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정보는 '크메르의 세계'가 기획한 <21세기 대중음악 사전>을 구성하는 항목으로서,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후 동영상을 추가하여 편집한 것이다. 전편을 먼저 읽으려면 여기(1편, 2편, 3편)를 클릭하라. |
일렉트로닉 뮤직 장르 (3-d) : 디스코 음악의 역사 ㊦
Disco
1.5. 반발과 쇠퇴
1.5.1. 안티 디스코 정서와 '디스코 데몰리션 나이트'
1970년대 말경, 락(rock) 뮤직의 팬들과 뮤지션들 사이에서 강력한 안티 디스코(anti-disco, 디스코 반대)의 움직임이 출현했는데, 특히 미국에서 더욱 그러했다.(주23)(주43) "디스코 엿먹어라!"(disco sucks)라든지 "디스코에게 죽음을!"(death to disco)(주23) 같은 구호들이 일상적인 일로 변했다.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1945~ )나 데이빗 보위(David Bowie: 1947~ )처럼 자신들의 음악에 디스코적 요소를 가미한 락 아티스트들은 신념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주44)(주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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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로드 스튜어트가 1978년 발표한 <다 야 싱크 아임 섹시?>(Da Ya Think I'm Sexy?)는 디스코 사운드 덕분에 영국과 미국 차트 1위는 물론이고, '빌보드 블랙(흑인) 차트' 5위에도 동시에 오르기까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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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데이빗 보위의 <존 아임 온리 댄싱 어게인>(John I'm Only Dancing [Again])(1975년) |
미국과 영국에서 [펑크 락(punk rock) 음악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펑크 서브컬처(punk subculture: 펑크 하위문화)는 종종 디스코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했다.(주23) 미국 하드록 펑크 밴드 더 데드 케네디스(The Dead Kennedys)의 젤로 비아프라(Jello Biafra: 1958~ )는 <새터데이 나잇 홀로코스트>(Saturday Night Holocaust)라는 곡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 정책에 무관심하고 도피주의적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디스코를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 1919~1933) 시대 독일에서 유행했던 카바레(Cabaret) 문화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락 밴드 데보(Devo)의 마크 마더스바우(Mark Mothersbaugh: 1950~ )는 디스코를 "대단한 몸매를 가졌지만 뇌가 없는 아름다운 여성 같은 것"이며 당대의 정치적 무관심의 소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주46) 뉴저지(New Jersey) 지역의 락 음악 평론가 짐 테스타(Jim Testa)는 <주쿠박스에 총탄을 꽂아라>(Put a Bullet Through the Jukebox)라는 독설에 가득 찬 장광설의 글에서, 디스코를 펑크가 대적해 싸울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주47)
일부 TV 쇼와 영화들도 안티 디스코의 정서를 표출했다. 시트콤 <WKRP 인 신시내티>(WKRP in Cincinnati)가 반복해서 다루던 주제들 중 하나는 디스코 음악에 대한 적대적 태도였다. 코메디 영화 <애어플래인!>(Airplane!)의 한 장면에는 네온 불빛의 라디오방송 송출부호가 표시된 방송탑이 포함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DJ의 목소리가 등장해 "시카고의 WZAZ입니다. 여기서 디스코는 영원하지요!"라고 말한다. 이후 통제를 벗어난 비행기가 날개로 그 방송탑을 조각내자 DJ의 목소리도 흩어지고 송출부호 표시등도 꺼지고 만다.
(사진) "디스코 엿먹어라!"(disco sucks)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남성.
1979년 7월 12일은 "디스코의 사망일"(the day disco died)로 불린다. 시카고(Chicago)의 촘스키 파크(Comiskey Park)에서 진행된 프로 야구 더블헤더 경기에서 안티 디스코 시위인 디스코 데몰리션 나이트(Disco Demolition Night)가 열렸기 때문인다.(주48) 락 음악 방송국 DJ 들인 스티브 달(Steve Dahl)과 게리 미어(Garry Meier: 1949~ )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Chicago White Sox)의 구단주 빌 비크(Bill Veeck: 1914~1986)의 아들과 함께 불만에 차 있던 락 팬들을 위한 홍보용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화이트 삭스' 팀의 더블헤더 경기 중간에 진행됐다. 하지만 이 행사는 디스코 음악 레코드판들을 폭발시키고, 요란한 관중들이 의자와 잔디를 뜯어내거나 여타 행패를 부리면서 폭동으로 막을 내렸다. 시카고 경찰국(Chicago Police Department: CDP)은 수많은 사람을 구속했고, 구장에도 심각한 손상이 발생해 '화이트 삭스'는 디크로이트 타리거스(Detroit Tigers)와의 2번째 경기에서 몰수패를 당했다.
이러한 상황은 6개월 전에 발생했던 한 혼란스러운 사건에서 기인했다. 시카고 지역에서 인기 있던 프로그레시브 락 음악 라디오 방송국 WDAI(=WLS-FM)가 갑자기 모든 편성을 디스코 음악을 다루는 것으로 바꾸면서, 시카고의 락 팬들을 소외시키고 DJ 스티브 달을 해고했던 것이다.
1979년 7월 21일, 미국 음악차트의 1위~6위 곡은 모두 디스코 장르의 노래들이었다.(주22) 하지만 9월22일 미국의 음악 차트 탑10에는 디스코 음악이 단 1곡도 없었다.(주22) 일부 매체들에서는 축하의 어조로 디스코가 "죽고" 락이 부활했다고 선언했다.(주22)
(주43) Encyclopedia of Contemporary American Culture, ISBN 978-0-415-16161-9, ISBN 978-0-415-16161-9 (2001) p.217. --- "사실 1977년 무렵 펑크가 퍼지기 전까지, 라디오 방송국들이 지원하는 '디스코 석스'(disco sucks: '디스코 엿먹어라')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일부 시골지역 백인 청소년들을 매료시켰고, 그들은 디스코가 현실 도피적이고, 인위적이며, 과잉 생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44) Robert Christgau: Pazz & Jop 1978: New Wave Hegemony and the Bebop Question Robert Christgau for the Village Voice Pop & Jop Poll 1978. 22, 1979-1-22.
(주45) Disco demolition: Bell bottoms be gone!. ESPN. 2004-8-11.
(주46) DEVO and the evolution of The Wipeouters interview with MARK MOTHERSBAUGH Juice Magazine.
(주47) Mark Andersen; Mark Jenkins (2003-8-1). Dance of days: two decades of punk in the nation's capital. Akashic Books. pp.17~ . ISBN 978-1-888451-44-3.
(주48) Campion, Chris Walking on the Moon:The Untold Story of the Police and the Rise of New Wave Rock. John Wiley & Sons, (2009), ISBN 978-0-470-28240-3 pp.82~84. |
1.5.2. 음악산업에의 여파
'디스코 데몰리션 나이트' 이후 몇년간, 안티 디스코의 반발이 여타 사회적 요소나 라디오 방송 산업의 분위기와 결합하면서 팝 음악을 방송하는 라디오들의 모습을 바꾸어놓았다. 1980년대가 시작되자 미국의 주요 음악 차트들에서 컨트리 음악(country music)이 천천히 부상했다. 컨트리 음악이 주류의 인기를 얻은 상징적 사건은 1980년에 개봉된 영화 <어반 카우보이>(Urban Cowboy: 도시의 카우보이)였다. 이 영화의 주연 배우가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 1945~ )였다는 점은 아이러니했다. 트라볼타는 그보다 3년 전 개봉됐던 디스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주연 배우였기 때문이다.
디스코의 인기가 쇠퇴하는 기간 중에, 몇몇 레코드 회사들이 통폐합과 구조조정, 혹은 매각되기도 했다. 1979년 MCA 레코드사(MCA Records)는 ABC 레코드사(ABC Records)를 매입하여 일부 아티스트들을 흡수하고 ABC 라벨은 폐기했다. RSO 레코드사(RSO Records)의 설립자 로버트 스티그우드(Robert Stigwood: 1934~ )는 1981년에 이 회사의 경영에서 손을 뗐고, TK 레코드사(TK Records)도 이 해에 문을 닫았다. 살소울 레코드사(Salsoul Records)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하지만 주로 [과거의 앨범들을] 재발매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주49) 카사블랑카 레코드사(Casablanca Records)는 1980년대에 이전보다 더 적은 양의 레코드들만을 발매하다가, 모기업인 폴리그램(PolyGram)에 의해 1986년에 폐쇄됐다.
디스코 시대에 인기를 얻고 있었던 많은 그룹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했고, 심지어는 음악적 취향의 변화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비지스(Bee Gees)의 경우, 훗날 그들이 작곡하여 다른 이들에게 부르게 하여 성공한 경우들도 존재하지만, 1980년 이후 미국 차트 40위권에 진입시킨 노래는 1989년에 발표한 <원>(One)과 1997년에 발표한 <얼론>(Alone) 등 단 2곡에 지나지 않았다. 디스코 음악이 쇠퇴해도 인기를 유지한 소수의 그룹들 중 특히 쿨 앤 더 갱(Kool and the Gang), 더 잭슨스(The Jacksons),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이 돋보였다. 이들은 디스코 유행 초창기에 디스코 사운드의 정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주50) 보다 세련된 형식으로 대중화와 댄스가 가능한 음악을 이어갔고, 1980년대 및 그 이후의 새로운 세대의 음악 팬들을 위한 노래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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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완전한 디스코 음악은 아니었지만, 마이클 잭슨은 1983년 <스릴러>(Thrille) 앨범을 발표하여 독특한 스타일의 댄스 및 팝 음악을 주도해나갔다. 그의 <스릴러> 앨범은 수록곡 <빌리 진>(Billie Jean)을 비롯하여 사상 최초로 7곡의 수록곡을 '빌보트 핫100' 차트 정상에 진입시켰고, 역사상 최대 판매량을 보유한 음반으로 남아 있다. 동영상은 1997년 뮌헨 공연에서 연주한 <빌리 진>. 그의 유명한 '문 워크' 동작이 등장한다. |
1.5.3. 디스코의 쇠퇴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
미국에서 디스코의 쇠퇴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로는 1970년대 말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디스코 매니아들이 주도하던 향락적 라이프 스타일이 소진된 것이 언급되곤 한다.(주51) '디스코 데몰리션 나이트' 이후 몇년간, 일부 사회비평가들은 디스코에 대한 반발을 남성중심주의(=마초[macho]) 및 편협한 편견들이 암묵적으로 표출된 현상으로 보면서, 비-백인 계열 및 [동성애를 포함하는] 비-이성애적 성향의 문화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묘사했다.(주23)(주45)(주48)
1971년 1월, 락 음악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토고(Robert Christgau: 1942~ )는 동성애 혐오증(homophobia: 호모포비아) 및 아마도 주로 인종차별주의(racism)가 디스코에 대한 반발 현상의 배후 이유였다고 주장했고,(주44) 또 다른 평론가 존 락웰(John Rockwell: 1940~ )도 그 결론에 동의했다. 크레이그 워너(Craig Werner)는 디스코에 대한 반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안티 디스코 운동은 펑크 매니아들(funkateers), 페미니스트(feminists), 진보주의자들(progressives), 청교도(puritans), 락커들(rockers), [수구] 반동주의자들(reactionaries)의 위태로운 동맹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코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비공식적이지만 가장 추악한 형태의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sexism), 동성애혐오증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부여했다.(주52) 팬진(fanzine: 팬들을 대상으로 한 비영리 잡지)인 <펑크>(Punk)의 창립자 렉스 맥닐(Legs McNeil: 1956~ )은 한 인터뷰에서, "히피(hippi 혹은 hippy)들은 항상 분노하려(to be black) 했다. 우리는 '엿 같은 블루스, 엿 같은 검둥이 경험(black experience: [역주]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의 밴드 '익스피어리언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은 엿먹어라'고 말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디스코가 동성애와 흑인 사이의 위태로운 결합의 결과였다고 말하기도 했다.(주53) |
'디스코 데몰리션 나이트'를 이끌었던 스티브 달은 이 행사에 인종차별이나 동성애 혐오의 저의는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행사에 모든 것을 탓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주45) 디스코에 대한 비판을 가했던 영국의 펑크 락 계열 비판자들은 레개(reggae) 장르가 지닌 친-흑인/반-인종차별 성향에 매우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다.(주23) 로버트 크리스토고와 짐 테스타는 디스코에 대한 비판에는 예술적 측면에서 적법한 근거들이 존재했다고 말했다.(주44)(주47)
1979년, 미국의 음악 산업은 수십년만에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고, 디스코는 대중적 인기가 있었지만 불황에 대한 욕을 먹고 있었다. 디스코는 주로 프로듀서 중심의 사운드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아티스트 중심의 음악시장 시스템과 잘 결합되기란 쉽지 않았다.(주54) 에이앤엠 레코드사(A&M Records)의 수석 부사장 해롤드 차일즈(Harold Childs)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라디오들은 락 음악 작품들에 정말로 필사적이었고, 그들 모두가 어떤 종류든지 백인 락앤롤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주48)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 1949~ )는 락 음악 제작자들이 돈을 잃고 락 뮤지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자 음악산업이 디스코의 파괴를 지지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주55)
1.6. 디스코의 부활 : 2013년
2013년에는 1970년대 스타일의 디스코 및 R&B(알앤비) 노래 여러 곡이 음악 차트에 올랐고, 댄스음악 노래들이 차트에 올라오는 빈도 역시 1970년대 이후 그 어느 시기보다도 많았다.(주8)(주24) 그 중 최대 히트곡은 2013년 6월에 다프트 펑크(Daft Punk)가 발표한 <겟 럭키>(Get Lucky)였다. 이 곡에는 나일 로저스(Nile Rodgers: 1952~ )가 기타리스트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겟 럭키>는 처음에 2013년 여름 최대의 히트곡이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빌보드 핫 100"(Billboard Hot 100) 차트에서 2위까지만 오르는 데 그쳤다. 그렇지만 5주일 뒤에는 로빈 시크(Robin Thicke: 1977~ )가 발표한 또 다른 디스코 스타일의 곡 <블러드 라인스>(Blurred Lines)가 등장하여 '빌보드 핫100' 차트 정상에 12주 동안 머물면서, 이 해 여름을 상징하는 최종적인 노래가 됐다.(주8)(주24) 이 두 노래는 다양한 인종 집단들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주8)(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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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패럴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찬조출연한 로빈 시크의 <블러드 라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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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프트 펑크'의 <겟 럭키>(Get Lucky). 패럴 윌리엄스와 나일 로저스가 함께 한 이 곡은 2014년 1월에 진행된 '제56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상'과 '최우수 듀오/그룹 퍼포먼스 상'을 수상했다. 이 동영상은 2014년 그래미상 시상식 무대에서 가진 특별 공연으로, 패럴 윌리엄스와 나일 로저스 외에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1950~ )가 특별출연하고 있다. |
디스코 스타일의 여타 노래들 중 차트 40위 안에 든 곡에는 저스틴 팀버브레이크(Justin Timberlake: 1981~ )의 <태익 백 더 나잇>(Take Back The Night)(차트 29위)와 브루노 마스(Bruno Mars: 1985~ )의 <트래저>(Treasure)(차트 5위)가 있다.(주8)(주24) 또한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리플랙터>(Reflektor) 앨범과 '다프트 펑크'의 <랜덤 액세스 메모리즈>(Random Access Memories) 앨범은 모두 디스코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데, 양자 공히 2013년 '빌보드 200 앨범 차트'(Billboard 200)에서 정상을 자치했다. 2014년에 발표된 디스코 음악에는 레이디 가가(Lady Gaga: 1986~ )의 <아트팝>(Artpop)(주56)(주57)과 케이티 페리(Katy Perry: 1984~ )의 <버스데이>(Birthday) 같은 곡들이 있다.(주58)
2. 유로 디스코
* 이 부분의 상세한 정보는 '유로 디스코'(Euro disco) 항목을 참조하라. |
미국에서 디스코의 인기가 급격히 쇠퇴하고 주요한 레코드 라벨들과 프로듀서들 역시 디스코 음악을 포기했지만, 유럽의 디스코 음악은 주류 팝음악 씬에서 계속해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주59) 1970년대의 유로 디스코 사운드를 정착시키는 데는 유럽의 아티스트들인 실버 컨벤션(Silver Convention), 러브 앤 키세스(Love & Kisses), 뮤닉 머신(Munich Machine)과 미국 아티스트들인 도나 썸머(Donna Summer, 도나 서머: 1948~2012)와 빌리지 피플(Village People) 같은 이들이 선도적 역할을 했다. 미국의 음악정보 사이트 올뮤직(AllMusic)은 도나 썸머의 <아이 필 러브>(I Feel Love: 1977년)를 히트시킨 프로듀서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 1940~ )를 "디스코 사운드의 주요한 건축가들 중 한명"(주60)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데, 모로더와 장-마크 세로네(Jean-Marc Cerrone: 1952~ )는 유로 디스코 곡들을 많이 창작했다. 또한 독일의 일렉트로닉 뮤직 그룹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도 유로 디스코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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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빌리지 피플'의 <와이 엠 시 에이>(YMCA). |
스웨덴의 혼성 4인조 그룹 아바(ABBA)는 오늘날까지도 유로 디스코 장르에서 가장 성공적인 아티스트들로 남아 있다. '아바'는 <워털루>(Waterloo: 1974년), <페르난도>(Fernando: 1976년), <태익 어 챈스 온 미>(Take a Chance on Me: 1978년), <김미 김미 김미>(Gimme! Gimme! Gimme! [A Man After Midnight]: 1979년)를 비롯하여 최대 히트곡인 <댄싱 퀸>(Dancing Queen: 1976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곡들을 내놓아 모든 시기에 걸친 베스트셀링 아티스트(best-selling music artists of all time) 중 8위에 기록되고 있다.
유럽의 또 다른 유명 팝 디스코 그룹들로는 네델란드의 여성 3인조 루브(Luv)와 독일(=서독)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보니 엠(Boney M.)이 있다. '보니 엠'은 서독의 프로듀서 프랑크 파리안(Frank Farian: 1941~ )이 카리브해 지역 출신의 가수와 댄서들을 선발하여 구성한 혼성 4인조 그룹으로서 <대디 쿨>(Daddy Cool), <마 베이커>(Ma Baker), <Riv리버스 오브 바빌론>(Rivers of Babylon) 같은 세계적인 히트곡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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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한국에서도 빅 히트했던 그룹 '보니 엠'. 하지만 1970년대는 오디오 시대로 그들의 동영상은 한국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유럽판 '신바람 이박사'였다. 아마도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한국인들이 이 동영상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
또 다른 유로 디스코 아티스트 중 프랑스의 모델 겸 가수 아만다 리어(Amanda Lear: 출생시기는 1937년설부터 1950년설까지 다양)는 <이니그마>(Enigma ["Give a bit of Mmh to me"]: 1978년)에서 가장 유로 디스코다운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인기가수 클로드 프랑소와(Claude François: 1939~1978)가 비지스(Bee Gees)의 히트곡 <매사추세츠>(Massachusetts)를 "La plus belle chose du monde"라는 제목의 프랑스어 번안곡으로 발표하여 프랑스 디스코의 황제로 거듭났고, [방송 인터뷰 중 직접 조명을 조정하다 감전사고로 사망한 후] 자신의 매장일에 발표된 유작 <알렉산드리 알렉산드라>(Alexandrie Alexandra)는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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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클로드 프랑소와의 <알렉산드리 알렉산드리>. 클로드 프랑소와는 약 7천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한 프랑스의 거물급 가수였다.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1915~1998)가 부른 <마이 웨이>(My Way)의 프랑스어 원곡 <Comme d'habitude>를 작곡하여 노래하기도 한 인물이다. |
이집트계 이탈리아인 여가수 달리다(Dalida: 1933~1987)가 발표한 <자텐드라이>(J'attendrai)는 캐나다와 일본에서 빅 히트를 기록했고, 장-마크 세로네가 초창기에 발표한 곡들인 <러브 인 씨 마이너>(Love in C Minor), <기브 미 러브>(Give Me Love), <슈퍼네이처>(Supernature)는 미국과 유럽에서 주요한 히트곡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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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니 엠...
너무 황당합니다.. ㅋㅋㅋ
이 팀이 그 유명한 <원 웨이 티켓>을 부른 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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