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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의 글
조민정(신림중)
어느 시인의 글처럼...
길에는 땀이 묻어 있고
베게엔 침이 묻어 있고
벽에는 흙탕이 묻어 있고
우리 징검다리엔...
사람이 묻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묻어 있습니다. 고뇌가 묻어 있습니다. 사는 맛이 묻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의 소중함이 묻어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묻어 있습니다.
1994년 1월.
북아현동의 지하 연습실에서 5명의 교사가 주축이 되어 교사극단 징검다리를 발족시킨 그 때로부터 10년이 되었습니다. 1993년 여름의 참실연수 연극 분과를 신청하면서 운명과도 같은 선배들-구재연 선생님, 우광희 선생님, 강병용 선생님, 백인식 선생님-과 만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10년간 저는 징검다리로 인해 아이들과, 교사들과 소통하는 다리를 얻었고 징검다리로 인해 정의를 고민하고 가르치는 일의 소중함을 느끼고 징검다리로 인해 사람사는 맛을 알았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고민이 무대에서 녹아나고 우리가 무대에서 풀어낸 몸짓이 그대로 교육발전을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가 됨을 믿습니다.
앞에서 뒤에서 우리 징검다리를 밀고 당겨온 소중한 식구들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함께하면서 또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아 주셨던 김용준 선생님, 우광희 선생님, 강병용 선생님, 정윤미 선생님, 이영아 선생님, 박종달 선생님, 정윤미 선생님, 최미자 선생님, 이현숙 선생님, 김미리 선생님, 위은미 선생님, 안상진 선생님, 김현섭 선생님, 윤영자 선생님, 이정희 선생님, 천명열 선생님, 강만선 선생님, 이수경 선생님, 고경아 선생님, 김경조 선생님, 그리고 무대 뒤에서 늘 함께 하셨던 권혁인 선생님, 박건 선생님, 박희숙 선생님, 김중석 선생님, 연출로서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고 엄인희 선생님, 남기성 선생님, 고동업 선생님, 김인경 선생님 고맙습니다. 객원이면서도 식구같았던 유승원님, 김신용님, 홍명석님, 박금영님 지금도 어디선가 징검다리를 기억하고 계시죠? 옆에서 항상 애정어린 눈으로 징검다리를 봐주고 도와주셨던 이영미 선생님, 이영경 선생민, 현광일 선생님... 그리고 수 많은 동지 여러분.
지금 이 길을 함께 하고 있는 구재연 선생님, 김순희 선생님, 윤영 선생님, 이선화 선생님, 임미경 선생님, 정영미 선생님, 장익서 선생님, 김영진 선생님, 김선희 선생님, 서우정 선생님, 심선혜 선생님, 선민정 선생님, 우리의 동지 서울지부 문화일꾼 풍물패 선생님들, 영상패 선생님들, 놀이패 선생님들, 노래패 선생님들!
우리가 드디어 10주년이 길을 엽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아 우리 징검다리의 극을 보아주셨던 모든 교육주체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저희가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머리카락 쥐어 뜯어가며 진실을 말하려 애써왔던 10년의 세월만큼 아니 그 10배 100배 만큼 앞으로의 세월을 기약합니다. 앞으로의 교육을 기약합니다. 10대에 접어든 징검다리의 힘으로... 우리가 맞잡은 서로의 힘으로...
연출의 글
구재연(월촌중)
이 극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폭력에 관한 극이다. 인간에 대한 통제와 폭력은 어디에나 있다. 현대의 불안 증후군에 의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에서부터, 변하지 않은 학교 규율에, 자존심과 이해관계를 위해 질끈 한 번 감아버리는 내 의식 안에, 그리고 안일하게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 속에, 우리가 소위 인간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대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아니 관계 자체가 이미 폭력일지 모른다. 또는 촘촘한 일상의 그물들이 우리를 폭력 앞으로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계는 소통이며 사랑이라고 생각한 징검다리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10년 전, 아이를 사랑으로 지키려 했넌 김선생은 이제 경악스러운 블랙코메디의 주인공으로 희화화된다. 그의 스틸 사진은 바로 나의 모습니다. 동공을 크게 뜨고 지식인에서 추레한 생활인으로 변해버린 나를 바라보기, 아이들에 대해서는 여린 부분을 포기할 수 없는 걸 보곤 그래도 교사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 슬로건, '우리의 희망은 아이들이다'가 눈물나게 그리워진다. 사실 이런 건 겉모습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우린 예쁜 꽃핀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편의 기억은 아득히 멀다.
단원에게 물었다. 이게 진실이냐? 자신있냐? 그들은 적어도 정직하다고 했다. 그리고 극을 만들면서 손가락의 굴레 밖으로빠져 나오려는 자신의 몸짓을 만나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됐다.
희망은 말하지 않아도 있다. 치열함 속에...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한 단원들과 징검다리의 10년의 연륜과 그동안 지켜봐 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작품 줄거리
오늘도 늘 그렇고 그런 일상이다. 학생부장이 교문을 지키고 있고 학생들은 제 몸을 훑어 내리며 조마조마하게 아침을 시작한다. 그리고 으레 몇은 단속망에 걸려 벌을 받는다.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지시일변도의 따분한 교무회의에서 선도학교 안이 합의과정 없이 통과되고, 성선생의 봉사활동 안이 형식적 절차를 이유로 기각된다.
한편, 어릴 적 영어학원에서의 상처로 무언가에 억눌릴 때마다 오줌을 싸는 주현이는 등교길에 두발 단속에 걸리고, 권리에 관한 사회 수업을 받으면서 학교 두발규정 개정에 관한 희망을 갖게 되고 설문지를 작성한다. 그러나 단짝인 선영이가 희남이에게 폭행을 당하지만 그냥 지나찬다. 선생님들 회식 준비에 나선 주현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의 부추김으로 폭력교사에 대한 항의 방문을 결심한다.
이런 작은 꿈틀거림이 교무실에서 미묘하게 얽히며 각자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쓰레기통은 점점 차오르고,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 행복해진다.
작품 기획 의도
21세기, 여기저기서 인권에 관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차별, 강요, 억압'이란 말들과 함께 점철된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여성 등 소외된 소수자의 박탈당한 권리에 관한 소문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하여, 21세기 우리 사회는 '민주적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내 모습을, 옆 사람의 모습을, 그렇게 말하는 우리 다수의 모습을 들여다 보라. 자신의 권리를 얼마만큼이나 지켜가고 있는가. 사소한 일상 속에서 옳은 것, 인간다운 것들에 관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그럴만한 권리의식이 있는가. 혹은 권리의식의 부재가 당혹스럽지도 않을 만큼 인식조차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 왜 우리는 권리의식이 없는가.
어느날 문득 나를 돌아보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가 몸담게 된 사회의 세습된 문화가 소리 없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녹아드는 것에 저항하지 않는가? 왜 인지초차 못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교육'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학교는 권리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움의 조건인 권리의식을 억누른다. '사회화'라 하여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친다 하던가. 어울려 사는 법이라는 것이 갖가지 권력 아래 길들여짐을 의미하지는 않는가.
권리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교육하려 애쓰지만, 미묘한 권렬의 작용 속에서 자신의 혹은 교사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성선생이나, 부조리한 것에 옳은 목소리를 내던 주현엄마가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이 낳은 알력 사이에서 무너지는 모습이나, 생리적 욕구까지 억압당하고 상처받은 주현이가 이러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성장하면서 스스로 권리를 접는 것이, 이런 우리의 모습이 당연한 사회화의 과정이라고 안도할 수 있는가. 이들이 웃는다. 행복하게 웃는다. 여기서 물음표를 찍어본다. 인간다움을 저버린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 라고...
오늘도 작고 잡다한 일상 속에서 내가 버린 일부가 쓰레기통 속에서 묻는다.
버려? ... 버려!
이 게임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To be continued?
징검다리 10돌을 축하하며
남기성(연출가, 놀이패 한두레 대표)
징검다리 정기공연이었던 <넘어간다 너머가>로 징검다리 식구들과 함께한 게 벌써 4년 전 일이 되었습니다. 연출 제안을 받고 당산동 지하 연습장에 나가 대본을 받아보고 선생님들이 모아 놓은 자료를 받아 봤습니다. 선생님들의 학교에 관한 다양한 글모음 그 중에는 징검다리 선생님의 일기장 일부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새벽녘까지 그 글들을 읽으면서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PD수첩이니 하는 방송 프로그램과 언론 매체들을 통해 그 모습의 일부를 전해 듣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글 속에는 상처 받는 아이들, 무너져가는 학교, 그리고 그 안에 함께 고통 받는 교사와 학부형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 가슴 아파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또 이를 닫고 작은 희망이나마 부여잡고 다시 자신을 추스리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이 담겨 있었고 이것은 고스란히 <넘어간다 너머가>에 스며 들었습니다. '연출'이랍시고 연습실에 앉아 있었지만 사실 제가 한 일은 거의 없답니다. 아니 뭐 할 일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요.
이미 연극은 배우들(선생님들)의 삶 자체였고 살을 푸는 한 판 굿이었고 그들은 신명이 도도히 넘쳐 흐르는 만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진정성'이 그들의 몸을 통해, 얼굴의 표정과 말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물론 전문 춤꾼에 비하면 다소 거친 몸짓이었고 많은 시간 함께 연습할 시간은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그들이 서있는 무대에는 예술에 있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지향점인 삶에 대한 '진정성'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고 함께 이루고자 갈망하는 공동선이 있는데 잡다한 테크닉이나 기량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저와 같은 어설픈 연출의 간섬이 이를 북돋우기는 커녕 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징검다리가 별써 10년이랍니다.
북아현동 연습실에서 첫 모임을 가질 때 함께 열흘간 뒹군 게 저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얼마나 갈까? 의구심도 들었는데 아직도 초심을 잃지 않고 10년이랍니다.
그 사이 학교는 더 이상야릇한(?) 공간으로 변해 가는 것도 같고
학생들의 미래는 이제 학교보다는 학원과 교육방송을 보는 것에 달려 있는 듯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랍니다.
징검다리처럼 듬성듬성 건너온 세월이 10년이랍니다.
그렇게 앞으로 10년을 더 건너간다면
돌료 교사들의 손을 잡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독려하며 학부형들과 함께 10년을 더 건너간다면
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 우리 몸이 깃드는 곳,
그 어디에서도 '진정성'이 통하고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는 사회가 오지 않을까요?
선생님들께 한없는 존경심과 사랑을 전합니다.
징검다리만 할 수 있었던 연극
이영미(연극 평론가, 대중예술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징검다리가 벌써 10년이라니! 하긴, 첫 공연을 했던 혜화동 한마당 극장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고, 몇 년 전부터인가 동숭무대라는 새로운 극장으로 손님을 맞고 있고, 그 시절 20,30대였던 멤버들이 벌써 30,40대의 중장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흐른 건 분명하다.
나도 그 시절에는 3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막 넘어가려는 나이였고, 대학로의 모든 공연들을 일수 도장 찍듯이 빼놓지 않고 보러다니면서 한 달에 많게는 10편, 적게는 4편 정도의 연극평을 왕성하게 써대던 때였다. 징검다리는 그 시절, 대학로의 연극들과는 매우 다른 연극이었을 뿐 아니라, 연극적 모태인 민족극 운동의 연극들과도 다소 다른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생활인 극단들이 지니고 있는 체험적 살의 생생함을 매우 잘 살려낸, 우수한 비전문인 극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태껏 올렸던 징검다리 작품의 꽤나 우수한 완성도를 생각하면, 비전문인 극단이란 말이 조금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과 비전문의 문제는 단지 예술적 기량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것을 자신의 주업으로 삼는가 아닌가 하는 존재의 문제이며, 그렇게 보자면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우선인 멤버들로 구성된 징검다리는 분명 비전문극단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매우 충실하게 비전문극단으로서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연극에만 머리를 처박고 있는, 그럼으로써 정작 생활인들이 겪는 삶의 생생한 체험을 하기 어려운 전문연극인들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할 정도의 생생한 교육현장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국내 어느 전문극단도 해볼 수 없는, 징검다리니까 할 수 있는 연극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사로서 학생과 학부모, 교육당국, 그리고 교사로서의 자신의 자의식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는 일은, 아무 비전문극단이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생생한 생활체험을 삶 속에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형상화의 단계로 끄집어 내는 일은 상당한 훈련과 노련한 조율, 균형있는 조정이 있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것의 수행에는 상당한 전문적인 조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마등극, 민족극 운동의 경험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마당극이라는 서민적 리얼리티를 가장 중시하는 연극을 꾸준히 해왔던 몇 명의 멤버, 그리고 전문연극인 연출자의 결합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상당한 전문성으로 조율된 비전문극단이라는 징검다리의 복잡한 특성은, 아마 지금 징검다리가 겪고 있는 고미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고 보이다. 비전문극단으로서의 교사극단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히 현장화하는 것이지만, 10년을 활동해 온 멤버들은 좀 더 비전문적 영역을 넘어선 심도 깊은 문제제기와 형상화에 도전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적잖이 만나온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그것은 교사극단의 징검다리의 틀로 가능한 일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때인들 고민이 없으랴. 여태껏 자신의 특징을 가장 잘 살려온 징검다리의 조율 능력과 어려운 조건에서도 10년을 버텨온 멤버들의 구력은 이를 헤쳐나갈 가장 큰 자산이다.
다시 한 번 10주년을 축하한다.
나의 선생님 '징검다리'
현광일(전 징검다리 기회)
벌써 10년,
징검다리가 머금은 세월의 두께이다.
지금 그들은 변하지 않은면 안되는 세월의 법칙을 어찌할 것인가? 궁금하다.
그런데 그들은 용감했다.
결국 그들의 허물을 벗어던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결재만이 인정되는 제도화된 학교, 점점 관리되는 사회로 전락하는 학교.
인간은 간데없고 인적자원이란...
프랑스 혁명의 바스키유 감옥 습격은 주유소 습격으로 비유되는 대중화된 감수성들
아이들과의 소통은 남감해만 가는데...
교사들조차 소통을 거부하고 있으니...
누군가 말하기를 "교육자는 누가 가르칠 것인가?"
중도 제머리를 못깍는다고 했거늘 선생들은 더 우직하다.
역시 10년이란 세월의 무거움은 대단하다.
그리고 그 무거움을 버텨낼 수 있는 자기 대답을 찾은 듯하다.
그건 '자기 부정'이었다.
삭발식을 준비하는 그대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징검다리는 나에게 '갈매기'라는 애칭을 달아주었다.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두 눈썹의 모양을 두고 한 말이다.
'갈매기'는 진지한 삶을 당부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갈매기처럼 한없이 날 수 있는 가벼움을 주었다.
그리고 무거움만 짊어진 징검다리는 나의 선생님들이다.
나는 가르쳐줄 선생님이 있어 다행이다.
그대들이 있기에 내가 있나니...
그대들에게 팔자같은 부담만 지운다.
이번 연극이 잘 될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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