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에 갔던 며느리가 돌나물을 사왔다. 의외였다. 한국 떠난 지가 언젠데, 어떻게 이 나물을 알지. 물어보니, 뭔진 모르지만 어머니 믿고 샀단다. 며느리 대답만큼 신선한 돌나물을 체에 받혀 얼른 물에 씼었다. 그리고 초고추장에 섞어 젓가락으로 살살 버무리며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를 생각했다. 김장 독이 패이고 나른한 날씨가 되면 어김없이 돌나물로 김치를 담으시던 분. 그 때 쯤이면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새뜻한 거 뭐 없을까? 봄옷 한 벌 새뜻한 놈으루다 해 입었으면 좋으련만. 파르스름한 거면 좋겠지? 하지만 말씀만 그러셨지 정작은 딸 많은 죄(?)로 뜻을 이루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시 봄이다. 나이 든 뒤, 왠지 봄이 되면 어머니가 자주 생각난다. 봄을 새뜻하게 지내고 싶어하셨던 그 분과 달리, 젊은 시절 봄을 어둡게(?) 보낸 탓일까. 대학 시절 어느 봄날, 다음 수업을 들을 강의실을 찾아, 새순이 돋아나는 양지 쪽을 걸어 갈 때 친구 추명희가 물었다. 지금 뭐하고 싶니? 죽고 싶어. 선뜻 내뱉는 대답에 친구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절대 동감이란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만물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하루가 다르게 눈부셔 가는데, 게으른 육신과 영혼은 자연의 그 약동에 적응은 커녕, 아직도 누더기 같은 미망(迷妄)을 덮고 있으니 절망을 넘어 그저 죽고 싶을 뿐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그런 면에서 서로의 마음을 잘 읽었다.
그 후로도 생명을 앓아야만 하는 봄의 환경에 적응을 잘 해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봄이 되면 두통도 심해졌고 짜증도 늘었다. 충돌하는 자아에 좌절을 느낀 나머지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분홍색이 못마땅하다. 가을의 끄트머리, 사라져가는 계절을 놓칠까, 불면의 밤을 보냈듯, 봄이 되어 새로운 계절을 맞는 것이 아직도 어쩐지 버성기다.
그래서 어찌해야 어머니처럼 새뜻하게 봄을 맞이하는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될까, 고민하게 된다. 옛 사람들은 꽃샘바람 속에서도 입춘대길을 써서 붙이고 봄맞이를 했다. 꽃망울이 지면 꽃놀이 갈 준비를 했다. 꽃이 화사하면 꽃잎으로 화전 부칠 준비를 했다. 이처럼 매사 보내고 맞이하는데는 준비가 필요하다. 한데 준비도 없이 봄을 맞으려 했으니, 해 마다 어쩔 줄 몰라하며, 헌옷같은 육신을 입고 괴로움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겨우 인생의 틈을 비집고 들여다 보며, 뭔가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니, 이처럼 늦된 영혼이 어찌 해 마다 봄을 산뜻하게 맞이할 수 있었겠나.
비로소 겨우 알아가는 자연의 질서. 이 나이엔 어떻게 해야 ‘새뜻한 봄’을 가질 수 있을까. 새뜻하단 말은 새롭고 산뜻하다는 말이다. 새롭다는 것은 신선(新鮮)하다는 뜻. 신(新)! 이것은 도끼斤로 나무木를 자른 뒤 그 잘라진辛 자리에서 돋아난 싹이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새롭기 위해선 뭔가 잘라내야 한다. 즉 바꿔야 하는 것이다. 겨우내 지녔던 타성, 낡음-습관상 늘어 놓았던 집안의 어수선함, 무거워진 옷들, 올라가는 기온에 적응하지 못하는 입맛, 등등 주변의 털어내고 바꿔야 할 것들은 많다.
예전에 통반장들이 ‘춘계 대청소’ 계몽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하! 그게 그런 의미도 되는 것이었군. 슬몃 미소가 떠오른다. 겨울의 무겁고 낡은 외투를 벗어야 산뜻한 봄 코트로 갈아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털고 쓸고 닦고, 집도 훤하게 청소를 해서 준비를 마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봄 옷으로 갈아입자. 상품 광고에 흔히 쓰이는 광고 문안 중 ‘봄은 여인의 옷깃으로 온다.’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엔 분홍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이스가 바탕 그래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분홍색을 싫어하니 ‘파르스름하고 새뜻한’ 한 벌로 준비를 끝내면 어떨까.
그런 뒤 먹을 거리를 찾아 보자. 봄 먹을 거리엔 나물 이상가는 게 없다. 백석 연곡리 외가나 도봉산자락 친가나 그 시절엔 다 시골이긴 마찬가지여서 집에 드나드는 친척들은 늘 봄이면 산나물을 가져 왔다. 그러므로 내게 봄은 늘 산나물로 시작되었다. 원추리, 취나물, 꽃다지, 두릅, 돌나물, 할미꽃, 등등. 달래 냉이도 좋고 씀바귀는 또 어떠한가. 쌉쌀 씁쓸하지만 언제나 개운한 뒷맛을 남기던, 머릿속까지 개운하게 만들어 주던 나물들.
그러나 그곳을 떠난지 이십 년이 넘었다. 산나물은 언제나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먹을 거리였고 손 뻗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 식품을 취급하는 상점에 가면, 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게 늘 있는 것은 아니어서 행운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이다. 오늘처럼 말이다.
저녁 언제 먹느냐는 아들의 채근에 서둘러 상을 차리고 앉았다. 그리고 외할머니 돌나물 얘기를 했다. 아이들이 웃는다. 비슷한 얘기 또 하시네, 하는 얼굴들. 너희들도 살아 봐. 나도 그런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 보며 웃었다. 가슴 한 켠 슬쩍 차오르는 울컥함, 다시 생각이 몰려온다.
집치레, 옷치레, 입치레로만 봄을 맞을 수만 있다면야 그토록 춘통(春痛)(?)을 앓진 않았겠지. 온전한 봄을 맞기 위해선 몸치레 영혼치레도 필요하다. 운동이라도 해서 지난 겨울 끼어든 군살을 털어야 한다. 그래야 머릿속에 낀 군살도 빠져, 영혼이 세척되고 정신의 회전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봄의 새뜻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혼의 회전 속도를 늘리기 위해선 양분을 주어야 한다. 아마 그것은 독서가 되겠지. 음악도 좋을 것이고 그림 감상도 좋을 것이다. 모짤트를 듣고 세잔느의 그림을 완상할까? 바하와 샤갈은 어떨까? 봄의 생기를 느끼기 위해 하는 궁리가 좀 길다. 그렇다면 김화영의 서문이 본문보다 더 거창한(?) 쟝 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리 생각을 굴리다 보니 어머니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어머니는 새뜻하단 말을 늘 새틋하다고 발음하셨다. ‘생뚱맞다’도 늘 ‘새퉁맞다’고 발음하셨다. 어려선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왜 표준어가 아닌 발음을 하실까, 좀 불만스러웠다. 나중에 국어 선생질(?) 할 팔자가 미리 정해졌던 것일까, 난 부모님의 입말들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제 그 시절 어머니 연배가 되고 보니, 나 또한 그렇게 발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새뜻하단 말은 새롭고 산뜻하단 뜻 뿐이지만, ‘새틋하다’란 말은 왠지 새롭고 산뜻하고 애틋하단 뜻으로 느껴져 느낌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 가슴을 찌른다. 생명은 슬픔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인가. 애잔한 그 말의 느낌이 나는 좋다.
새큼한 돌나물 젓갈을 입에 넣으며 문득 나는 아들을 바라 보았다. 나는 돌나물에서 어머니를 보는데 이 아인 이 다음 봄이 되면 무엇으로 나를 기억하게 될까? ‘새틋함’의 경지(?)는 못 되어도 뭔가 산뜻한 것이면 좋겠다. 어쩐지 돌나물에 눈물이 한 방울 어리는 것만 같은 저녁이었다.
첫댓글 돌나물하면 저는 물김치가 생각납니다. . 장독대가 있는 뒤뜰에서 뜯은 깨끗한 나물과 무를 넣어 만든 삼삼한 국물과 아삭 씹히는 맛. 저 역시 돌나물하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자동연상이 됩니다. 아드님도 돌나물을 보면 어머니의 봄이 떠오르겠지요. 며느님이 그러하듯. 애틋한 나물이네요. 이래저래. 말맛을 따라 잘 익은 글을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
언제나 관심 깊게, 따뜻하게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활력과 열정에 대해 그저 놀랍고 부러울 뿐 입니다.
글을 잘 읽었습니다. '손바닥에 고인 바다'도 읽었습니다. '새틋한 봄'을 읽은 소감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우선 글이 주제와 좀 떨어져 너무 옆으로 퍼지게 쓰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목은 '돌나물'로 하고 분량은 원고지로 7매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제가 기성 작가로부터 원고를 교정받은 적이 몇 번 있었은데 작가가 교정한 것이 열 군데인데 아홉 군데는 틀리게 교정한 것이었고 한 군데는 철자가 틀린 것을 바로 잡은 것 뿐이었습니다. 결국 틀리게 고친 것을 발견한 것이 큰 공부였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 샘님과 글을 교류하고 싶어서 쓴 것뿐이니 댓글 달은 것을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이경구 올림.
수필도 아닌, 그저 수필양식에 불과한 글들을 귀한 시간 내셔서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새틋한 봄)에 대한 고견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감히 제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돌나물은 모티브에 불과합니다. 모티브를 통해서 봄을 즐기셨던 어머니와 그렇지 못했던 풋내기, 그러나 이제와서 어머니의 길로 합류한 자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선 12매도 부족했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라 생각합니다.
제 모자람을 혜량해 주시면 안될까요?
지우개 님과 대화를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원로작가는 저의 원고를 잘 고친 예보다 잘못 고친 예가 더 많았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지루하시더라도 저의 지적을 집고 넘어가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