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음(獄中吟)-한용운(韓龍雲)
옥중에서 읊다-한용운(韓龍雲)
壟山鸚鵡能言語(농산앵무능언어) : 농산의 앵무새는 언변이 좋아
愧我不及彼鳥多(괴아부급피조다) : 내 언변 그 새에 못 미치 못함 부끄러웠네
雄辯銀兮沈默金(웅변은혜침묵김) : 그러나 웅변은 은이라지만 침묵은 금이라니
此金買盡自由花(차김매진자유화) : 나는 이 금으로 자유의 꽃 몽땅 다 사버리네
추안이수2(秋雁二首2)-한용운(韓龍雲)
기러기-한용운(韓龍雲)
天涯一雁叫(천애일안규) : 하늘 멀리 외기러기 울고
滿獄秋聲長(만옥추성장) : 감옥에도 가득한 가을소리 길기만 하다
道破蘆月外(도파노월외) : 길 끊어진 갈대밭 밖의 저 달이여
有何圓舌椎(유하원설추) : 무슨 이유 있어 둥근 쇠몽치 혀를 내미는가
추안이수1(秋雁二首1)-한용운(韓龍雲)
기러기-한용운(韓龍雲)
一雁秋聲遠(일안추성원) : 외기러기 가을소리에 멀어지고
數星夜色多(수성야색다) : 밤은 깊어지고 하나 둘 별이 돋느다
燈深猶未宿(등심유미숙) : 등불 짙어져 잠도 오지 않는데
獄吏問歸家(옥리문귀가) : 옥리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다
황매천(黃梅泉)-한용운(韓龍雲)
황매천-한용운(韓龍雲)
就義從客永報國(취의종객영보국) : 의로운 길로 객을 따라 영원히 보국하시니
一瞋萬古生新新(일진만고생화신) : 한번 부릅 떤 그 눈, 만고에 새 꽃으로 피어나시리
莫留不盡泉坮恨(막류부진천대한) : 끊나지 않은 황매천의 한을 남지지 마시리
大慰苦忠自有人(대위고충자유인) : 큰 위로 괴로운 충성을 사람들은 절로 알리다
침성(砧聲)-한용운(韓龍雲)
다듬이질 소리-한용운(韓龍雲)
何處砧聲至(하처침성지) : 어디서 다듬이 소리 들리는지
滿獄自生寒(만옥자생한) : 감옥 속에 가득차 찬기운 몰고 오네
莫道天衣煖(막도천의난) : 천자의 옷 따뜻하다 말하지 말게나
孰如徹骨寒(숙여철골한) :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움을 누가 알리오
증별(贈別)-한용운(韓龍雲)
이별하며 주다-한용운(韓龍雲)
天下逢未易(천하봉미이) : 같은 하늘 아래서 만나기도 어려운게
獄中別亦奇(옥중별역기) : 옥중에서 하는 이별 또한 기이하기도 하다
舊盟猶未冷(구맹유미냉) : 옛 맹세 아직 식지도 않아
莫負黃花期(막부황화기) : 국화 피면 다시 만날 기약 잊지 말게나
추회(秋懷)-한용운(韓龍雲)
가을 속, 내 마음-한용운(韓龍雲)
十年報國劒全空(십년보국검전공) : 십년 보국에 칼집은 텅 비고
只許一身在獄中(지허일신재옥중) : 오직 이 한 몸 옥중에 있구나
捷使不來蟲語急(첩사부래충어급) : 승리의 기별은 오지 않고 벌레 소리 요란한데
數莖白髮又秋風(수경백발우추풍) : 백발은 늘어가는데 또다시 가을바람 불어온다
설야(雪夜)-한용운(韓龍雲)
눈 오는 밤-한용운(韓龍雲)
四山圍獄雪如海(사산위옥설여해) : 사방 산은 감옥을 두르고, 내린 눈은 바다 같은데
衾寒如鐵夢如灰(금한여철몽여회) : 무쇠처럼 차가운 이불 속에서 꾸는 꿈은 재빛이어라
鐵窓猶有鎖不得(철창유유쇄불득) : 철창은 여전히 잠기어 열리지 않은데
夜聞鐵聲何處來(야문철성하처래) : 깊은 밤 쇳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가
기학생(寄學生)-한용운(韓龍雲)
학생에게-한용운(韓龍雲)
瓦全生爲恥(와전생위치) : 기왓장 같은 내 삶이 부끄러워
玉碎死亦佳(옥쇄사역가) : 옥같이 부서져 죽음이 아름다우리
滿天斬荊棘(만천참형극) : 하늘 가득한 내 마음 찌르는 가시들
長嘯月明多(장소월명다) : 소리내어 읊으니 달빛은 밝아만 진다
견앵화유감(見櫻花有感)-한용운(韓龍雲)
벚꽃을 보고 느낌이 일어-한용운(韓龍雲)
昨冬雪如花(작동설여화) : 지난 겨울 눈 꽃 같았는데
今春花如雪(금춘화여설) : 올 봄 꽃은 흰눈 같구나
雪花共非眞(설화공비진) : 눈도 꽃도 진짜가 아니거늘
如何心欲裂(여하심욕렬) : 어찌 내 마음은 찢어지려 하나
病愁(병수)-韓龍雲(한용운)
병든 근심-韓龍雲(한용운)
靑山一白屋(청산일백옥) : 푸른 산에 흰 집 한 채
人少病何多(인소병하다) : 인적은 드문데 병은 어찌나 많은지
浩愁不可極(호수불가극) : 맑은 근심 끝이 없어
白日生秋花(백일생추화) : 한낮에도 가을꽃 피어난다.
한용운 [韓龍雲, 1879.8.29~1944.6.29]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