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문안 인사
본문 / 빌4:21~23
주일 예배를 통해서 빌립보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7월 마지막 주부터 함께 보기 시작해서 오늘 20회 째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압송되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신앙의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전도 여행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유럽 지역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 도시가 빌립보였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 한 가정을 복음화 했고,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믿음의 기도와 찬송으로 옥문이 열리는 체험을 하면서 감옥을 지키는 간수의 가정도 복음화를 하며 이 두 가정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느 교회를 처음 세우든지 쉽게 세운 교회가 없었지만 특히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애정과 사랑은 더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옥에 갇히기도 했고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결국은 아무 준비도 없이 도망해서 피한 곳이 데살로니가 지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피해 있을 때 빌립보교회 성도들로부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쓸 것으로 도움 받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곳이 로마 감옥인데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또다시 헌금을 모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에바브로디도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에서 회복하자 빌립보로 돌려보낼 때 그의 손에 편지를 들려 보내는데 그게 빌빕보서입니다. 그러면 빌립보서 안에 있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이 보내 준 사랑을 생각하며 비록 감옥 안에 있지만 빌립보교회가 신앙으로 잘 세워져 간다는 소식에는 감사하기도 했지만 갈등과 분쟁 등의 소식을 들을 때는 가슴 아파 하며 마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듯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의 권면을 해 준 것이 빌립보서 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은 모든 신앙의 권면을 다하고 마지막 문안 인사와 축복으로 빌립보서의 문을 닫습니다. 세 절 밖에 안 되는 사도 바울의 이 짧은 마지막 인사말에 어떤 신앙의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빌립보서의 내용과 연결해서 그 신앙의 의미를 다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나 빌립보서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책이든 그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를 알려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를 찾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기쁨’인데 무려 16회나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나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서 그 신앙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형이 결정 된 것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권면해 줍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할까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기 생명을 걱정할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태연하게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주 안에서’라는 신앙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그 어떤 것도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잠시 잠깐이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좋은 것, 원하는 것을 얻어 내도 그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만큼 복원력이 강한 게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 기쁨과 행복, 만족을 얻어도 금세 잃어버립니다.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를 네모, 세모, 동그라미 모양이 나오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혀 놓고 마우스를 손에 쥐어 줍니다. 이 원숭이가 우연히 세모 모양을 클릭할 때 맛있는 주스가 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때 원숭이가 언제 가장 행복지수가 올라가는지를 알기 위해서 컴퓨터에 회로를 머리에 연결해 놓았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문제를 내겠습니다. 언제 원숭이가 가장 행복지수가 올라갔을까요? ①주스를 다 마시고 배가 부를 때, ②주스를 마실 때, ③주스를 막 마시려고 하는 순간, ④세모 모양이 컴퓨터 모니터에서 보일 때. 정답은 ④번입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원숭이의 뇌를 보니까 정작 주스를 마실 때는 행복지수가 평상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시사해 줄까요? 행복은 무엇을 정작 얻을 때 보다는 얻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더 생긴다는 뜻입니다. 하루 행복하려면 미장원에 가서 머리 손질을 하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여행을 하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1년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평생 행복하려면 남을 위해 봉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기간은 다르겠지만 사실 이 기간도 너무 길게 잡은 겁니다. 인간의 욕구나 만족은 일주일을 가지 않고 2,3일이면 끝이 납니다. 오히려 무엇을 얻었다면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피 말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얻어내지 못해서 불행한 것 같지만 정작 그걸 얻어내면 평상시와 똑같 애지거나 오히려 그걸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 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시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덮고도 남을 만한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은 기뻐했고, 또 모든 사람에게도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만족할 수 있었던 일체의 비밀을 배웠다고 한 것도 이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빌립보서를 보시면 사도 바울은 거의 습관적으로 ‘주 안서’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합니다.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주 안에서 영접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일이 잘 될 때에도 ‘주 안에서’, 잘 안될 때에도 ‘주 안에서’, 배부를 때에도 ‘주 안에서’, 배고플 때에도 ‘주 안에서’, 풍부할 때도 주 안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궁핍할 때도 ‘주 안에서’ 있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과 자족은 바로 그가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정답도 주 안에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모든 문제를 주 안에서 찾으시고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문안도 어떤 말로 합니까? 21,22절 말씀을 다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 이니라” 그렇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사실은 이 인사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편지를 받아 보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에게는 엄청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할 때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이 해 주는 말이 위로가 될까요? 아니면 나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모든 것을 극복한 사람이 해 주는 말이 위로가 될까요? 이게 여러분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나 보는데요. 그럼 제가 이렇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정말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그게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있다든지, 아니면 건강히 많이 좋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해 보시죠. 그런데 돈도 많고, 건강하고 남부러울 것이 잘 사는 사람이 와서 위로해 준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속으로 그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자기는 상황이 좋아서 그런 말을 하지, 당신이 내 상황이라면 쉽게 그런 말을 하겠어!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지금 나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다가와서 위로를 해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위로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다 경험했으니 나의 지금 상황과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에 마음 문이 열리고 위로가 되는 겁니다. 더 쉬운 예로 들면 제가 장애인 부모님을 만나며 사역한 적이 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부모님만큼 마음이 항상 무겁고 힘들어 하시는 경우가 없습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자녀가 어릴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소위 말하는 성공했다는 자식을 둔 부모가 찾아 와서 위로를 한다면 위로가 될 것 같습니까? 안됩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더 힘든 자녀를 양육하며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다 겪었던 부모님이 해준 말이 위로가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해 주고 있는 문안과 위로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 할 때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과 ‘가이사의 집 사람들’도 함께 문안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상황이 어떠했나요? 먼저 사도 바울의 상황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아픔과 고난을 겪게 되었는지는 특히 고후 11장에 가보시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만 보더라도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함께 있는 성도들도 문안한다고 했는데 이들은 누구일거 같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면 답이 나옵니다. 로마 황제의 지휘 아래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지키고 관리하는 로마황제 직속부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가이사의 집’이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 황제의 정부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폭군으로 그 유명한 네로인데 황제를 ‘주’라고 강요받던 시대로 주라고 부르거나 고백을 거부하면 직책을 빼앗기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기도 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감옥에서 자기를 감시하고 있는 로마 수비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복음의 능력이 있었으면 그 혹독한 네로의 정권 밑에서 가이사가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성도들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 보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도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목숨을 내 걸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며 자기들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 잘 믿고 있다고 문안인사를 한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나겠느냐는 겁니다. 구체적인 문안 인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런 문안 인사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이여,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쉽지 않지요? 우리도 네로의 통치 아래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들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서 그분을 믿고 따라가면서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동일한 믿음을 가르쳤던 바울이 옥에 갇혀서 그와 같은 것을 가르쳐주어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같이 힘을 내고 용기를 냅시다.” 이 문안 인사가 여러분들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당시 로마황제인 네로정권아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만만지 않고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돈과 건강이 내 주인이어야 대접받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며 사는 것은 고난의 길을 더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며 살면 더 힘들어 지는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오늘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나눈 마지막 문안 인사 안에 답이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되 신앙의 위로가 필요할 때입니다. 서로에게 힘을 내도록 하되 주안에서 힘을 내도록, 용기를 주되 주 안에서 내자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힘을 내자고 서로 문안하며 위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작은 교회가 더 신앙의 힘을 발휘 할 것으로 믿습니다. 현대는 특히 교회에서조차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 사생활에 관여한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나누되 그게 하소연이 아니라 기도 제목으로 나눠져야 합니다. 그 기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 있고 삶의 정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도록 신앙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 안에서 항상 기쁨을 체험하도록 매일 말씀과 기도로 나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든 심령에도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