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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의 산행일기-3> 앗! 두 번의 실수!
1. 첫 번째 실수
아침 8시 30분, 내가 도착했을 때 린우드 플라자엔 향화 밖에 없었다.
“선배님,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요.”
“아직 안 왔나?”
“그럴 리가요. 이렇게 아무 없는 걸 보면 벌써 떠났나 봐요.”
“아무리 연락도 없이 우릴 두고 그냥 떠났으려구. 나한테 전화 온 거 하나두 없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이상했다. 향화네 식구들(개 아톰과 큰아들 재원이)과 조금 서성이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전화를 걸기로 했다. 전화번호를 찾으니 이춘길 씨 번호가 젤 먼저 나왔다. 이춘길 씨의 이야기인즉슨 오늘은 캣츠킬 가는 날이라 8시 출발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체크해 보니 장기영 동지와 배윤근 선배님의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전날 전화기 벨 소리를 죽여 놓고 잊어버리고 있어서 벨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암튼 루트 세븐틴 선상의 우리들 접선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향화는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떠난 지 10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접선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휴게소에서 회원들을 만났을 땐 돌아온 탕자처럼 괜히 코끝이 시큰하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민망하니까 괜히 김주천 회장에게 모이는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퇴박을 주었더니,
신양자 형님 : “캣츠킬 갈 땐 8시에 떠나는 거잖아.”(무게 있으시게)
미미 씨 : “멀리 갈 땐 언제나 일찍 떠났는데.....”(혹여 화낼까봐 조그만 목소리로)
그 외에도 여러분들이 한 마디씩 하셨다. 나는 계속해서 웹사이트에 시간을 적어 놓지 않은 탓이라고 그래도 뻣뻣하게 굴었다.
근아 아빠 : 회장이 왜 시간 연락을 제대로 안했어? (내가 웃긴다고 실실 웃으며)
이춘길 씨 : 연중 산행 표에 시간이 적혀 있습니다. (정색하며)
나 때문에 산행에 차질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이 화기애애하게 웃는 바람에 덜 미안했다. 그리고 보니 캣츠킬 갈 땐 늘 일찍 떠났다는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이 있다. 슈가로프가 캣츠킬이라는 것. 나는 그저 업스테이트 뉴욕인 줄로만 알았다.
2. 아, 힘들었던 산!!!
슈가로프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자 회장단은 머리를 맞대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코스로 올라갈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한다. 코스를 결정하고 올라가는데, 비교적 길이 평탄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어서 그런대로 분위기도 괜찮았다. 올라가면서 보니 지난번 폭우 때 비가 할퀴고 간 상처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여기저기 많이 쓰러져 있었고, 산길 모퉁이들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곳도 적지 않았다. 어려울 일이 없는 평탄한 길이 그런 상처들로 인해 조금 거칠어졌다. 그래도 올라가는 길 마디마디마다 얼마나 예쁜 야생화들이 피었는지 꽃에 취해서 마음은 마냥 황홀했다.
처음엔 쉘터에 올라가서 점심을 먹기로 예정했었다. 우리 때문에 산행이 워낙 늦어져서 쉘터까지 갔을 땐 벌써 12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배가 고프니 우선 식사를 하고 희망하는 사람만 정상에 올라갔다 올까. 아니면 정상에 올라가서 먹을까. 의견이 분분했으나, 모두들 점심 식사 후에 올라가는 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서, 강행군하기로 의견을 통일했다.
정상에의 길은 어느 길이든 쉽지 않다. 안내판에 보면 정상까지는 1마일 조금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보이는 산은 깍아지른듯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경사가 진 높은 봉우리였다.
“어휴, 이 높은 산을 언제 올라가지?”
옆에서 서석범씨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보기엔 그래도 막상 올라가면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
그나마 서석범씨 보다는 산악회 고참인 나는 내 경험을 얘기하며 위로해 주었다.
2년전 11월, 내가 처음 산행에 나왔던 날도 그렇게 눈앞에 갑자기 솟은 산을 넘어간 적이 있다. 에구머니나, 저 높은 산을 또 어떻게 올라가나?,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으니 동행했던 분들이 15분이면 올라가요” 하길래 설마 했는데, 정말 곧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산 꼭대기에 올랐던 경험이 있다.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위로 차원인지 윤종빈씨가 ‘정상으로 올라가는 다른 코스가 경관이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다.
“거긴 올라가기 쉬워요?”
“거긴 처음부터 치고 올라가지요. 그렇지만 코스가 아주 아름다워요.”
“처음에만 그런가요? 아니면 끝까지 그렇게 치고 올라가야 하나요?”
“그거야 끝까지 그렇지요.”
“에이, 그럼 더 어렵잖아요.”
종빈씨는 내 말에 하하하, 웃었다.
올라가는 길은 고되고 고되었다. 바위를 오르고, 내리고, 미끄러지고, 좁은 틈을 비비며 통과하기도 하고, 계속 경사진 어려운 길을 올라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산의 반쯤은 올라간 것 같아 “이제 얼만큼 남았어요?" 물으니 근아 아빠가 “조금 남았어요.” 한다.
산에선 특히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조금 남았어요’, 하고 나서 조금 남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그렇지 않느냐고 되묻자 근아 아빠가 대답 대신 씨-익 웃는다.
거의 다 올라갔는데, 어쩐 일인지 신양자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올라오는 길이 험해서 형님께선 쉘터에 남으셨다는 것이다. 누가 같이 있느냐고 물으니 혼자 남으셨단다. “어머나, 어떻게 혼자 계시지, 무섭게?” 했더니 모두들 걱정 말라고 한 마디씩 한다. 그래도 겁이 많은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점심 먹을 자리가 오늘처럼 비좁긴 처음이다. 마땅한 널직한 공간이 없어 정상의 끝자락 바위 위에 자리를 폈다. 바위 앞은 낭떠러지다. 그래도 거기에 일자로 두 줄, 마주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향화가 물오징어를 삶아서 푸짐하게 썰어 왔는데, 중요한 초고추장을 빼먹었다. 누군가 사온 삶은 돼지 머릿살에 고추장 양념이 딸려 와서 그것으로 찍어 먹기도 하고, 내가 가져간 고추장 박은 마늘종 장아찌와 함께 먹으니 별미였다. 그럭저럭 다들 끝낸 걸 보면 삶은 오징어 회는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인 것 같다.
점심이 끝난 후 마시는 냉커피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커피의 주인은 늘 장기영 동지다. “장 동지, 장 동지 커피가 제일 맛있으니 언제나 커피는 장 동지가 담당하세요.”, 누군가가 말하니, 장 동지는 “그럼 내가 언제나 커피 담당인 대신 누가 내 밥 싸오실래요?” 한다. 오지랖 넓은 내가 얼른 “밥은 내가 가져올게요.”하고 말았다. 사실 반찬이 어렵지 밥 가져가는 게 제일 쉽다. 향화하고는 밥은 내가, 반찬은 향화가 담당하기로 둘 사이에 이미 약조가 되어 있다. 혼자 사는 내가 반찬 장만해오는 일은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는데, 얼마나 잘 됐는지 모른다. 나더러는 장아찌(홈메이드의 맛있는 장아찌다)만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장 동지의 밥까지 맡게 되었다. 아뿔사! 밥이 얼마나 무거운데. 금방 후회했지만 엎지러진 물이다.
3. 두 번째 실수
하산 길은 정신을 딱 집중시키고 조심해서 내려왔다. 워낙 올라가던 길이 험해서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쉘터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오자 근아 아빠가 야호! 도 아닌 무슨 소리를 냅다 지른다. “무슨 일이에요?” 물으니, 신양자 형님께서 우리 ‘목소리라도 먼저 들으시면 기뻐하실 거’라는 것이었다. 우리 산악회의 우정이 이런 정도구나. 마음이 오히려 경건해졌다. 나중에 합류한 신양자 형님은 “햇빛이 너무 좋아서 여기서 한 숨 잤어. 너무 좋았어.” 하신다. 점심은 어떻게 하셨어요? 먹을 거 덜어 놨었지.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섭긴. 옆에 있던 회원들은 아니 형님을 보면 오히려 곰들이 도망갈 걸. 놀리면서도 신양자 형님의 무사를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나는 어떻게 그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 꿀배 형님이 주신 곶감을 꺼내 잡수시라고 드렸다. 형님은 그것을 또 우리들과 나누어서 드셨다.
하산 길은 쉘터부터는 수월해졌다. 올라갈 때와 달리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 휙휙 지나치던 들꽃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산길 바닥엔 조그만 꽃들이 마치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는데, 그것을 향화는 미국 할미꽃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우리 누구도 그걸 믿지는 않았다. 이춘길씨는 또 동그란 떡잎의 나무 새순이 땅바닥에 깔리듯 돋아난 것을 보고 “여기 이거 보세요. 클로버도 이렇게 많이 나왔어요.”, 감동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니라고 말했더니 고개를 갸웃갸웃 하며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동그란 잎들은 클로버처럼 세 잎이 아니고 나무 새순이라 단지 잎사귀가 두 개였다. 그제야 춘길 씨는 “아이, 난 꼭 클로바인 줄 알았네.”하며 애꿎은 머리를 긁었다.
쉘터 오기 전에 경사가 심했던 지점에서 김경배 형님(나랑 동갑이지만, 워낙 산악회 연륜이 높으니 김경배 씨! 하고 부르기가 좀 그래서 김경배 형님!하고 불러드린다)께서 미끄러지신 일 말고 큰 사고는 없었다. 김 형님은 원래 산에서 나르시는 분이라 가끔 잘 미끄러지신다.(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진짜 사고는 산 계곡을 한참 내려와서 일어났다. 향화가 발 뿌리의 아기 머리통만한 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얼굴을 똑바로 땅에 부딪쳐서 이마와 입술에 흙이 묻고 코도 벌게졌다. 무릎도 땅에 팍-꿇었다고 하니 다쳤을 텐데, 아프다고 하면서도 집에 가서 보겠다고 한다. 얼른 티슈에 물을 묻혀 입술과 이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긴 했으나 얼마나 아플지 짐작이 간다. 그렇게 살짝 넘어진 것 같아도 그 넘어지는 충격은 아주 크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할 것 같아 걱정이다. 그러나 뼈가 부러지거나 더 중상이 아닌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자며 별로 위로가 되지도 않을 말로밖엔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하산 길은 계곡 물을 건너는 일이었다. 올라갈 적에도 잘 건넜고, 내려올 때도 거의 다 잘 건넜는데, 마지막 건널목에서 그만 발이 미끄러지며 내가 풍덩! 물에 주저앉았다. 주저앉는 바람에 어디 다치진 않았으나 다 내려와서 물에 빠지니 좀 황당했다.
오늘 산행은 너무 힘들었다. 힘들었던 만큼 정상에 올라갔을 때의 희열은 바쳐진 고통과 노력에 비례한다.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두 가지의 실수를 통해 유익한 학습도 할 수 있었다. 첫째는 산에 임하는 자세에 좀 더 성의가 있어야 하겠다는 점이다. 회원들 틈에 그냥 묻어 다니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도 사전에 준비가 완벽해야 하겠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산행에선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의 줄을 놓지 말아야 함이다. 자연의 변화에 언제든 대치할 수 있도록 정신무장을 소홀히 하면 안되겠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
그 모든 중요성을 오늘 비로소, 몸으로 배웠다.
첫댓글 여고 졸업 35주년 class reunion으로 7뱍 8일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이 여기에요. 선배님(선생님보다 더 가깝게 느껴져 앞으로 선배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같이 산행은 못했지만 생생하게 그림이 그려지네요. 다치신 향화씨는 괜찮으신지...
매주 이영주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서, 선배님의 기억력은 대단 하시구나하고 경탄을 합니다. 산행중에 있었던 모든것을 메모도 하지 않고 전부 기억하시고, 산행중에 보고 느낀것들을 생생하게 기록하시는것을 보면, 과연 "전문가"는 무언가 다른다는것을 새삼 느낍니다. 항상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리고 "전문 산악인","전문 문학인" 그리고 "전문 요리사"들과 같이 매주 산행을 하는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영주 아우님! 산나물 입니다.매번 산행기 올리느라 고생많습니다. 올리지는 못하고 언제나 읽기만 하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산행기 마니마니 올려주세요.
산나물 왕형님의 등단을 추카추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