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울산서 오는 버스를 타려고 경주 IC 근처에 있는 서라벌 광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네비를 치니 고속도로에서 경주 들어오는 길에 있다고 가리켰다. 어제 들은 ‘고속도로 가는 길의 마지막 휴게소’라는 말이 귀에 쟁쟁했다. 네비게이션도 백프로 아냐! 하며 안내를 무시하고 달렸다. 끝내 휴게소는 보이지 않았고 아까 네비 처자가 가리키는 곳이 맞았다.
다시 가려고 큰길로 나오자마자 내 차는 다른 차들 사이에 끼어 고속도로 진입로를 통과해야 했다. 약속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게 내 판단을 쥐어흔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우왕좌왕하다 겨우 회차 지점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쇠창살이 떡 버티고 섰다. 우짜꼬! 오늘 답사 가기는 틀렸다. 포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미 차 머리를 대구 쪽으로 들이댔으니 그냥 반월당역으로 달릴까 말까 기로에 섰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 했지. 회차 안내 번호로 연락했다. 동그란 스피커에서 고속도로를 ‘사용합니까’? 멘트가 나왔다. 깜짝 놀라 ‘아니요, 네. 사용합니다만 나는 서라벌 광장으로 가야 합니다’ 했다. 생각이 꼬이니 말도 배배 틀어졌다. 끼이익! 교도소 문 같은 육중한 쇠창살이 다리를 번쩍 들었다. 후유! 십 년 감수했다. 처음부터 믿어야 했는데 믿다가 말다가 했더니 내 그림은 망가진 수채화가 되었다.
버스는 대가야 박물관에 도착했다. 우리는 시계바늘을 뒤로 돌리고 돌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1600년 전, 대가야 고분군에 들어섰다. 왕릉 44호를 재현해놓은 묘지 안에는 한낮의 오수를 즐기는 참인 듯 조용했고 부단한 우리 발걸음만이 침묵을 깼다. ‘누구냐 남의 단잠을 깨우는 놈이’ 무덤 주인이 벌떡 일어나 호령 칠 것 같았다.
그럴싸한 분위기에 맞게 조명을 비추는 묘지에는 도포 자락 휘날리는 검객도 없었고 공포 영화처럼 무섭지도 않았다. 자랄 적 고향 동네 어귀에 새로 들어선 29호 30호 31호 문패를 단 연립주택같이 아늑했다. 죽음에 초연할 나이가 되어서일까? 순장 당한다는 일이 내 코에 걸린 석 자가 아니어서일까? 무덤이란 생각보다는 한 마을 사람들이 오손도손 정답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다만 그들은 백골이 되어 누워있을 뿐이었다.
임금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이고 내가 만약 순장 대상자라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겁이 나 도망쳤겠지. 언젠가 본 소설에서 아라가 도망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꿈에서처럼 달려도 달려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때 붙잡혔다면 순장 당할 수도 있을 뻔했잖은가. 벌떡 꿈에서 깨어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행들은 임금님 수라상 같은 밥상에 마주 앉았다. 과연 맛집다웠다. 마치 순장묘에 묻힐 대상자에 간택되어 받은 마지막 만찬 같은 차림상은 우리를 술독에 빠지게 했다. 막걸리 소주 맥주 한 잔에 얼굴들이 발갰다. 한약 때문에 밀밭 근처에 안 간 내 얼굴도 불그레했다. 금주 기간이 후딱 지나가길 바랐는데 더디 가서 열 받은 건가? 또는 왕릉 속에서 이승 저승을 넘나들다 보니 알게 모르게 긴장이 됐던 건가?
지난날 공동묘지 옆을 지날 때는 무서워 떨면서도 초연했었지. 무덤 위로 손이 쑥 올라와 내 옷깃을 당길 것 같은 두려움에 얼마나 종종댔던가. 요즘은 웬만해서는 무섭지 않다만은 가족들이 조심하라고 걱정한다. 책임 다했다는 해방감이랄까?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페 이 층에서 기타와 노래가 흘러나왔다. 방금 버스에서 이순신 장군이 통째로 커피숍을 전세 낸다 했는데 새로이 밴드를 불렀나? 아니면 어느 회원이 악기를 가져왔나 궁금했다. 내가 좋아하는 7080 노래에 손뼉 치고 소프라노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나들었다. 으샷으샷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홍교수님께서 몸을 흔들며 노래에 맞춰 분위기를 살리는 중이었다. 경주 첫 답사에서 동실동실 춤을 추던 동조 선배님이 옆에서 거들었다. 나비 같은 선배님 춤이 나의 서먹함을 한 방에 날렸던 그때가 생각났다. 스트레스 다 날려버리자고 나도 벌 나비 춤판에 끼어들었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나도 후다닥 기차에 올라탔다. 옛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재밌다. 즐겁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 그 누가 말릴까, 옆에 앉은 고령 댁도 가요무대 온 것처럼 흔들어댔다. 같이 등단한 동갑내기 경자 문우도 한몫했다. 우리는 오래 만난 천년지기가 되어 블루베리 스무디, 아메리카노, 커피라떼, 참깨라떼 너도나도 나눠주고 인심 좋은 카페주인의 베이커리 서비스까지 꿀꺽했다. 12줄 가야금이 아닌 여섯 줄 기타에 장단을 맞추었다.
집에 들어서자 남편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바싹 다가왔다. 즐거웠던 오늘 하루를 빼앗길까 꽁꽁 껴안고 있는데 뜬금없이 글감 많이 갖고 왔냐고 물었다. 빈정대는 말투가 아니었다. 의아했다. ‘하모 오늘은 버스 한 대 왕창 몰려갔더니 가야 임금님도 솔봤던지 두 팔 들고 내주더라’ 두 번이나 같이 갔지만 한 편도 못건진 게 남편 탓인 양 큰소리쳤다. 책을 언제 발간할 거냐 물었다. 이상해.
허리 아픈데 오래 앉아 있어서 병을 키운다고 글 쓰는 걸 나무라던 남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베짱이처럼 살라 했다. 내 하고 싶은 것하고 살리라. 남이사 지폐로 뒤를 닦던, 책을 내던 남의 인생에 간섭 말라 힘겨루기했던 남편이었다.
올봄 대구로 에세이포럼 다니면서 나도 책을 내야겠다고 공표했다. 책을 안 낸 사람은 나뿐이고 두 권, 세 권, 네 권 낸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더니 그 잘 쓰는 글로 책을 묶나 하던 사람이었다. 내 뒤에 줄을 선다니 하루 사이에 큰 지각변동이 났다. 내 책을 낼 때 뒤에다 당신 글 몇 편 올리자는 심중이었다.
임금님 돌아가시면 하관할 때 묘에 뛰어든 신하가 많았다고 하던 문화 해설사의 설명이 맞네. 책 출간하는데 끼어들어 책값을 반이나 부담하겠다고 덤벼드는 남편이 참 고맙다. 그게 다 가야왕 덕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