내라 하셨을까?”로 정했습니다. 물론 제목 속에 답은 있습니다. 그러나 답을 미리 말하면 설교에 김이 새겠죠? 잠시 답을 묻어 둔 채로, 십일조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하는지 밝히려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십일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밝혀봅니다. 어쩌면 이 설교는 한국교회에 도전적인 소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또는 십일조 헌금을 교인의 당연한 의무요 책임으로 믿어온 신앙에 약간이라도 흔들림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도 성경이 십일조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는지 정직하게 밝히려 합니다.
2.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첫 언급은, 창세기 14:20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입니다. 이 일을 히브리서 7:2-3, 11-15는 멜기세덱을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드리는 근거로 삼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재해석 확장되고, 십일조야말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드렸던 것으로 교인의 의무요 책임이 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이유에 대하여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18-20)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때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의 1/10을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본문에 따라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10을 바치라 했나요? 하나님은 1/10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스스로 한 일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우리가 매 달 십일조를 드리듯, 멜기세덱을 찾아 1/10을 드렸을까요? 성경에는 멜기세덱이 다시 나타나지 않다가 히브리서에서 등장합니다. 이후에 1/10을 계속 드렸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대답은 “모릅니다.”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또 하나의 본문은, 야곱의 약속입니다.(창 28:22) 야곱은 아버지에게 장남 에서라고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어 받고, 분노한 형의 칼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나왔던 때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확신하면서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면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10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약속합니다. 일종의 조건제시인 셈인데, 자, 여기에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달라 했나요? 아니죠. 아브라함에게도 야곱에게도 하나님의 십일조 요청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을까요? 외삼촌 집에서 머슴살이 20여 년이 흘러 그 동안 부자가 되었고, 고향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벧엘에서 했던 약속을 지켰을까요? 성경에는 “지켰다, 지키지 않았다”의 기록이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모릅니다.
요셉은 십일조를 내었을까요? 애굽의 국무총리로 2인자의 자리이니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십일조 바치라 한 기록도 없고, 요셉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모세는? 출애굽기를 1장에서 40장까지 샅샅이 뒤졌어요. 10계명이 있고, 율법과 규례와 법도, 여러 가지 제사에 대한 법이 있지만 하나님의 십일조 요구는 없었습니다.
십일조 규례는 레위기부터 나옵니다. 그것도 마지막 장 27:30-32에 처음 언급됩니다.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聖物)이라. 모든 소와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聖物)이 되리라.” 했습니다. 여호와의 성물(聖物)이란,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민수기에서도 레위 지파가 땅 분배에서 제외 될 때 “레위인은 내 것이라”(민 3:12) 했고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를 내놓으라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내는 1/10의 1/10은 제사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민 18:26) 이것이 여호와의 성물(聖物)입니다. 신명기에도 레위기나 민수기와 같은 입장입니다. 신명기 14:22에는 “매년 토지소산의 1/10로 네 성읍의 레위인”을, 그리고 신명기 14:28은 “매 삼년 끝에 소산의 십일조를 내어 성읍에 저축하여(새로운 1/10이죠)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성중에 거류하는 객, 고아,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신명기 10:12-13, 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섬기며 행복을 위하여 명하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인데 고아,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고 나그네 사랑하여 떡과 옷을 주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지정했습니다.
3.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를 모세5경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근본인 율법서입니다. 율법서가 신앙의 출발이죠. 이 율법서에서 십일조에 대하여 무엇이라 했습니까? 매년 드리는 1/10은 레위인을 위한 것이요, 매 삼년마다 내는 1/10는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깃이 없는 사람들을 먹이고 보살피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서에서 십일조는 레위인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규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십일조가 말라기 예언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떠난 신앙의 잣대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느냐? 온전한 십일조 내 봐라. 창고가 채워지지 않나 하나님을 시험해 봐라.”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 헌금을 강조할 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 받는 길로 전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되는 인물이 있죠. 강철왕 카네기 가(家)의 십일조, 그리고 록펠러의 십일조 헌금생활입니다. 철저한 십일조 헌금생활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소개됩니다. 정말 십일조 헌금생활이 성공비결이었을까요? 물론 십일조도 한 몫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 재산의 사회기부로 환원한 미국사회의 보편적 정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창고를 채우게 하는 방법으로 설교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면 벌 받는다는 식의 해석은 말라기 예언의 왜곡입니다. 예언자가 강조한 것은 약자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질책입니다. 말라기 2:8을 봅니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레위의 언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약자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꾸짖음입니다. 1/10을 내어 재산이 없는 레위 지파를 돌보아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질책이죠. 그리고 십일조를 바쳐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걸음이 십일조 바침이라 하였습니다. 강조점은 무엇일까요? 십일조라기보다는 약자 보호, 레위 사람들을 돌보며 지키는 레위 언약입니다.
4.
누가복음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도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꾸중한 맥락을 이해하면서 십일조 드림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꾸중은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렸다”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공의,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생각해 보시죠. 영생의 길을 묻는데, 예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처럼 행하라 하십니다. 율법학자에게 십일조 잘 내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헌금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이 문제인가요?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고, 바치지 않고의 문제가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교인들의 헌금이 “십일조다. 더 나아가 십의 이조다. 과부의 두 렙돈(눅 21:2)이다.”가 문제의 초점이 아닙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입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내라 한 명령이라면, 십일조 헌금을 내었더니 복 받습니다. 맞지요? 그러면 십일조 헌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벌 받아야죠? 그렇다면 통계적으로 한국교회의 교인 70%는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게 되어 있습니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교인 중 온전한 십일조 헌금을 내는 교인이 26%라 합니다.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로 하나님께서 화 내셨던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며 화낸 문제는 늘 공의의 문제였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자비, 정의로웠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십일조를 바쳤는지 아니었는지는 하나님의 뜻에서 중심주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예상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정말 이런 분은 믿음이 대단한가요?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와 같은 믿음이 신앙적인 것일까요? 또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십일조 드릴 수 없어 하면서도 자신의 살림에 쓸 것 다 쓰는 태도를 신앙적이랄 수 있을까요?
5.
나는 헌금 했으니 믿음이 있다, 구원은 약속 받은 이다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다른 요구는요? 만약 십일조가 하나님의 명령이어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또 십일조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증명된다면, 하나님의 다른 명령들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들 역시 지킴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증명되므로 새겨야 합니다.
우린 성경을 정직하게 읽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십일조 헌금을 바치는 것보다 더 중시한 것이 있습니다. 헌금의 사용 문제였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의 가르침대로라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는 길을 제시한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바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똑 같습니다. 헌금을 부인하거나 하지 말라 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하되, 그 헌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십일조 요구 속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교회를 선교공동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드려진 헌금이 선교를 위해 사용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교회의 정체성 때문에 성도들이 헌금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뜻)를 이루기 위해, 땀 흘린 재물은 생명 그 자체인데, 우리의 생명을 헌금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현대 교회의 법이 되었습니다. 교인은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성도의 자격을 규정하려는 것은 성경적으로 오류입니다. 우리는 이 헌금은 감사신앙에서 출발함을 재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것입니다. 1/10은 하나님 사업,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사용토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십일조 헌금으로 복 받겠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신앙적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를 바르게 쓰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이렇게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 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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