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씨(韓氏) - 본관:청주(淸州)
본관 연혁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소재지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다.
성씨의 역사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 한란(韓蘭)은 《청주한씨세적연보(淸州韓氏世蹟年譜)》에 의하면 청주(淸州) 방정리(方井里) 무농평(務農坪)을 개척하여 호족이 되었으며 928년(태조11)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청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원래 청주한씨는 그 연원을 기자(箕子)의 원손인 준왕(準王)으로 하는데, 준왕이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해로(海路)로 마한(馬韓) 지역으로 도망와 한왕(韓王)이라 칭한 것을 성씨의 시작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이후 세계가 분명치 않아 후손들이 한란을 중시조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또한 마한 멸망 후 8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한우평(韓友平), 한우성(韓友誠), 한우량(韓友諒)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로 귀화하여 각각 북원선우씨(北原鮮于氏), 행주기씨(幸州奇氏), 상당한씨(上黨韓氏: 상당은 지금의 청주)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지금도 이 세 성씨는 통혼하지 않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고 한다.
청주한씨는 한란의 이후 곡산(谷山), 평산(平山), 안변(安邊), 한양(漢陽), 당진(唐津) 등 10여 본(本)으로 분관하였으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원되었다.
더불어 한란 이후 30여 파로 갈렸는데 그 중 가장 번창한 양절공파(襄節公派: 한확(韓確)), 문정공파(文靖公派: 한계희(韓繼禧)), 문간공파(文簡公派: 한리(韓理)), 몽계공파(夢溪公派: 한철충(韓哲冲)), 관북파(關北派: 한련(韓連)), 충성공파(忠成公派: 한명회(韓明澮)) 등 6파를 통칭 한씨 6파라고 한다.
주요 세거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청주한씨는 199,642가구 총 642,99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