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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18) 2023. 4. 5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삼하 8:15-18(대상18:14-17)
<지난 시간 요약 - 사방의 승리>
다윗이 왕이 된 이후 동서남북의 민족들을 제압하여 더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서쪽에 있는 블레셋, 동쪽에 있는 모압, 북쪽에 있는 소바(아람), 남쪽에 있는 에돔과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먼 옛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였습니다(창15:18 유브라데 강까지 영토 확장).
그러자 그들과 적대 관계에 있던 왕(하맛 왕 도이)이 사절단을 보내 다윗에게 감사 인사와 더불어 은과 금과 놋으로 만든 각종 귀한 그릇을 선물로 가지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다윗 왕은 이미 정복한 모든 민족에게서 가져온 것과 합해서 모두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이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삼하7:9)고 한 예언을 심비에 담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잘나서 이긴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진 결과임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기록한 저자도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6, 14)고 기록하였습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
그런데 잊지 않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승리를 기록하면서 주어를 다윗 한 사람으로 기록했습니다.
삼하8:13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 나가 실제로 싸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명령권자입니다. 다윗의 명령에 충성스럽게 헌신한 장수(부하)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이 전쟁 수행 능력이 탁월했으며 무엇보다도 주군에 대하여 충성심이 대단하였습니다.
평행 본문인 대상18:12을 보겠습니다.
대상18:12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인지라.”
주어가 달라졌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본문이 맞는 기록입니까? 둘 다 맞는 기록입니다. 다윗은 명령권자였고, 아비새는 명령을 수행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아비새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의 누나 스루야의 둘째 아들이자 요압 장군의 바로 밑의 동생입니다.
그는 과거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하길라 산에 진치고 있는 사울 왕의 진영에 몰래 들어갈 때에 함께 갔던 자 최측근 장수입니다. 잠든 사울 왕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니 자신에게 그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던 장수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요청을 거부하고, 사울 왕의 창과 물병만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위험에 빠졌을 때, 다윗을 도와 다윗의 목숨을 건진 적이 있던 최고의 부하 장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다윗은 타고난 전쟁 수행 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과거 블레셋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그가 탁월한 신체를 가졌거나 무기를 잘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셨기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소문이 그의 주변에 탁월한 부하 장수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삼상 22장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줍니다.
사울의 핍박을 피해 다윗은 ‘아둘람 굴’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즈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삼상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의 가족만 온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 왕권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영적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사울을 피하여 다윗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온전히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서 다윗을 수소문한 끝에 다윗이 있는 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혼자였지만,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우두머리가 됨).
그 후 10년간, 도피 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끈끈한 관계로 맺어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 부하들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인지 보았습니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부하들에게 크게 각인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리더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삼국지 – 유비가 최고의 장수가 아닙니다. 관우와 장비가 최고의 장수입니다. 유비는 덕을 겸비한 리더입니다.).
또 다윗 역시 부하들을 소모품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삼하 23장에 나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다윗이 무의식적으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삼하23:15)하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세 명의 용사가 비밀리에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더니,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왔습니다. 깜짝 놀란 다윗은 감동하여, 차마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여, 내가 어찌 이 물을 마실 수 있나이까?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닙니까?”(삼하23:17)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부하들의 목숨을 귀히 여겼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나라가 부강하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고, 두 번째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가 부흥하는 비결과 교회가 부흥하는 비결은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에는 좋은 정치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실력 있는 조력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좋은 영적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임원들과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사도 교회도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담임목사인 제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성도들 지극히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충성스럽게 주님의 ‘선한 청지기’같이 세워지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내치 – 정의와 공의>
지난 시간의 내용이 외부의 적과 싸우는 다윗의 모습을 그렸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윗의 내치, 곧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렸는지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통치를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5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다윗의 통치는 정의와 공의의 통치였습니다.
정의(righteousness)는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를 뜻합니다.
공의(judgment)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한 공정한 재판(통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그는 언제나 자기의 백성 모두를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렸다”고 번역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꿈꾸는 나라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암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잠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가 건강한 것을 보려면, 사법부가 온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냐를 보면 됩니다.
정치 권력과 무관하게, 경제 권력(재벌)과 무관하게, 차별 없이 법률이 적용되는지를 보면 그 나라가 건강한지를 압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10월 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25명 중 미결수 12명이 집단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9일 동안 서울 시내 이곳저곳으로 도주하다 그중 지강헌과 일당 몇 명이 북가좌동의 한 가정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입니다. 지강헌의 죄는 남의 집에 들어가 556만 원을 훔친 절도죄입니다. 그런데 무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도합 1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보호법은 이중처벌이란 논란을 속에 개정을 거듭하다 결국 2005년 폐기). 이에 분노한 지강헌이 탈주를 감행한 것입니다. 지강헌(35)은 인질극을 벌이는 와중에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남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씨는 수십억 원에 대한 사기와 횡령으로 1989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2년 정도 실형을 살다가 풀려났습니다. 지강헌 등은 돈과 권력이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박탈감과 불평등에 분노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나아졌을까?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화천대유라는 부동산 회사에서 퇴직금조로 50억을 받았는데... 결론은 무죄?? 상식적 퇴직금? 명백한 뇌물!!
경기도 지사를 지냈던 남모 씨의 아들이 마약으로 검거가 되었는데, 초범도 아닌데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5일 만에 또다시….
요즘은 ‘유검무죄, 무검유죄’란 말이 나돕니다.
한편, 정의와 공의라는 말 앞에 나오는 한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15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모든 백성에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합니까? 이 말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후손들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당시 ‘수많은 잡족’(출12:38)이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혈통을 따지지 않고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했습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될,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행한 자비를 통해 구체적인 통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의 자손(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단일민족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다문화 사회가 가면서 나타나는 ‘차별’입니다. 법률적 차별을 넘어, 일상에서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교회의 역할은, 우리 성도들의 역할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정의와 공의를 넘어서는 ‘사랑’의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행정 조직과 공정한 인사>
나라가 안정을 찾자, 다윗은 나라의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16~18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18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들이 되니라.”
다윗은 나라의 행정 조직을 4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각 분야에 적임자들을 임명했습니다.
첫째는 ‘군 사령관’을 세웠습니다(16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상시적인 군 조직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국방은 어느 시대나 중요합니다. 다윗 때는 주변의 이방 민족을 누르기는 했어도, 아직 태평성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능한 군 사령관이 필요했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요압은 용맹스럽고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적과 싸워 이긴 기록에는 요압의 이름이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압은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중요한 인물들을 살해해 다윗의 분노를 샀습니다.
다윗은 세상을 떠날 때 솔로몬에게 요압을 제거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왕상 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결국 요압은 다윗이 죽은 다음에 솔로몬에게 대적하다가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둘째는 ‘사관’을 세웠습니다(16절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사관’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으로 하면 경제 관료(기획 재정부)입니다.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국가의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경제 관료였습니다.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이 사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동명이인도 많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열 명의 여호사밧이 나옵니다.
셋째는 제사장을 임명했습니다(17절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독과 아히멜렉을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사독은 그 이름의 뜻이 ‘의로운’입니다. 사독의 집안은 제사장의 가문 가운데 가장 명문이 되었습니다.
신구약 중간 시대까지는 대제사장이 사독의 가문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넷째는 서기관을 임명했습니다(17절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우리는 서기관이라고 하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괴롭힌 사람들이 생각나서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의 서기관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 안팎의 서신 연락을 담당하고, 행정을 담당하고, 문서를 관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행정 안전부 장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서기관은 조선 시대의 사관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왕의 옆에서 왕이 매일 하는 일을 기록했습니다. 당시의 왕은 그 기록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기록으로 남아서 후대에 전해진다’고 하면 왕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사관은 또 고문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사건 등을 예로 들면서 왕에게 조언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서기관의 이름이 여럿 나오고 이들이 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기록을 보관하고(렘 36:25-26), 나랏일에 대해 조언하고(대상 27:32),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기록하고(삼하 8:17), 성전 수리도 맡았습니다(대하 34:18). 성전의 헌물을 계수했고(왕하 12:10), 왕의 조서를 작성했고(에 3:12), 유사시 왕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8:18). 인구조사의 기록도 서기관들이 기록했습니다(왕하 25: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민족을 관할하는 지방 장관을 두었습니다(18절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은 모두 가나안 남쪽 블레셋 주위에 살던 민족입니다.
이렇듯 다윗은 좋은 동역자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였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이든 기업이든, 교회이든 국가이든 모든 조직에 있어서 구성원들이 체계적인 협조와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만이 응집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즉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큰일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 시대에도 조직을 정비하여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고(출18:19~26), 초대교회에도 직분을 나누어 일하도록 분배하였습니다(행6:5).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입니다. 은사가 다르고 역할은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입니다.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사도교회 성도들은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좋은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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