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피엘라나 에라브레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의 싸움이었다.
에라브레는 란테르트가 단번에 두 사내를 꺾은 모습을 보며 역시 대
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면 사피엘라는 그가 싸우는
모습이 검을 들고 싸우는 것에 비해 배나 흉악함에 눈을 살짝 찡그렸
다. 란테르트에 대한 불만 이라기 보다는, 싸움 그 자체가 주는 살벌
함 때문이었다. 게다가, 곁에 있는 동생을 보니 얼굴에 희색을 띄는
게 싸움이 끝나고 나면 란테르트에게 이런 싸움방법을 가르쳐 달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피엘라와 에라브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싸움은 계속되었다.
"제법이구나, 계집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검사치고는."
덩치 큰 사내는 겉으로는 이렇게 큰소리를 탕탕 쳤지만, 내심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읾을 느꼈다. 수많은 싸움을 해본 그로써
도, 그렇게 빨리 자신의 부하를 때려 눕힐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란테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미소는 여전했으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당장 주위에 빛이 사라진다 해도 그의 눈만은 빛날 것
같았다. 비록 보이지 않아 초점이 없었으나, 그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상대는 정신없이 속으로 떨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물러 설수는 없었
다. 용기를 내어 한걸음을 옮겼다.
란테르트는 지금 상대가 자신을 두려워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역시
이런 종류의 싸움은 신물이 날 정도로 겪었기에, 단지 느낌만으로 상
대가 어떤 심정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용서해 줄테니 물러나라, 라는 이 한마디를 내뱉기만 한
다면, 굳이 한차례 더 싸울 것 없이 이 주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
지만, 싫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접근했다.
"이 얏."
상대는 란테르트에게서 받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떨치려
는 듯, 식당이 떠나가라 기합을 외쳤다. 그리고는, 거의 에라브레의
머리크기만한 주먹을 휘두르며 란테르트에게 접근했다.
분명 그의 수준은 먼저의 두 사내와는 천양지차였다. 그 큰 덩치에
도, 주먹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고, 게다가 힘도 갖추고 있
어 휙 하는 소리를 내며 란테르트를 위협했다.
하지만, 맞아야 그 힘을 내보일 것 아닌가?
란테르트는 가벼이 허리를 움직여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는 왼
손을 뻗어 그의 허리에 내질렀다.
퍽 하는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으나, 조금전의 사내들과는
달리 그 덩치 큰 사내는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란테르트는 예상했다는 듯, 다시 한차례 주먹을 휘둘러 그의 옆구리
를 찍었다. 하지만 그 사내도 만만치는 않았다. 재빨리 허리를 옆으로
틀며, 란테르트를 빗맞춘채로 뒤로 빠져있는 주먹을 굽혀 란테르트의
뒤통수를 공격했다.
란테르트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상대의 반격이 들어오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란테르트의 뒤통
수를 스쳤고, 무리한 공격으로 상대의 몸이 조금 흐트러졌다.
란테르트는 이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몸을 들어올리며 그
의 턱을 가격했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관계로 타점이 정확치
않아 주먹은 턱이 아닌 가슴뼈 언저리를 스치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
라도 상대에게는 작지 않은 타격이었다. 헉 하는 작은 신음 성을 내며
상대는 그 육중한 몸을 황급히 뒤로 젖혔다. 그의 이런 재빠른 움직임
덕에 란테르트의 주먹이 턱에 명중되는 불운은 피할 수 있었다.
상대는 그 커다란 몸을 재빠르게 놀리며 땀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란테르트의 공격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계
속되었고, 열에 두셋은 반드시 자신의 몸에 명중되었다. 그에 반해 그
는 반격은커녕 피하지 조차 못하고 있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잠시만에 온 몸에 주먹과 발길질을 얻어맞은 그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한쪽 눈은 주먹에 얻어맞아 벌겋게 부워올랐고,
광대뼈도 시큰거렸다. 온통 내장이 뒤집힌 듯 속이 울렁거렸고, 팔다
리 어디 한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배 정중앙에 발길질을 얻어맞고는 뒤로 밀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멈추시오. 내 잘못했소."
거만이라는 단어를 휭하니 날려 버렸다. 목소리는 다급했고, 어조는
거의 애원 조였다.
란테르트는 이쯤 거의 기분이 풀렸다. 평소의 평정을 되찾았고, 이제
는 웃지 않을 수 있었다.
"솜씨를 보니, 5년전 나한테 당한 녀석인 것 같은데.... 혹시 갈색
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 않나?"
란테르트도 경어는 치워버렸다. 필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란테르트의 말에 바닥을 기고 있던 그 사내는 뒤통수를 한데 얻어맞
은 듯 했다. 5년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겨우 15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년한테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은 일을....
"혹, 혹시.... 철의 몸통? 그, 그럴 리가.... 그는 죽었다고 들었는
데...."
란테르트의 말에 상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5
년 사이에 란테르트는 모습이 많이 변했고 머리까지 길러 그는 얼른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때의 모습이 보
이기도 하는 듯 싶었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도 같군.... 맞아, 틀림없어."
"일어나지. 너정도 되는 녀석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은 보기 않좋
으니까."
란테르트는 이렇게 내뱉었고,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
다.
"이럴 수가.... 내가 너를 다시 보다니.... 그때 이후 벌써 5년이 흘
렀나? 정말이지...."
떠듬떠듬 란테르트의 이곳 저곳을 훑어보며 그는 계속해 무어라 중얼
거렸다.
"믿기 힘들군...."
란테르트가 말했다.
"주먹은 여전하군. 세 번이나 맞을뻔 했으니...."
란테르트의 말에 상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따위가.... 그보다, 굉장히 강해졌구나. 그때는 내가 조금밖에
밀리지 않았는데...."
란테르트도, 그 갈색 곰이라는 상대도 그로부터 한참동안 입을 다물
었다. 둘 모두 옛날 일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죽었다."
잠시후, 란테르트가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갈색 곰이라는 사내는 란테르트의 말에 이렇게 외쳤으나, 그는 이미
갑옷을 다시 입고 검을 찬 이후였다.
"나는 5년전 죽었다."
란테르트는 다시 이렇게 말했고,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겠다."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대꾸한 후, 두 자매를 향해 입
을 열었다.
"어서, 다른 음식점을 찾아 봐야지. 이러다 끼니때를 놓치겠어."
어떻게 이렇게 까지 아무일 없다는 듯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넋놓고
싸움을 바라보다 이제 막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피엘라와 에라브레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 근처에는 식당이 많았다. 란테르트와 사피엘라, 그리고 에라브레
는 그 엉망이 되어버린 음식점을 벗어나 그리 멀지 않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갈색 곰이라는 사내는 식당 밖까지 쫓아 나와 란테르트를 한차례 쳐
다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패배를 자위
하려는 듯 한마디 중얼거렸다.
"철의 몸통, 저 녀석은 분명 싸움꾼이니까.... 나는 검사한테 패한
것이 아니야."
식당을 벗어난 일행은 오래지 않아 다른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세사
람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본 후,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비록 이곳도 그리 고급 식당은 아니었으나, 조금전의 그 아수라장에
비한다면 일류라 할만 했다.
사피엘라는 말없이 수건을 꺼내며 란테르트의 손을 끌어 당겼다.
"왜? 무슨...."
란테르트는 사피엘라의 이 돌연한 행동에 이렇게 물었다.
"아.... 닦아주려고요. 피가 묻었잖아요."
사피엘라는 지금 반쯤 넋이 나갔다. 비록, 검을 휘두르는 싸움이 격
렬하고 날카로우며 또 위험했으나, 방금의 싸움만큼 처절하고 잔인하
지는 않았다. 그런 싸움을 한차례 관람하고 났으니 어떻게 마음이 안
정될수 있겠는가?
란테르트는 가만히 그녀에게 자신의 손을 맡겼다.
그때 에라브레가 말했다.
"굉장해요. 그건 또 뭐죠? 검술 같은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같던
데...."
이 에라브레의 한마디는 사피엘라가 우려한 그대로의 것이었다.
"아, 그거? 그냥 싸움이야. 어린아이들도 늘쌍 하는 그런...."
"그래요? 하지만 격이 다르던걸요."
에라브레가 이렇게 말하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몇 가지 기술이 있지. 검술보다 훨씬 간단하지만...."
란테르트의 말에 에라브레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 기술, 나한테도 가르쳐 주세요."
"라브에. 그런 것은 배워서 무엇 하려고?"
사피엘라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대로 일이 돌아가자 내심 크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검술보다 배나 흉한 이런 기술을 동생이 배우다니....
사피엘라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때 란테르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안돼. 이런 건 여자가 배울게 못돼.... 어쩌면 사람이...."
란테르트의 말에 에라브레가 조르려고 입을 여는 순간 란테르트가 다
시 말을 꺼냈다.
"난 에라브레가 남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에라브레는 그의 말에 흠칫 놀랐고, 사피엘라 역시 마찬가지 였다.
"목을.... 물어뜯는 기술도 있어요?"
에라브레가 묻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목, 손가락, 팔, 다리, 코. 물어뜯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물어뜯을 수 있는 기술이 있지. 물론, 자신이 훨씬 약할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기술이기는 하지만."
에라브레는 순간 다른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자신을 떠올리고는 고개
를 흔들었다.
"나 배우지 않을래요."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게다가 네 언니가 원치 않잖아."
사피엘라가 란테르트에게 물었다.
"어디서 배운 거죠? 그 기술 이라는 거.... 게다가 그 철의 몸통이라
는 괴상한 이름은 뭐구요?"
확실히 철의 몸통이라는 이름은 고상하지 못한 데가 있었다. 아니,
사피엘라의 평 그대로 괴상한 이름이었다.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 덕에 사피엘라의 질문에 대한 란테
르트의 대답이 조금 늦춰졌다.
란테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과거는, 자신의 과거는 쓰레기통이다. 아
직 들춰보기에는 냄새가 심하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더 이상 거짓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우선, 점심을 먹고 이야기하기로 하자."
먹는 둥 마는 둥, 배를 채우기 위한 수작업을 반시간, 아니 반의 반
시간 가량 한 사피엘라와 에라브레는 동그랗게 반짝이는 눈을 란테르
트에게로 향한 채 이야기를 재촉했다.
"내가 아마 15살 때 일 꺼야.... 막 클라우젠을 빠져나온 그때, 내가
머무를 곳이라고는 없었지.... 탈옥범.... 그것도 클라우젠의 탈옥 범
이야. 5000하르의 현상금이 걸려 있더군. 나는 그래도 익숙한 항구로
도망했고, 그곳의 뒷골목에 숨어살았지. 그러던 중, 몇몇 사람과 싸움
을 벌이게 됐어. 당시 나는 마계 마법을 상당히 많이 익혔었고, 그 덕
분에 나의 몸은 마법력으로 보호받고 있었어. 게다가, 어려서부터 그
리고 부두에서 일할 때에도 싸움을 제법 많이 했기에 네명이나 되는
어른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지. 물론, 나도 거의 만신창이가 되 버렸
고...."
란테르트는 잠시 쉬었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목이 조금 타는지
종종 물을 마셨다.
"그때, 한 나이든 사내가 나를 발견했어. 꽤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군. 그리고 한마디했지. 대단한 녀석이군. 내가 거두어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어차피 머무를 곳이 필요했으니까. 열
다섯 살 자리의 어린아이가 머물.... 알고 보니 그 사내는 카에스 윙
즈의 보스더군."
"카에스 윙즈요? 처음 듣는 단체인데....'
에라브레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란테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꺼야. 아니, 알고 있다면 그편이 더 이상하지. 카에스 윙즈는
범죄집단이야. 군인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무력집단.... 무역 금지
품목의 밀수출입, 판매 금지 품목의 밀매, 강도질.... 뭐 이런 걸로
연명하는 집단이지. 그 중에서도 카에스 윙즈는 위다의 카에스항에 자
리잡은 꽤 규모 있는 곳이야. 고용한 용병이 십 수명에 달하니까...."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에라브레가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딱히 대답하지 않은 채로 계속
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처음 그들이 내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건지 알 수 없었어. 그
저 하라는 데로 따를 뿐이었지. 그들은 내게 싸움을 가르쳤지. 먹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생기자 그래도 그전보다는 훨씬 낫더군.... 그리
고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났어. 굉장히 예뻤지. 처음 나를 그곳으로
대려온 사내의 딸이었어. 한마디로 그 조직의 작은아가씨 였던거지.
그렇게 두달 가량을 보낸 나는 결국 정식으로 할 일을 듣게 되었지.
바로 싸움이었어. 나는 싸우고 그들은 내게 돈을 걸었어. 인간을 인간
과 싸우게 하고 인간들이 인간에게 돈을 거는 그런 곳이었지. 아니 어
쩌면 짐승과 짐승이 싸우고 인간이 짐승에게 돈을 거는 그런 곳이었을
지도 몰라."
사피엘라는 돌연 이야기 중간에 예쁜 여자라는 말에 돌연 이상한 느
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란테르트는 처음의 망설이던 생각은 모두 잃어버린 채, 이야기
에 열중했다.
"나는, 그런 데로 강했던 모양이야. 무패의 나날이었지. 한 번 한 번
이길 때마다 그들은 나를 더 극진히 대해 주었어. 그리고 그 여자도.
성질이 약간 괴팍했으나, 그래도 나는 그녀의 미소가 좋았어. 아마 어
쩌면 내가 그곳에 계속 머물렀던 이유도 그녀 때문일 꺼야."
그때 에라브레가 물었다.
"그 여자를 좋아했나요?"
이 물음에 사피엘라는 약간 긴장하며 란테르트를 바라보았다. 반면
란테르트는 너무도 쉽게 에라브레의 물음에 답했다.
"글세?.... 좋아 했었을 꺼야. 분명. 거의 동경에 가까운 마음을 품
고 있었으니까...."
"지금은요?"
에라브레가 다시 물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벌써 5년이나 지난 옛 이야기야. 게다가.... 예쁘다는 것은 결코 대
단한 것이 아니야. 다만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 거지...."
에라브레는 란테르트의 말을 들으며 두 팔을 탁자로 올리고 고개를
손에 기대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첫사랑.... 내 나이랑 같은 15살 때 첫사랑을 했군요...."
란테르트는 에라브레의 말에 귀밑이 빨개지며 황급히 말했다.
"사랑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다만...."
"괜찮아요. 그렇게 당황하며 변명할 필요 없어요. 않그래 언니?"
에라브레는 돌연 사피엘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피엘라는 란테르트
의 이야기에 약간의 질투심 같은 것을 느끼며 있다 돌연 에라브레가
질문을 하자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아.... 맞아.... 그래...."
무어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흐트러진 대답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이야기가 진행돼는 사이, 사피엘라도 란테르트도 중
요한 에라브레의 한마디를 놓쳐 버렸다. 바로, 내 나이랑 같은 15살
때 첫사랑을 했군요, 라는 말로, 15살은 바로 에라브레의 현 나이였
다.
평소 같았으면 결코 놓쳐 넘길 말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평소가 아니
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죠?"
에라브레가 이야기를 재촉했고, 란테르트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던중, 그 날이 왔지. 지금도 기억에 선해.... 내가 계속해 무패
의 기록을 쌓아가자 내 이름이 꽤 유명해 지기 시작했고, 종내에는 내
가 싸우는 싸움의 나에 대한 배당비율이 형편없게 되버린거야. 즉, 나
에게 돈을 걸고 이겨보았자 얻는 돈이 거의 없었지. 가장 낮을 때에는
1.02대 700 이라는 비율로 배당금이 지급되었을 정도야. 나는 즐거웠
어. 내가 그렇게 대단해 진 것에.... 하지만, 전혀 몰랐지. 그것 때문
에, 내가 무패이기 때문에 내가 쓸모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버려졌어. 그날, 그들은 내게 약을 먹이고는 싸움터에 내보냈어. 처음
에는 내가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몰랐지. 하지만, 막상 싸움장소에 나
가자 세상이 온통 핑핑 돌더군. 한 번 주먹을 휘두르고는 그때부터 한
참동안 두들겨 맞았지. 그렇게 세상이 핑핑 도는데.... 상대는 아주
정확히 주먹을 휘두르더군...."
에라브레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사피엘라도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그럴 수 있어. 나는 단지 도구였으니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버
려졌지. 그리고 또 나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 나를 버리던 사내
들이 주고받은 이야기이지. 한 명이 말했지. 참 불쌍한 녀석이야 라
고. 아마 나를 이야기 한걸 꺼야. 그리고 다른 사내가 받았어. 하지
만, 이 녀석 덕에 큰돈을 벌게 됐잖아.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약을 먹
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는 도중, 그들
이 내게 약을 먹여놓고는 그 상대편에 돈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
지. 그리고 가장 충격적 이였던 것은.... 이 말이었어. 우리 작은아가
씨는 정말 머리가 비상하셔.... 라는 말. 약을 먹이고 상대편에 돈을
거는 그 방법을 생각해낸 사람이 바로 그 여자였던 거야.... 그렇게
나는 버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에날트라는 사람에게 발견되었
지...."
사피엘라와 에라브레는 하도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이 사람들
은, 그 에날트 제날튼 이라는 사람보다 배는 악독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고 내다 버릴 수가 있는가?
"복수는 했나요?"
에라브레가 분개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으나, 란테르트는 고개를 가
로 저을 뿐이었다.
"아니.... 벌써 5년이라 흘렀는걸...."
이 란테르트의 한마디에는 온갖의 상심이 들어 있었다. 복수라는 것을
생각하기에 그는 너무 지쳐 있었었다. 게다가, 그 후로 5년 동안 그의
스승과 함께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은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선
물을 안겨 준다.
사실 이런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은, 란테르트로서는 왠지 꺼내보기
싫은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자매가 듣고 싶어하는데 이야기
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란테르트는 이렇게 쉽게 옛 이야기
를 하는 자신을 보며 새삼 놀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