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의 흑역사
瓦也 정유순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명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이다. 건축 양식은 네오고딕을 따르고 있다. 주보성인(主保聖人)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無染始胎) 복되신 동정 마리아이며, 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고, 줄여서 ‘명동대성당’ 또는 ‘명동성당’으로 부른다.
<성모 무염시태(無染始胎)>
1898년(광무 2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유적지로 사적(제258호, 1977년 11월 22일)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인천의 답동성당, 대구의 계산성당, 전북 전주의 전동성당, 충남 아산의 공세리성당 등과 더불어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에 지어진 대표적 고딕 양식 성당으로 분류된다.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전례(典禮)가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명동성당 전경(옛 명례방) - 네이버 캡쳐>
김범우(金範禹, ?∼1786) 토마스는 자기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公所)예식을 드렸다. 포도청이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 됐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그 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守護通商條約)이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천주교에 대한 종교자유가 허용된 후 새로 성당을 지은 것이 명동성당이다.
<김범우집터 안내>
<하나금융그룹 - 김범우 집터>
현재의 명동성당 자리는 고종이 하사한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이 있었는데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 그리고 건축 당시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명동성당의 언덕 아래에 왕실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풍수상 곤란하다.”라며 반대해서 건축이 지연되었다. 또한 성당을 짓는 실무 기술자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 버려서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명동성당>
그리고 1911년에는 명동성당 주변 진고개가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지정되고 휘황찬란한 상점들이 들어서 길을 차지해 버려 명동성당은 진입로가 막혀 있었다. 이때 명동성당의 뮈텔 주교는 진입로 확보를 위해 전전긍긍하던 중 빌렘 신부의 편지를 받고 뜻밖의 기회를 맞게 된다. 빌렘은 안중근, 안명근 등 독립지사들과 가까이 지낸 신부였는데 빌렘은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듣던 중 독립지사들의 활동을 알게 되어 뮈텔에게 편지로 알렸고, 뮈텔은 한걸음에 조선 총독부 장군 아카시에게 달려가 이를 밀고(密告)했다.
<니콜라 빌렘 신부-네이버캡쳐>
뮈텔의 밀고를 받은 조선 총독부는 즉각 행동에 돌입했고 안명근 체포를 시작으로 600여 명에 이르는 독립지사를 구금하고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것이 105인을 검거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해 독립운동의 씨를 말렸던 ‘105인 사건’의 발단이다. 뮈텔의 밀고는 독립운동 조직을 파괴하는 데 주효했다. 조선총독부가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자 뮈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동성당의 진입로 해결을 요청했고 일제는 즉시 명동성당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수많은 독립지사의 목숨과 맞바꾼 매국의 길이 되고 말았다.
<뮈텔 주교 - 네이버캡쳐>
뮈텔주교가 안명근 야고보의 고해성사로 얻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대가로 당시 일본인과의 성당부지(聖堂敷地) 소송 문제에서 이득을 얻었다. 명동성당은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부지로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으며 그 부지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일부다. 그리고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5일에 ‘황국국위선양평화(皇國國威宣揚平和)미사’를 거행하고 황군 위문금을 모금하였다.
<명동동성당 내의 김대건신부 상>
안명근의 동갑내기 사촌 형인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도 가톨릭 신자였고 안명근이 고해성사를 하며 독립운동을 이야기한 것과 같이 안중근도 국외에서 거사를 계획할 때 가까운 신부들과 상의했다. 가톨릭 신부가 일본에 밀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가톨릭은 상당히 예의가 있고 정의로운 종교라는 인식이 강하다.
<명동성당>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고 죽기 전에 마지막 미사를 간절히 원했고 이때 빌렘 신부가 그에게 미사를 행한 후 “신이 너의 영혼을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고 있으라.”고 다짐했지만, 그러나 영혼을 거두어 주겠다던 가톨릭은 안중근이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신자 자격을 박탈했고 안중근은 사후 100년 동안 가톨릭에서 제명(除名)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동상 - 서울 남산>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쇠붙이로 된 생필품이나 철로 등과 마찬가지로, 군수품으로 쓴다며 종탑의 종을 공출당할 뻔했다. 이때는 가톨릭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자에게 금속품을 일제에 헌납할 것을 장려하던 시절이다. 이에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종을 치는 끈을 거두고 종탑을 폐쇄했다. 그래서 종은 무사했지만, 대신에 성당 제대 앞에 있던 철재 영성체 난간[제단과 신자석(信者席)을 분리하는 분리대]이 뜯겨져 목재로 교체해서 지금에 이른다.
<명동성당 내부(중앙)>
한국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뻔했으나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人民軍)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은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 가톨릭에 제안했다. 하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 그 후 1947년,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명동성당 내의 장동호 석상>
한일병탄(韓日竝呑) 직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개신교 신자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가 가톨릭교회가 주도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빠져나오던 대표 을사오적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성당 언덕 아래의 길가에서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력거꾼 박원문이 이를 가로막았다가 칼에 찔려 그가 대신 죽고 실패했다. 이완용도 칼에 찔렸지만, 당시 최고 흉부외과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지하철3호선 안국역에서>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해왔다. 명동성당에서는 특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던 1987년 5·18 제7주기 추모미사가 거행되었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학생농성단의 은신처로 역할을 다했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집전되었다.
<명동성당역사문화관>
1984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敎皇)이 방문한다. 명동성당 건립 이래 가장 큰 손님이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성당 오른편에 있는 명례방 집회 성화와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ㆍ이승훈 베드로ㆍ김범우 토마스 성화, 교황 방한 기념 부조를 축복했다. 이어 제대 앞에 마련된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한국 천주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요한 바오르2세 교황 - 네이버캡쳐>
2014년에는 사목(司牧)방문차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교황은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한국종교 지도자들과 만난 후 대성전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하면서 남북한의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했다. 그리고 2018년 9월 14일 아시아 최초로 교황청이 공식 승인한 국제 순례지가 됐다. 교황청은 이 길이 한국 천주교의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담았다는 점을 인정해 국제 순례지로 승인했다. (#붙임 서울순례길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 - 네이버캡쳐>
그래서 명동성당이 순례길 출발지로 지정된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그 길을 걸으며 영혼의 평안과 위로를 받기 원하지만, 독립지사들의 한이 맺힌 길에서 어떤 평안을 느낄 수 있을까? 영혼의 구원을 배신당한 길에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도 영혼을 배신한 그들은 스스로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일제에 부역하고 영혼의 구원에 배신한 것을 천주님께 진심으로 고하고 회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3위 시성>
#붙임
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 말씀의 길(8.7㎞, 9개소)
1코스 말씀의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자발적으로 싹을 틔운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를 따라 걷는 길이다. 명동성당~장악원터(김범우의집)~이벽의집터(한국 천주교 창립 터)~좌포도청 터~종로성당~광희문~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석정보름우물~가회동성당의 코스이다.
2코스 생명의 길(5.9㎞, 9개소)
2코스 생명의 길은 박해와 순교의 장소로 가는 길이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은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걸었던 길이다. 가회동성당~광화문 시복 터~형조 터~의금부 터~전옥서 터~우포도청 터~경기감영 터~서소문 역사공원~약현성당의 코스이다.
3코스 일치의 길(29.5㎞, 8개소)
3코스 일치의 길은 순교 성지를 돌아보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일치된 삶을 살자는 뜻을 담은 길이다. 약현성당~당고개순교성지~새남터순교성지~절두산순교성지~노고산~용산성심신학교~왜고개성지~삼성산성지의 코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주교 서울 순례길에서 발췌
https://blog.naver.com/waya555/223587958095
첫댓글 명당성당
그거리를 헤메던시절을연상케하네요
와야님 서울천교순례길
잘보고갑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겨울에 순례길 답사 한번 하시지요.
넹
글귀에 감동이네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감동 받으셨다니
저도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