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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7 )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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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신촌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일부러 메카 쪽으로 왔다. 메카 안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현수는 긴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자는 파출소 뒤쪽에 있는 무궁화나무 뒤에 숨어서 이현수를 지켜보았다. 이현수는 인숙과 재혼하기로 했으면서 왜 동거하자고 했을까. 믿어지지 않았다. 둘 중 한 사람이 거짓일 것이다.
인숙은 종종 거짓말을 했다. 폭력과 도박을 일삼는 이혼한 남편과 만나지 않는다면서 미자 모르게 전남편과 가끔 잤다. 술 마시고 찾아오는 남편을 돌려보낼 만큼 모질지 못했다. 불쌍해서 자준다고 했다. 불쌍해서 잔다는 말은 어떤 심정인지 이해되었다. 솔직히 이현수와 잔 것은 그날 밤 호텔에서 그가 불쌍해서였다.
인숙은 처음과 끝이 달랐다. 처음 말은 진짜 마음이었고 끝말은 마음과 다르게 끌려다니는 마음이었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를 인숙은 자주 저질렀다.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을 좋아한다고 미자가 일급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인숙은 윤리 선생이 너무 늙었다며 손사래까지 치며 싫다고 했다. 어떻게 마흔여덟 살 먹은 늙은 남자를 좋아하냐며 젊고 멋진 남자 선생이 얼마나 쌔고 쌨냐며 체육 선생과 미술 선생, 국어 선생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몇 주 안 되어 인숙은 윤리 선생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아무렇지 않게,
“너무 늙어서 싫다며?”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니가 좋다 하니 갑자기 나도 좋아졌어.”
“가짜 감정일 거야. 넌 온화한 사람 매력 없다고 했었어.”
“아니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아.”
마치 지금 이현수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매장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놓고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것처럼 인숙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인숙은 수술대에 올랐고 이현수는 평온하게 매장에 있다. 이현수가 범인이다. 그가 미자를, 인숙을 희롱한 것이다.
무궁화꽃이 얼굴을 자꾸 간질였다. 꽃과 잎에는 진드기가 붙어있었다. 에이, 더러워. 무궁화꽃잎을 따서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은근과 끈기라는 꽃말은 억지로 짜맞춘 포퓰리즘이다. 다시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지는 꽃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았다. 꼭 무궁화여야 했을까? 적어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이어야 했다. 진드기가 많이 끼어 만지기조차 꺼려지는 꽃을 숭상하라고? 좋아하려 해도 좋아지지 않는 꽃이 바로 무궁화였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미자는 횡단보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현수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왼쪽 뺨은 재생밴드가 붙어있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걸어오는 미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자는 이현수 앞에 다가가 똑바로 서서 오른손을 내밀어 노트북을 꽝, 하고 세게 닫았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커피잔이 흔들렸다. 이현수가 커피잔을 잡았다. 미자는 받침 접시를 집어 통유리 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쨍그랑, 하고 통유리가 X자 모양으로 쩍 갈라지더니 툭툭 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매장에 있던 손님들이 하나, 둘 일어섰다. 미자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현수가 일어나 직원들에게 가서 작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님들은 테이크아웃으로 바꿔서 매장을 나갔다. 직원들도 소리 없이 매장을 빠져나갔다. 홀에는 둘만 남았다.
“이제 내 인생에서 꺼져.”
미자가 이현수에게 차갑게 말했다.
“이건, 오해요.”
“애매하고 이중적이고 모호한 변명은 사절해. 더러우니까. 당장 꺼지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을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할 거야.”
“기다려요. 진실은 밝혀질 겁니다.”
“당신에게 진실은 없어.”
문을 열고 메카를 나왔다. 다리가 후둘거렸다. 무궁화꽃은 몇 송이 피지도 않았다. 순 거짓말같으니라구. 삼천리 방방곡곡에 무궁화가 피었다고. 은근하고 끈기있게. 순거짓말. 놀이터 화장실이나 관공서에만 피는 꽃이 너 아니었니? 이쁘기라고 하던지, 감동이라도 주던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진드기만 꾀는 꽃을 억지로라도 숭배하려고 애쓴 60평생이 억울했다.
집으로 돌아온 미자는 생각을 정리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칠천만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 몰랐다.
늘 미자의 계절은 엇박자였다. 여름에는 눈 내리고 추수 때는 장마 드는 격이었다. 이현수와는 상대하기도 싫었다. 급전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대출은 막혀있고 돈을 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이버를 검색해 보았다. 1분 대출 조회를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3천만 원까지는 타사 대출이 있어도 OK 라고 쓰여있었다. 칠천 만원 중 오천만 원은 벌써 썼다. 여기저기 대출을 갚고 승규에게 천만 원 주고 남은 돈은 겨우 천오백 만원 정도였다. 3천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검색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돈이 필요한지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광고 문자가 왔다. 대출문자였다. 중도상환수수료도 없는 서민 희망 대출이 눈에 뜨였다. 카카오뱅크, 국민, 등에서 온 것이다. 신뢰가 가는 광고였다. 카카오뱅크 서민대출광고를 눌렀다. 한참만에 남자가 받았다.
“저, 문자를 보고 전화했는데요.”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칠천만 원 정도 대출을 받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어머, 고맙습니다. 대출이 있는데도 가능해요?”
“추가 대출도 가능하고 싼 이자로 갈아탈 수도 있습니다.”
“어머, 싼 이자로 추가 대출도 가능할까요?”
“본인의 신용도에 따라 가능합니다. 혹시 사업자십니까?”
“예, 특수 사업자입니다.”
“매달 월급을 받으시고 계시지요?”
“물론이죠.”
“그럼, 어디에 어떤 대출을 받고 계신지 말씀해주십시오.”
미자는 주택담보대출과 보험약관 대출, 이자율도 술술 불러 주었다.
“저, 일단 일의 순서가 있는데요. 추가 대출은 가능한데 그러려면 고객님의 신용도를 높여야 합니다. 이렇게 진행하십시오. 보험약관대출이 꽉 차 있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보험회사에서 신용대출을 3천만 원을 받아서 약관대출을 다 갚으면 추가 대출 7천만 원 승인이 떨어질 겁니다.”
“저, 신용대출은 이자가 아주 비싼데요?”
“오늘 1시간만 융통하는 겁니다. 핸드폰에 앱을 깔고 신용대출을 받으면 저에게 전화하십시오. 상환하기 전에 말입니다. 반드시 지키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아, 이런 방법이 있구나. 추가 대출은 이자로 기존 대출보다 3 프로나 저렴하다고 했다. 서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반짝 상품으로 나왔는데 이것도 순서가 있어 곧 품절될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폰에 보험회사 앱을 까는 손가락이 자꾸 떨렸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미자는 중얼거렸다.
1시간 만에 3천만 원이 주거래통장으로 입급되었다. 이율은 12.8 프로였다. 3천만 원을 상환하면 7천만 원이 서민 금리로 1.5 프로 대 대출로 전환된다 하니 걱정이 사라졌다. 죽으라는 법은 없어. 열심히 살아온 덕이야. 미자는 중얼거렸다. 이현수에게 7천만 원을 돌려줄 생각만 가득 찼다. 전화를 걸었다. 여자 상담원이 아까 그 남자 팀장을 한참 만에 바꿔주었다.
“방금 신용대출 받았어요.”
“입금되었습니까?”
“예.”
“그럼, 제가 불러 주는 가상계좌로 빨리 보내주십시오. 3천만 원으로 기존 대출을 상환하면 신용도가 높아져서 저리로 7천만 원 대출 승인이 떨어지니까요. 전화 끊지 마시고 통화하면서 보내실 수 있지요?”
“예.”
미자는 전화를 끊지 않고 불러주는 계좌로 송금했다.
“입금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방금 입금했어요.”
팀장은 말이 없었다. 전화는 끊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문자로 온 전화를 눌렀다. 뚝 끊어졌다. 떨리는 마음에 아들에게 전화했다.
“엄마, 보이시피싱이에요. 보이시피싱 당한 거라구요.”
“카카오뱅크에서 온 문자였어. 그런데서도 사기를 친다니?”
“문자만 봐도 보이시피싱인거 알겠는데 엄마는 모르셨어요?”
이상하긴 했다. 신용대출을 받으면 신용도가 떨어지는 원리를 왜 간과했을까. 모르는 남자에게 3천만 원을 보낸 자신에게 화가 났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아니 넌 돈도 없고 가오도 없어. 경찰에 신고하고 나니 깜깜한 밤이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미자는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올 사람이 없었다. 비몽사몽 몇 시간이 흘렀을까. 미자는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문밖에 어둠 덩어리가 쓰러져있었다. 이현수였다. 누워있는 그는 비천해 보였다. 도로 문을 닫았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미자는 귀를 막았다. 한참 후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옆집 여자였다. 옆집 여자는 이현수를 일으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띵동띵동, 초인종을 누르는 것도 부족했는지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들기더니 발로 문을 찼다. 문을 열었다.
“사람을 세워두고 왜 문을 안 열어주시는 거예요?”
옆집 여자가 껌을 딱딱, 씹으며 건방진 태도로 물었다. 그녀에게서는 술 냄새가 확 났다.
“내 맘이에요.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마시고 그만 집으로 들어가세요.”
“어머? 남의 일이라니요? 왜 말씀을 그리 험악하게 하세요?”
미자는 문을 닫았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 여자는 문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정 걱정되시면 댁의 집으로 모시고 가든가요?”
“저의 집엔 남편이 있어서 그래요.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으니 문을 열어 주세요. 어떻게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할 수 있어요?”
“그렇게 걱정되면 매장으로 데려다주시면 되겠네요.”
“그러고 싶은데 제가 혼자 어떻게 부축해요? 저를 도와주시면 안 돼요? 같이 부축하면 될 것 같아요.”
“저도 지금 힘들어요. 다른 사람한테 마음 쓸 여유가 없다구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댁은 모르잖아요. 그러니 제발 꺼져 주세요, 둘 다.”
“저도 편한 상태가 아니에요. 남편이 남편이 저에게 이혼소송을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저도 죽을 것 같아요. 뭐 죽으면 그만이라 전 괜찮아요. 진작 죽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비천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어요. 제 아들이 죽었는데 제가 살아있고 싶겠어요? 살려고 발악한 건데. 까짓거 이혼하면 저도 편해요. 몰래 몰래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요. 죽어도 되고 바람피워도 되고 몽땅 자유 아닌가요?”
미자는 문을 확 열었다. 여자가 껌을 씹으며 미자를 노려보았다. 마치 내연녀라도 보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고꾸라져있는 이현수를 옆집 여자와 부축해서 현관으로 끌고 왔다. 옆집 여자는 껌을 딱딱 씹으며 화장실에 들어가 오줌을 누고 물도 내리지 않고 나왔다. 여자는 물수건으로 이현수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있지 말고 냉수 좀 떠와요.”
옆집 여자가 미자에게 명령했다. 미자는 냉장고로 가서 냉수를 따라서 여자에게 가져다주었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이현수를 일으키더니 물컵을 천천히 이현수의 목에 기울였다. 물을 반쯤 넘게 거실 바닥에 흘렸다. 냉수를 마신 이현수가 천천히 미자를 돌아다보았다. 미자는 모른 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집 여자가 울면서 말했다.
“사장님,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이 여자와 무슨 관계에요? 혹시 둘이 사귀어요? 실연당한 거예요? 아이고 사장님, 불쌍해라. 이 여자 어디가 뭘 좋다고 아이 진짜 속상해, 아이, 속상해.”
옆집 여자는 울면서 이현수의 더러워진 옷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런 일 없어요. 이상한 상상하지 마세요.”
“그럼, 사장님이 왜 이렇게 폐인이 되어 여기에 있는 거예요?”
미자는 대답 대신 베란다 쪽으로 가서 창밖 가로등 불빛에 달려드는 곤충들을 세고 있었다.
이현수는 거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옆집 여자에게서도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미자는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전 이만 갈게요. 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요. 사람들은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고 떠다미는데 진짜 비인간적이에요.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런대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왜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 불쌍하지도 않나?”
여자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구두를 신더니 껌을 딱딱 씹으며 돌아갔다. 집에는 이현수와 미자 둘만 남았다. 거실에 이현수를 남겨주고 침대로 와서 누웠다. 병실에 누워 있는 인숙이, 술 취한 상태로 거실에 누워 자고 있는 이현수, 바로 몇 시간 전 3천만 원 보이시피싱을 당한 미자, 이혼 소송당한 바람둥이 옆집 여자. 모두 다 도찐개진이었다.
빈속이었지만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씻으려고 화장실로 가다가 현관 앞에 떨어진 휴대폰을 발견했다. 최신형인 걸 보니 이현수 폰이었다. 미자는 이현수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술취한 상태로 깊이 골아 떨어져있었다. 미자는 살며시 이현수 폰을 들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변기에 앉아 처음으로 남의 폰을 열어보았다. 전 남편의 폰도 단 한 번 열어보지 않았던 미자였다.
통화기록을 보았다. 인숙과 나눈 통화기록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잦았다. 통화는 10분을 넘긴 기록들이 대부분이었다. 카톡을 보았다 둘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첫댓글
수고 많으십니다!
행복한 나날들이 되기를~~~~~
@박현환 작가
저도
힘 찬
박수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