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 5
이제부터는 마음껏 그리워하겠습니다
계절은 어느새 한 달이 흘러 있었다.
장마가 지나간 숲은 더욱 푸르러졌고, 계곡은 맑은 물소리를 내며 여름을 품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소진은 카페 앞 화단에 핀 들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지영은 텃밭에서 막 따온 상추와 고추를 손질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카페 앞에 은색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작은 아이가 뛰어내렸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계곡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아빠! 물소리다!"
뒤이어 젊은 여인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 오는 토요일,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한 달 전과는 전혀 달랐다.
굳게 닫혀 있던 표정 대신 편안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진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셨네요."
남자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약속이요?"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제 가족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제 아내입니다."
아내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말했다.
"그리고 제 아들입니다."
아이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지영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배고프지?"
"네!"
모두 웃음이 터졌다.
카페 안에는 오랜만에 밝은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점심 식사를 하며 남자는 전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
신기한 것은 이제 그의 입에서 '그 여자'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대신 자연스럽게 '우리 엄마'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들이 할머니 이야기를 자주 해 달라고 합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진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요?"
"할머니는 멀리서도 아빠를 아주 많이 사랑했던 분이라고."
남자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인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아들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엄마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소진은 조용히 웃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 남자의 상처가 비로소 아물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남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어머니께 다녀오려고 합니다."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오세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같이 가 주실 수 있을까요?"
소진은 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도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모공원은 한 달 전과 다르지 않았다.
초록 잔디 위로 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있었고, 나무에서는 매미 소리가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남자는 꽃 한 다발을 들고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손에는 어린 아들의 작은 손이 잡혀 있었다.
아이는 봉안함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응."
"여기가 할머니 집이야?"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할머니가 계신 곳이야."
아이는 국화 한 송이를 정성껏 올려놓았다.
"할머니."
"저는 민준이에요."
"다음에도 또 올게요."
아이의 맑은 목소리에 남자는 끝내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번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가족을 이어 준 사랑에 대한 감사였다.
남자는 봉안함 앞에 조용히 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저 왔어요."
"이번에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가 꼭 보고 싶어 했을 며느리입니다."
"그리고 엄마 손자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엄마."
"이제 알았습니다."
"엄마는 한 번도 저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제가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는."
"엄마를 숨기지 않겠습니다."
"엄마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아들에게도."
"손주들에게도."
"엄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며 살겠습니다."
그는 봉안함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부터는..."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어머니를 마음껏 그리워해도 됩니다."
"이제는 아무도 내 마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껏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 몫까지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국화꽃을 흔들었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내려와 그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마치 어디선가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
아들이 아버지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아빠."
"응?"
"나도 커서 아빠 많이 사랑할게."
남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 웃었다.
"아빠도."
"너를 평생 사랑할 거야."
조금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랑은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것이었다.
미움은 한 사람에게서 끝날 수 있지만,
사랑은 누군가가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날 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소진은 창가에 홀로 앉아 원고를 펼쳤다.
계곡에서는 변함없이 물소리가 흐르고 있었고,
달빛은 숲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만년필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었다. 사랑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다시 그리워할 수 있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리움은 슬픔의 끝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있다는 가장 따뜻한 증거였다.'
원고를 덮은 소진은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도 한 사람의 인생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비추는 작은 빛이 되어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