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분열
다윗이 베냐민 지파 사울 왕조를 무너뜨리고 유다 지파 왕조를 세웠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한껏 영화와 세력을 뽐냈으나 솔로몬 말년부터 국내외 심상치 않은 분열이 일어나더니 아들 르하브암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즉위 초기 르하브암은 스켐으로 갔다. 르하브암은 왜 스켐으로 갔을까? 이스라엘은 12개의 지파가 연합하여 이룬 왕국이었다. 남쪽 지파는 유다와 벤야민 지파이고 북쪽에는 나머지 열두 지파가 있었다. 다윗도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선출된 다음 북쪽 지파 원로들이 지지를 받으며 왕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2사무 5,1-5). 비록 솔로몬이 왕권을 크게 강화하였으나 언제든지 그것은 다시 약해질 위험이 있었다. 다윗과 솔로몬에 이어 3대째 왕조가 계승되었지만 10지파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다는 현실이다. 따라서 르하브암은 북쪽 지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스켐에서 원로들을 소집한다. 이때 북쪽 지파들은 자신들을 대표로 예로보암을 세웠고 이미 그는 아히야 예언자로부터 통일 왕조를 분단할 운명의 지도자로 예언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다.(1열왕 12장 참조)
르하브암(B.C 933~916)
르하브암은 41살에 즉위해 기원전 913년까지 유다를 다스렸다. 예로보암을 중심으로 북 지파들이 갈라서자 군사 18만 명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그러자 스마야 예언자가 르하브암에게 “동족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듣고 전쟁 시도를 중지하였다.(1열왕 12,22-24; 2역대 11,1-4). 열왕기는 다른 보도는 르하브암과 예로보암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1열왕 14,29;2역대 13,16). 르하브암은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유다와 벤야민 지파 땅 15곳에 요새를 짓고 양식과 무기와 군대를 배치하였다(2역대 11,5-12).
왕조가 분열되면서 북쪽에서 활동하던 레위인 사제들이 대거 남유다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은 다수의 사제계 전승 자료들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예로보암은 왕조를 창건하면서 과감한 종교개혁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베텔과 단에 성소를 만들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하였으며 사제직은 레위지파 전담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허용하였다.
금송아지를 섬겼다는 팩트는 무엇일까? 가나안과 아람과 히타이트에서 신들은 동물들 위에 서거나 앉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동물 자체가 아니었다. 탈출 32,4에 나오는 금송아지도 신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커룹들처럼 신의 수호자 역할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이 구절에서 예로보암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계십니다”(1열왕 11,28).이라는 성경 전통적 표현을 사용하며, 주님께 여전히 충실한 신앙과 백성임을 시사한다. 예로로암은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의 두 성소(창세 12,8=28,10-22 판관 17-18장 아모 3,14=7,13참조)른 택하여,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처럼 주님께 예배 드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문제는 백성들이 예로보암 의도와 달리 베텔과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를 보고 야훼 신앙과 가나안 풍산 신 숭배를 혼동하게 되었다는 결과적 사실에 있다.
르하브암의 어머니는 암몬 출신 나아마로 이방인이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르하브암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 그는 곳곳에 산당을 지어 아세라 목상을 세워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신전 남창들이 그곳을 지키게 했다다. 성경은 르하브암이 주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하느님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한다(2역대 12,1-2).
그 결과 르하브암 재위 5년 때 이집트 파라오 시삭이 유다를 침략해 예루살렘을 약탈했다다. 주님의 집은 물론 왕궁이 모조리 털렸다다.(2역대 12장 참조) 이때 약탈된 금은기물과 무기에 대해서는 10,14절을 참고하여라 아버지 솔로몬은 빼앗온 것을 아들 르하브함은 그대로 빼겼다.
여로보암(B,C 933-91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의 태조인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지파 출신으로 힘센 용사였다. 솔로몬 왕 통치시 북지파를 대표하는 요셉 집안의 총 부역 감독이었다. 그는 소속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로부터 북지파의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들은 바 있다. 여로보암은 신생 북왕조를 창건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종교적 구심점인 경신례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예루살렘 성전과 대립하는 성소를 세웠다. 성소에 금송아지를 세워두고 경배하게 하였다. 금송아지는 이방인의 신이 아니라 야훼의 상징이다. 예루살렘과 같이 케루핌들과 함께 있는 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다 왕조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편집자는 ‘금송아지’라고 폄훼하고 있다. 또한 사제직을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들 중에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임명하였다. 엄청나게 파격적 조치였다. 또한 경신례일도 임의로 정해 에배하였다.(1열왕 12,28-32) 예로보암의 이러한 조치는 유일성소 예루살렘 순례와 예배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북지파가 유다 왕조로 돌아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1열왕 12,26-27).그런데 이것은 신명기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이 일로 예로보암 집안에는 하느님의 무서운 재앙이 내렸다.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아히야는 예로보암 집안이 비참하게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의 아들 아비야는 병이 들어 죽었다. 성 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새가 쪼아 먹을 만큼 예로보암의 집안에 속한 이는 다 죽임을 당했다.(1열왕 15,25-32 참조) 예로보암의 왕위는 아들 나답에게 계승하였으나 바아사의 반역으로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북왕조 여로보암 왕 이후 18명 모두 이 우상의 죄를 범했으며 다신 사상으로 백성을 죄에 빠트렸다. 반대로 유다는 다윗의 통치이념=야훼신앙)을 계승했다.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할 때는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했는가로 평가하였다. 왕들의 평가 기준을 정치에 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두었기 때문이다.
르하브암과 예로보암 중 누가 이스라엘 왕국 분열에 대한 책임이 더 클까?
기원전 550년경 저술된 신명기계 역사서 가운데 열왕기는 예로보암을 비난한다. 그 이유는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성소를 짓고 금송아지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 숭배가 아닌 우상을 숭배하게 했기 때문이다. 반면, 기원전 180년대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하는 집회서는 르하브암과 예로보암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르하브암은 백성 가운데 우둔하고 지각없는 자로서 그의 정책 때문에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도 이스라엘을 범죄로 이끌었고 에프라임에게 죄악의 길을 걷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악이 무척 불어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온갖 악을 따르다가 마침내 자신들에게 징벌을 불러들였다.”(47,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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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신문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8)
이스라엘 두 왕국으로 갈라지다, 2023.03.31.12:01수정 2023.04.05.0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