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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19) 2026. 7. 15
게하시의 탐심
왕하5:20~27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가, 나병을 치료받은 나아만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엘리사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앞에서 자신을 ‘당신의 종’(15)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으로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려주어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강하게 선물을 거절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까지 하며 예물을 받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1) 엘리사는 지금 자신이 돈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이나 축복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아만에게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렇게 나귀 두 마리에 ‘흙’을 싣고, 아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탐욕이 생긴 게하시>
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에서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20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환’(使喚)이었습니다. ‘사환’은 그저 ‘잔심부름이나 하는 사람’ 정도의 ‘종’이 아닙니다. 장차 그를 대신해서 선지자 직을 이어갈 후계자입니다.
엘리사 역시 예전에 엘리야의 ‘사환’이었습니다. 왕상 19장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대신할 선지자로 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부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왕상19:21).
당시 엘리사에게는 많은 ‘선지 학교’ 학생들(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게하시는 특별히 엘리사의 최측근으로 선택되어 ‘사환’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게하시는 장차 엘리사의 뒤를 이어서 선지자 직을 감당할 후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 게하시의 마음속에 탐욕이 생겼습니다.
엘리사가 아무것도 받지 않고 나아만을 그냥 돌려보낸 것을 아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끝까지 그로부터 예물을 받지 않는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게하시는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이 상당한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견물생심).
선지 학교에도 큰 도움이 될만한 양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는지를 본문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이르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생각’입니다.
사환(종)은 본래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설혹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진정한 종이 되려면 주인의 생각과 다른 ‘자기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생각을 옳다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태도와 비교됩니다.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 엘리사의 지시를 받고 화를 냈다가 곧 ‘내 생각’(왕하 5:11)을 버리고 결국 순종했습니다. 반면,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환이었음에도 그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 마음에 악한 생각을 집어넣는 악한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태초부터 사탄이 해온 일은 그럴듯한 생각을 집어넣어 사람을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그럴듯한 말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선악과를 먹는다고 해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마음에도 ‘예수님을 팔 악한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마 26:15~16).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악한 생각’(특히 탐심)이 깃드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만큼 위험합니다.
<탐욕으로 인한 범죄>
오늘 본문은 탐심이 얼마나 큰 범죄를 가지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습니다.
게하시는 속으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하기 위해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16절).
그런데 게하시는 나아만의 예물을 받아 내기 위해서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20절).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물론 게하시의 이 말은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상투적인 말로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인 것입니다(출 20:7).
둘째, 엘리사의 이름을 도용하여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21~22절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게하시는 나아만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나아만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합니다.
‘수레에서 내려서 맞이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존경의 표시로 근동 지방뿐 아니라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예의범절입니다.
나아만이 게하시에게 그렇게 깍듯하게 대접하는 이유는, 그가 ‘엘리사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게하시는 엘리사 때문에, 아니 하나님 때문에 나아만에게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게하시가 쫓아오는 것이 이상해서 ‘평안이냐’라고 묻습니다. 게하시의 서두르는 행동으로 인해서 엘리사에게 어떤 불상사가 발생하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선 것입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천연덕스럽게 스승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모두 게하시가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이 거짓말은 누구든지 들으면 진실일 것 같습니다. 당시에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38). 갑자기 먼 곳에서 제자들이 찾아왔다면, 궁핍하던 선지 학교의 사정상 그들을 위한 물품과 옷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많은 것을 요구하면, 훗날 탄로 날 것이 두려워 최소한의 요구만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 한 달란트(27kg 가량의 은의 가치는 한화로 5400만 원(2025년 기준))와 옷 두 벌 만을 요구하는 간교함을 보인 것입니다.
셋째,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범죄하게 하였습니다.
23~24절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나아만은 게하시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게하시가 요구한 것보다 두 배의 돈을 얹어서 주었습니다. 그것을 자기 ‘사환’에게 둘에게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숨겼습니다(선지 학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탐욕). 아마도 자기 수하에 있는 ‘사환’ 둘에게도 물건을 나누어 주어 입막음을 하였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완전 범죄를 꿈꾸었습니다.
넷째, 엘리사의 직접적인 질문에도 거짓말로 대답하였습니다.
25절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자,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앞에서는 나아만을 속이더니, 이제는 그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엘리사를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그동안 엘리사 곁에 있으면서, 그가 어떤 일을 행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짠물을 소금을 던져 맑은 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늙은 남편을 둔 한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는데, 엘리사의 말 한마디에 여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일을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그 아이가 하루는 갑자기 죽었어요. 엘리사가 그 아이를 다시 살려낼 때 게하시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보리 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백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먹이고도 남게 하는 장면도 직접 보았습니다.
국에 들어간 독을 가루를 던져 해독시키는 기적도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나아만의 나병이 치유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엘리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게하시가 지금은 어리석게도 엘리사를, 아니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이와 같이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얼마든지 하나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을 때, 게하시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 아닙니다. 아시면서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게하시는 회개하기보다 ‘거짓말’로 속이려 들었습니다.
지금 게하시의 상태를 보면, ‘죄의 덫’에 단단히 걸렸습니다. ‘덫’에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한번 거짓말한 것이 연속적으로 다른 거짓말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탐심에 의해 거짓말을 했는데, 나중에는 두려움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덫인데 이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면, 하나님은 그의 죄를 들추어내시고 심판하십니다.
<엘리사의 책망과 나병에 걸린 게하시>
거짓말로 일관하는 게하시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엘리야는 책망하였습니다.
26~27절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는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합니다. ‘내 마음이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를 속이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범한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속이려다 책망을 받은 사람들 이야기가 간간히 나옵니다. 간담이 서늘한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시날 산 고급 외투를 훔쳐 자기 장막에 감추었던 아간도 있었고(수 7:21), 억울한 죽임을 당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나섰던 아합 왕도 있었습니다(왕상 21:15-19). 자기 밭의 판매 대금의 일부를 집에 감추고 베드로에게 다 바치는 듯이 속였던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행 5:1-1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악행을 현장에서 일일이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은 커다란 위로도 되지만 커다란 두려움도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행은 긍정적으로는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도우시며 나의 길을 안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의 동행은 내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다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게하시는 ‘나병’이 발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 나아만은 하나님을 믿고 나병을 고치고 돌아갔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히 엘리사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선택되어 섬겨왔던 게하시는 이제 오히려 그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요 먼저 구원받은 자였다고 하더라도, 만일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은혜>
오늘 본문 바로 뒤의 왕하 6장에 보면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살고 있던 도단 성에 쳐들어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아침 일찍 나가서 아람 군대가 성을 에워싼 것을 발견하고 두려워서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군대가 불 말과 불 병거로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환이 누구일까요? 그가 바로 ‘게하시’입니다.
그런데 왕하 8장에 보면, 그 사환이 수넴 여인의 땅을 찾아주려고 이스라엘 왕을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절에 그 사환의 이름이 나옵니다.
왕하8:4 “그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하며 이르되 너는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일을 내게 설명하라 하니.”
놀랍게도 그 사환은 바로 ‘게하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하시는 ‘나병’에 걸렸지만,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회개함으로 다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살인죄를 범했던 모세도, 간음죄를 범했던 다윗도 회개함으로 다시 주의 종으로 쓰임 받은 것처럼, 게하시도 또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게하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탐심’이 얼마나 큰 죄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에는 어둠의 세력이 틈타기 마련입니다.
승리에 도취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방심하며 낙관하는 동안에 어둠의 세력이 잠입하여 일을 망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어둠의 세력을 얕보거나 경계의 끈을 늦추면 악의 무리는 잔치를 벌입니다. 내 영혼에 틈이 생기면 마귀가 들어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고 경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런 경고와 권면의 말씀들은 우리가 아무리 들어도 부족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게하시와 같이 탐심에 넘어가 여러 가지 죄를 짓지 말고, 오직 순전한 마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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