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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강해(20) 주의 강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
본문 : 살전 4:13-18
<지연된 재림>
데살로니가서가 집필되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
자기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임박한 재림).....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재림은 지연되었고,.....
주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그들 가운데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있던
그들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생기게 될 때....
저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니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게까지 되었습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한 답을 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습니다.
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죽은 사람을 ‘자는 자들’이라고 파격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적 ‘사생관’을 잘 보여줍니다.
기독교에서는 죽은 자를 가리켜 ‘자는 자’라고 말하는데
이는 부활의 소망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의 집으로
향하셨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와중에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와서 옷을 만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그 여인을 찾으시고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게 지체하는 사이 회당장의 집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알렸습니다. 회당장은 절망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이를 살리시면서
마치 잠자는 소녀를 깨우는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소녀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베다니동네에서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오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속히 오셔서 고쳐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장 쫓아오지 아니하시고
계시던 곳에 며칠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사로의 병은 더 심해져
죽어서 장사까지 지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 그제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그리고 베다니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마중 나온
마르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부활신앙을 가르치셨습니다.
<25-26>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육신의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가리켜 ‘자는 자’라고 표현 한 것은
언젠가는 다시 깨어나게 되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후 이 ‘잔다’는 표현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행7:59-60(스데반의 순교)>
59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 바울도 이 부활 신앙이 있었기에
다시 깨어남을 전제로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살전4:14-15, 고전7:39, 11:30, 15:6,
18:51, 베드로도 사용 – 벧후3:4)
영어의 ‘묘지(cemetery)’란 단어도 사실은
헬라어의 ‘잠자는 곳’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자는 것입니다.
<슬퍼하지 말라>......
그래서 이 믿음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슬퍼합니다.
사람이 서로 헤어질 때 슬퍼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슬픔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 가운데 슬퍼합니다.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슬픔은
소망이 있는 슬픔입니다.
육신적인 사랑과 정으로 일시적인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것일 뿐,...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슬픔인 것입니다.
<소망의 근거>....
그러면 ‘소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 즉 ‘부활의 첫 열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가
되신 것이 그 근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죽은 자의 부활도 기대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성도들의
부활 역시 가능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확실한 근거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들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체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5:3-8>
3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절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절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7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의 부활신앙은 단지 들은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에 대하여 확신 있게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을진대” -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한 세대, 한 지역 안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사람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믿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오늘 우리들도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직 사도들의 말씀을 통해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와 성도님들이 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이제 바울 사도는 죽은 자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선권이 주어짐을 말씀합니다.
<14-15절>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절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님 재림하실 때 두 구별된 무리가 있는데 .....
하나는 강림 전에 이미 죽은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먼저 일어나 주님과
함께 올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 다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할 것입니다.
<고전15:51-52>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주님 재림 하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자기의 몸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
홀연히 변화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썩지 아니할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나 살아 있던 자나 다 같은
‘영광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묘사>....
그리고 재림의 순간 일어날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16-17절>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절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면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요5:25-29>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절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미기엘)와
‘하나님의 나팔’이라는 일련의 신호들과 함께..
재림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기 ‘호령’이란 ‘큰 소리로 외치는 명령’이란
뜻의 단어인데,....
배의 선장이 노 젓는 선원들에게 외칠 때라든지....
군대에서 지휘관이 사병들에게 구령을
내릴 때와 같은 경우에 쓰인 말입니다.
어떤 말씀의 호령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재림을 알리는 주님의 호령 일성이
터져 나오면, 천사장의 복창 소리가 따르게 될 것이고,
곧 이어서 천지를 아니 우주를 진동시키는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그때까지 살아 있던 성도들과 함께 공중으로
휴거되며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휴거’에 대한 가르침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마24:40-42>
40절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절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바울의 마지막 때의 묘사는 바울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환상 중에 마지막 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계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휴거의 결과 -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7)고 했습니다.
성경에 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 말씀처럼 귀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
그러니까 천국의 모습을 사도 요한이 보았는데..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저희와
친히 함께 계셔서”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천국에서 어떤 생활하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가장 강조하는 내용이
바로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천국 생활은 바로 여기에
모든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맺는 말씀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제 바울은 권면을 마치면서
이렇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18절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자 목표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야말로
모든 육적 영적 고난에서 ‘위로’가 되어줍니다.
“주님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이 한 마디 말이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시작된 작은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지역의 본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 지식적인 면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눈앞에 있는 환란으로 인해, 재림 전에
죽는 성도들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부활에 대한
명료한 지식과 분명한 확신을 전해 주면서...
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서로 ‘
위로’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도
마치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요 사도들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을 때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을 때에 모든 환란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항상 깨어 주님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같이
오늘 우리들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며,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소망 중에 깨어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