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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20) 2018. 12. 19
사무엘의 양심 선언
삼상 11:12-12:5
<지난 시간 요약>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하려 하자 겁에 질린 야베스의 장로들은 항복을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하스는 그 항복조차도 받아주질 않고, 오른 쪽 눈을 빼야 그 후에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이에 야베스 장로들은 7일의 여유를 얻어, 도움을 구하기 위한 전령을 전 이스라엘에 보냅니다. 그 사자 중 한 사람이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도 도착했습니다. 기브아 주민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울기만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들이 우는 것을 보고 ‘무슨 일로 우느냐’고 묻습니다. 전령을 통해 암몬 왕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모욕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고,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몰던 소 한 겨리(두 마리)를 잡아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며”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왔습니다. ‘여호와의 두려움’이란 여호와께서 주신 두려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의분을 주시고, 백성에게는 사울의 말에 ‘두려움’을 주셔서 사울의 권위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모인 군사가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해서, 도합 33만 명의 대군이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가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드디어 그 동안 원수같이 지내던 이스라엘 총회와 길르앗 야베스가 하나 되는 순간입니다. 피차간에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고, 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구원의 소식을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암몬 왕 나하스를 속이기 위해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10절) 전합니다. 이 말은 들은 암몬 왕 나하스는 경계를 풀고 잠이 듭니다. 그 날 새벽에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암몬을 기습하여 칩니다.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습니다.”(11절) 약속대로 날이 더울 때에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권위를 얻은 사울>
암몬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울에게 큰 권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12절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길르앗 야베스의 위기는 사울에게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대의 위기는 영웅을 만들어 냅니다.
전쟁의 승리로 인해 사울이 백성들의 돈독한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 때 한 가지 시험이 사울에게 옵니다. 실패했을 때만 시험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했을 때에도 시험은 옵니다.
백성들이 사울에게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하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전에 사울이 왕으로 제비 뽑혔을 때, 그를 비웃었던 비류들을 죽이자고 한 것입니다.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이는 사울의 마음을 읽은 기회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랬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지혜롭게 피해 갑니다.
13절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시험을 이긴 것입니다.
사울이 자신의 감정대로 결정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한 믿음 때문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의 승리가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였음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부름에 이스라엘이 ‘한 사람 같이’ 나오는 것을 본 사울은 그 순간 “아! 이번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전쟁이구나”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듯이 자신도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관용은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더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그의 결정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나라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소위 정치보복 조심해야합니다. 그리고 현명한 지도자라면 자신에게 반대한 세력까지 품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울은 집권 초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신정주의적 왕정 체제를 유지하였고 그의 길이 형통하였지만, 갈수록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추악한 정치적 탐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끝까지 자만심을 경계하며 자신에게서 경건의 능력이 떠나지 않도록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실수에 대하여 너그럽게 관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영벌에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길갈로 가자>
이 때 사무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4절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길갈로 가서 지금까지의 부족 동맹 체제를 접고 사울을 왕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왕정을 시작하자는 말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공식적인 즉위식을 거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왜 ‘길갈로 가자’고 한 것일까요? 길갈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으로 여리고 부근의 성읍입니다.
길갈은 매우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첫 발을 디딘 곳입니다.
그 때의 상황이 여호수아 3-4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3:15-4:8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1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그 도착한 곳에 열 두돌을 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길갈’입니다.
또 그들은 그곳에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수5:3). 즉 이방인이나 다름없던 그들이 할례를 행하여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난 곳이 길갈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길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곳입니다.
또 이곳은 사무엘이 매년 순회하며 통치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삼상 7:16).
사무엘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에까지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의 제안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로 갔습니다.
15절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사무엘 선지자는 거기서 화목제를 드리고 공식적으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를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 중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경배자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입니다(레 7:15-18). 그리고 하나님과 경배자 간의 화목 및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의미를 지닌 제사입니다.
그런데 15절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거기서’와 ‘여호와 앞에서’가 유독 강조되어 표현됩니다.
사울의 왕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세워지고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모든 일의 성공의 기초’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일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 없이 어떠한 일을 진행하여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자신에게 해악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그 일을 진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무엘의 양심고백>
그 자리에서 사무엘은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양심고백을 합니다.
1-3절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사무엘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하나님 앞에서’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사울) 앞에서’ 증언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불과할 수 있으니까 누구든지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답을 합니다.
4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놀랍게도 단 한 사람도 사무엘 선지자의 타락을 지적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명정대하게 행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고백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한 것은 잘못된 행동임은 반증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만, 이후 설교 중에 사무엘은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한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양심고백을 통해 새롭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직무를 시작하는 사울을 경계하고자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방과 같은 왕’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고’, 자신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처럼 행하라는 교훈을 담은 것입니다.
백성들의 대답을 들은 사무엘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습니다.
5절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 증언하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증언하시나이다 하니라.”
역사상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자기 양심에 비추어 볼 때 권력을 가진 자 중에 이와 같이 청렴결백하다고 증거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즉 권력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수많은 부정과 불의를 행해 왔음을 인류 역사는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잘 다스렸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하겠습니다(잠28:1).
<맺는 말씀>
이 사무엘의 양심고백은 오늘날 영적지도자들과 정치인들에게 큰 교훈을 남깁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잠시 통치권을 위임받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철저히 섬기는 자의 위치에 서야 합니다. 지도자는 성도(국민)를 지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권력을 이용해서 사욕을 채우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뇌물을 취하거나 부정 축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뇌물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부정축재는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또 나아가 권력의 자리에 연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적절한 시기에 물러날 줄 아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누구나 종국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계 받게 됨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마 25:19).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모든 인생을 주시하고 계십니다(‘코람데오’의 신앙 -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는 공명정대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칭찬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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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씀의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코람데오"의 사람을 다시 각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