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조부."
나는 대답했었다. 우리말로 한자를 읽으면 대장부(大丈夫)라고 번역되는 그 말. 대장부도 아니면서 나는 대장부처럼 씩씩하게 괜찮다고 대답했었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실은 외롭고, 허무하고 그래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실은 누구의 옷자락이라도 움켜쥐고 날 좀 어디론가 데려가 줄래요, 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내가 언니였다면 나는 지난 일 같은 건 그냥 아름답게 간직해 버리고 말거야. 노래방 같은 데서 노래 부를 때만 조금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릴 거라고."
"잊는다고?"
내가 물었을 때 록이는 맥주잔을 들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잊는 거, 잊어버리는 거 말이야."
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내 자신이었다. 그토록 겁 없이 달려가던 나였다.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그를 만나지 못해도, 영영 다시는 내 눈앞에 보지 못한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를 떠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그때 나는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여자를 질투했었다. 칸나라는 여자는 물론이고,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있던 뚱뚱한 아주머니까지. 공원을 걷다가 그가 일으켜 세워주던, 넘어진 열 살짜리 꼬마 아이까지. 그게 누구든 그가 나 이외의 모든 여자에게는 찡그린 표정만 보여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게 터무니 있든 없든 나는 그랬다. 나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말이야, 두꺼비집이 닫히는 것처럼, 물기 묻은 전원에 스위치가 자동으로 차단되는 것 처럼, 사랑 같은 거, 호감 같은 거, 느끼려는 순간 철컥 하고 스위치가 내려져.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감정이 암전된 것만 같아.'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내가 더 일찍 혼자있는법을 알았더라면, 그가 조금만 더 나를 이해하려고 했었더라면, 그날 내가 그에게 그렇게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우리는 오늘 이렇게 마주 앉아 있었을까.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멀리서 보면 대개 모든 사물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걸까?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내 자신이 싫어지는 때가 이런 때다. 늘 하던 실수를 늘 하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그리고 심지어 그것에 뻔뻔해지지도 못할 때.
하지만 다음번에 그 순간이 온대도 내가 결국은 그 실수를 또 하고야 말 거라는 걸 알 때.
그리고 내가 고작 거기까지의 인간이라는 걸 그래도 또 깨닫게 될 때.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 스럽기를, 내가 고통 스러운 것보다 조금만 더 고통스럽기를…….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괜찮지 않아요. 아파요……. 많이 아파요."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나 아직 사는게 뭔지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해놓고 하는 후회보다 하지 못해서 하는 후회가 더 크대."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후회하지 마, 부끄러워하지도 마.
너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편이고, 행복한 사람들의 편이야…….
왜냐하면 네 가슴은 사랑을 받았고 사랑했던 나날들의 꽃과 별과 바람이 가득할 테니까.
쓸쓸한 생은 많은 사람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을 허용하지 않는데, 너는 한때 그것을 가졌어…….
그건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거잖아.'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