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철이 들면 죽는 거지요.
나의 이야기
2007-01-25 23:36:56
어제 오늘 내 머릿 속을 맴도는 말.
風塵 그리고 未忘 .
바람에 날리는 먼지.
버리지 못함.
어제 금산사 입구 삼거리에서
같이 산에 오를 知人들을 기다리며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기다리는 시간을 죽이려면 심심풀이 땅콩이 있어야 했고
그것은 목에 걸고 다니는 사진기를 심심치 않게 하는 일이였다.
길모퉁이에 잡초가 너부러진 별로 쓰임새 없는 빈 땅이 한줌 있었고
거기서 강아지같은 작은 몸집의 개 3마리가 이리뛰고 저리 가로 지르며 어울려 놀고 있었다.
갈색투성이, 온통 까망이 그리고 중키의 진도개같은 흰둥이 셋이였다.
마당 한쪽에는 좀 찌그러지고 칠이 상한 중형의 켐핑카 한대가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칠은 좀 남아 있었지만 녹슬고 너덜거리는 35인승 버스가
앙상하고 훵한 모습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폐차된후 몸둥이만 여기 실려왔을 것이다.
장난치며 물고 물리는 강아지들 모습을 몇 컷 담고 있을 때
그 버스 차체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
기름 투성이 장갑을 낀 그의 오르ㅡㄴ 손에는 대형 드라이버가 들려 있었다.
거의 6척에 가까운 키에 꽤 듬직한 체구 그리고 호남형의 얼굴이었지만
혈색이 좀 나빴고 얼굴 한쪽에 상처를 입어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사진 찍으시는가요?" 하고 그가 물었다. 발음이 좀 어눌했다.
그렇다고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왼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잠간 옮기는 발걸음이 좀 어색했다.
"예. 사람을 기다리는 중인데 요놈들 노는 모습이 재미 있어서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 아이구 , 이거 내가 남의 집 안마당에 들어왔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도 빌려서 쓰고 있습니다."
" 아, 그래요."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차체 안쪽을 들여다봤다.
좌석 의자는 없었고 여기저기 뜯기고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다.
" 이거 잘 꾸며 놓으면 멋진 거실이 되겠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예. 그렇지않아도 서재로 쓸려고 손질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다른 쪽에 있는 켐핑카를 가리켰다.
"저거 굴러가나요?"
"예.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제 침실이지요'
"침실...?"
"예. 그게 내 집입니다. 인천에서 휴양차 와 있습니다."
나는 비로소 그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백리라 합니다. 불가의 화두가 아니래도 이것도 인연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 예. ㅇㅇㅇ 라 합니다. 산에 오르실 겁니까?"
"예. 지금 지인들을 기다리고있어요. 곧 올 거예요."
"부럽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우선이지요. "
"댁도 건강해 보이는데요."
"5년전 까지는 그랬습니다. 남들 고생한다는 감기가 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힘 넘치고 부러운 게 없었지요.그런데 5년전에 중풍을 맞았습니다. "
" 저런. 그래도 충격이 가벼웠던 것 같아 다행이군요. 겉으로 보기는..."
" 지금 많이 좋아진 것입니다.처음에는 말도 잘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 불행중 다행이입니다.많이 불행한 사람들 참 많습니다.
사실 4~50 대 건강한 사람들 잘 먹고 잘 놀고 그러지요.
어느날 갑자기 불행이 닥치는데 건강을 과신하여 무절제한 탓이지요."
"예. 제가 그랬습니다.
잘 나가던 시절 누가 걱정하겠습니까.
그냥 마시고 싶은대로 마시고 먹고 싶은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철이 들었습니다."
" 나는 사실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였죠.
그래서 늘 조심하고 지금도 등산한다 뭐한다 신경쓰지요.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할 때 잘 관리하라 하면 그냥 웃고 넘어가지요.
무시하는 것이지요."
" 그렇습니다.
몸에 철이 들고보니 나도 철이 들었습니다.
인생도 생각하고 사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되었지요.
몸에 철이 들면 안되지만 마음에 철이 들면 사람이 되는 거 같아요. ㅎㅎㅎ"
몸에 철이 든다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야 짐작이 갔다.
몸에 철이 든다는 말은 몸에 칼을 댄다는... 즉 수술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왼팔을 쓸 수 없었고 왼쪽 발은 부자연스럽긴 해도 걸을 수는 있는 상태였다.
약간 어눌하지만 말하고 들는데 지장은 없었다.
5년 동안 노력한 결과라 했다.
얼굴의 상처는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생긴 거라 했다.
남의 쓰지 않는 마당을 빌려 침실용 켐핑카를 끌어다 놨는데
낡긴 했어도 생활하는데 불편은 없다고 했다.
폐차된 버스의 차체는 손질해서 서재 겸 거실로 쓰려고 한단다.
지금도 그 안에서 불피요한 것들을 뜯고 있었단다.
나는 그와 헤어져 지인들과 하루를 보냈지만
그의 모습과 그가 하는 말들이 머리 속에 남아있다.
만 62년 하고 100 여일.
내가 살아온 날들이다.
긴 세월인가?
그 많은 날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
강산이 여섯번 변한 세월이 짧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내앞에 남아있을 시간은 강산이 한번 변할까 두번 변할까.
결코 그 이상은 아니리라.
이 지구는 태양계의 극히 작은 한 점이다.
태양계는 은하계의 극히 작은 한 점이다.
은하계는 우주성군의 극히 작은 한 점이다.
이 지구와 우주성군의 어느 한 지점을 직선으로 이어가는데
지구의 시간으로 수십 수천 수만 억조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풍진만도 못한 지구.
그위에서 수없이 바등거리는 군상들.
그중에 하나인 나.
수많은 사람들이 엉겨 부풀리는 풍진속에서
풍진만도 못한 내가 그 풍진을 마시며 있다.
무엇을 버리지 못하는가.
무엇을 잊지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