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추리
1)대추리 마을의 현대사
‘50년 전에도 미군 때문에 나가라더니 또 쫓아내려고 하느냐!’
지난 5월 9일 용산 미군기지 정문 앞,‘미군기지 평택 총집결 결사반대’를 쓴 조끼와 피켓을 든 한 무리의 군중들이 하늘을 향해 절규하였다. 이들은 50년 전에도 나라를 위한 일이니 개인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며 대책 없이 몰아내더니, 그동안 고생고생하며 일군 마을과 농토를 내놓고 또 나가라는 것이 말이나 되냐며 울분을 토했다. 군중들 대부분은 이번 주한미군 전체가 안정리와 송탄으로 이전하면서, 이전용지 안에 대추리가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마을주민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안정리 K-6부대 확장에 3백만 평이 예정되었는데, 대상지역에 대추리를 비롯하여 흑무개들 일대가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50년 전처럼 또다시 정든 고향집과 논밭을 내놓고 또 다시 쫓겨나야 하는데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하느냐는 것이었다.
대추리는 조선시대 평택현 서면지역이다. 올망졸망한 구릉지대에 마을과 농경지가 형성되었고, 서북쪽으로는 곤지나루와 내리(內里)라는 면(面) 소재지가 있어서 사람살기에 좋은 포실한 동네였다. 김석경(77) 옹은 마을이 삼태기 같아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했으며, 마을 옆에는 저수지가 있어 물 걱정 없이 농사지었던 풍요로웠던 동네였다고 회상했다. 지극히 평온했던 이 마을에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일제 말 일본해군시설 보급대가 징용자들을 차출하여 비행장을 건설하면서다. 하지만 삽과 들것, 달구지만으로 지은 비행장은 규모나 시설에서 형편없었고 곧바로 패망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해방과 한국전쟁 중에 진주한 미군은 달랐다. 1952년 옛 일본해군 302부대 자리에 미군 K-6기지가 주둔하자 이들은 중장비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비행장을 넓혔다. 그리고는 비행장 주변에 있던 옛 대추리 마을에게 이주명령을 내렸다. 이주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중장비를 가져와 담장을 허물며 협박을 했다. 당시는 한국전쟁 중이었고, 미군은 우리를 도와준 우방이라는 생각에 주민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였다.
주민들은 수 백 년 정든 고향을 버리고 대책 없는 보따리를 샀다. 이주비는 물론이려니와 당장의 생계대책도 없는 강제이주였다. 이들은 마을 근처 곤지나루 야산에 토막집과 천막집을 짓고 임시거처를 마련하였다.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두 집에 하얀 천막 1동과 보리쌀 한 가마 그리고 목재 두, 세 지게뿐이었다. 그리고 미군부대 담장에 기대어 조상들이 물려준 고향 뒷산과, 마을, 피와 땀이 서린 농토들이 중장비의 굉음에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 뒤의 일이야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가을 추수기에 쫓겨난 주민들은 새벽이면 부서진 옛 집의 목재들을 곤지머리로 나르고 낮에는 추수를 했으며, 밤늦도록 새로 지을 집터를 닦았다. 그렇게 한집, 두 집 지어 80여 호의 집들이 완성되었다. 어렵사리 지은 집들은 대부분 초가삼간 오막살이 뿐이었지만 대책 없이 떠날 때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그렇게 50년 세월, 이제 자식들 다 키워 시집 장가 보내놓고 새 집을 지어 살 만 하니까 나가라고 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것은 분통이 아니라 한(恨)이라야 옳았다.
2)곤지머리의 영광과 회한
현재의 대추리 마을은 본래 곤지머리라고 불렀다. 마을이 옮겨오기 전 이곳에는 인가 몇 집과 안성천 북쪽 옛 수원부로 건너가는 큰 나루가 있었다. 18세기 초에 쓰여진 팽성지에도 “곤지나루(昆地津)는 현청에서 서쪽 칠 리쯤에 있는데, 여기가 수원으로 왕래하는 나루터이다. 밀물 때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썰물에는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다. 고깃배 소금배 들이 나루터에 매어 있는데, 이 나루터의 위쪽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라고 소개하였다.
내용으로 보면 18세기 초 곤지나루는 토사의 유입으로 썰물이면 큰 배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었고, 밀물 때만 배를 타고 건너거나, 고깃배, 소금배가 드나드는 비교적 한산한 나루였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고대(古代), 중세(中世)의 곤지나루는 안성천 변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화성군의 당항성이 대당 교역창구로 크게 부상하면서 이곳은 경주에서 대구, 청주를 거쳐 천안, 둔포로 이어지는 육로와, 아산만과 남양만을 연결하는 수로교통의 연결고리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단초가 안정리 서정자 마을의 유래다. 서정자 마을에 대한 기록으로는 팽성지에 ‘이 마을에는 본래 서정자라는 누정(樓亭)이 있는데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쉬어갔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서정자 마을이 본래 중국으로 가는 큰 길가였고 둔포에서 곤지나루를 오가는 중간 쉼터였다는 말로, 고대국가에서 곤지나루가 중국사신들이 오가는 큰 나루였음을 말해준다.
곤지나루가 나루터의 기능을 상실한 시기는 조선말쯤이다. 예컨대 1899년에 편찬된 평택읍지에도 나와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시기의 교통, 통신이 수로(水路)나 보로(步路) 중심에서 철도와 자동차 중심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철도건설은 옛 평택고을(팽성읍)을 쇠잔케 하고 신흥도시 평택의 발전을 가져왔다. 행정 뿐 아니라 상업과 유통의 중심이 바뀌면서 밀물을 이용하여 아산만에서 잡은 생선이나 소금을 풀어놓고 가던 어선들도 평택의 군문포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몇 십 년 후 추억만이 남은 쇠잔한 옛 나루터에 미군부대의 진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대추리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배가 들어오던 갯고랑과 갯벌을 막아 농토를 일구었다.
3)대추리 간척사
대추리의 역사는 간척의 진행과정이다. 이 마을은 간척을 통하여 경제기반이 형성되었고, 간척을 통하여 살아남았다. 간척의 시작은 최소한 3, 4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추리의 조상들은 마을 앞으로 깊숙이 들어온 갯벌을 막아 논으로 일구었다. 당시는 이앙법의 발달과 농경지의 저지대 확산으로 생산력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농민들은 간척한 땅에 이름을 붙였다. 예컨대 가을 추수를 끝내고 막은 원(소규모 간척지)은‘가을원’이라고 붙였고, 남쪽에 간척한 것은‘남원’, 소규모로 간척한 땅은 ‘작은원’, 크게 막은 것은 ‘큰원’이었다. 당시만해도 간척할 만한 도구가 ‘가래’라는 것 밖에 없어서 ‘가래원’,‘세가래원’,‘다섯가래원’,갈대가 많아서‘갈대원’이라는 지명도 생겼다.
이 같은 간척사업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근대 간척사업은 일본인들과 서울 사는 부재지주들이 주도하였다. 그렇게 해서 황새울들, 흥농계들, 작은흥농계들 등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간척한 땅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고, 대지주들의 토지확대를 가져왔다. 염기 많은 논들은 비교적 흔했던 농업용수를 얻기도 힘들어서 몇 년씩 묵혀야 했다. 그래서 간척지는 기름진 고라실 논들에 비해 값이 월등하게 쌌다. 황새울들이 그랬고, 흥농계들도 매 한가지였다.
토지는 척박하고 어려움은 많았지만 농민들은 다 운이 없어 그랬다며, 정부가 하는 일이니 협조해야한다며 참고 넘어갔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값이 헐하다고 흥농계 땅을 샀다가 소송에 휘말려 다 날려버렸어도 농투산이는 땅을 파먹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며 오늘날까지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지켜온 땅과 고향을 정부가 또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속이 터진다. 아니 뒤집어진다.
4)신심(信心)이 사라지면 당신(堂神)도 떠난다
18세기 초에 편찬된 팽성지에는‘곤지나루는 서쪽으로 7리쯤에 있는데... 나루터의 위쪽에 기우단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기우단은 하지(夏至)가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고 밭곡식이 마를 때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행사였다. 그래서 국가나 관청에서 주관하는 경우가 많아, 나라에서는 왕이나 당상관이 제주(祭主)를 맡는 경우가 많았고, 지방에서는 고을의 수령이나 마을의 대표자가 맡았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용(龍)이 비(雨)를 지배한다고 믿어 용신(龍神)에게 기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용(龍) 중에서도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는 이무기를 섬겼다. 이무기가 승천하기 위해서는 3일 동안 땅을 촉촉이 적실만큼의 비(雨)가 내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우제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알려졌다. 특히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왕이 정사를 잘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죄인을 석방하거나 스스로 자숙하는 태도를 취했으며, 종묘, 사직과 4대문, 선농단, 경회루 등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이처럼 기우단은 국가운영에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다. 그래서 국가나 관청에서는 기우단을 신성하게 여기고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힘을 썼다.
옛 평택현(현 팽성읍)에서 기우단은 팽성읍 석근리 뒷산과 곤지머리에서만 확인된다. 이 가운데 팽성지가 쓰여졌던 18세기 무렵에는 석근리 것은 폐하고 곤지머리에서만 제를 올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곤지머리의 기우단이 조선 말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곳이 조선 말기까지 교통과 어업의 중심나루였다는 점과 비를 내리는 신령스런 이무기 전설이 있어 신통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잠시 곤지나루 기우단의 이무기 전설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났다. 망망대해에서 배 밑에 구멍이 났으니 절망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어디선가 큰 이무기가 나타나더니 자기 몸으로 구멍을 막아주어 살아 돌아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곤지나루 사람들은 그 후 당집을 짓고 이무기를 섬겼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이 이무기를 섬기면서 해상사고도 줄었고 비도 잘 내려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대추리라는 지명도 가을이면(秋) 너른 들판에서 큰 수확(大)을 하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니, 기우단의 이무기는 신령스러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극한 신심으로 섬겼던 곤지머리 당제사는 1996년에 중단되었다. 마을 앞 너른 갯벌이 흑무개들, 흥농계들이라는 옥토로 바뀌고,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어 홍수나 가뭄걱정이 사라지면서 기우단은 효용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당제를 중단하는 것이 찜찜했던지 당집 터에 종제비(終祭碑)를 세워 땅과 용왕의 노여움을 달랬다.
첫댓글 김해규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출간한 책을 구입하고 싶은데. 평택 문화원에서 해야 하나요? 쭉 읽어보니 전에 평택 역사책도 내셨던데, 이왕이면 함께 구입하고 싶어요. 저는 지금 대추리 도두리 취재 열심히 하고 다니거든요. 답변 부탁해요.
경애하는 도령 김선생, 평택에 침투하면 곡주 사줄거요? 믿는 사람은 선생뿐이라~ 남한의 현존하는 무장백성 정토.^^
아, 정토선생님. 어째 날 알아보셨나요? 나 그때 아이디로 들어갔는디. 우리가 노는 물이 같은가 봐요. 반갑네요. 언제 대추리에 오실 수 있다면 대추리에서 한번 만나요. 저는 대추리에 사는 게 아니라 의왕에 살고 있어 자주 왔다갔다해요. 대추리 조직부장인 황민의 선생한테 얘기하면 직방으로 연락이 될 거예요.
그리고 나 도령 아니야요. 미모의 여인한테 갑자기 난데없는 도령이라뇨!!! .
^^
저는 주문진민족문화학교를 운영하는 백성인데요 이것이 인연이라면 평택에서 김해규선생과 함께 만나 책도 받으시고 함께 곡주 한 잔 하겠습니다. 도령 김선생이 추사 김선생님으로도 통용되는 세상 들사람 세상^^
좋지요. 대추리 3차 행진에 참석하고 지금 도착했어요. 언제 평택에서 한번 만나뵈어요.
아이고 등잔 밑이 어둡네요. 리플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야 들렀습니다. 죄송하고요. 24일에 뵙겠습니다. 늦더라도 양해하시길..
일찍 끝내고 와야 합니다. 수원 조원동 구, 한일합섬 입구입니다.
오늘에서야, 책을 봤네요...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