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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손씨동우회(密陽孫氏同宇會) 원문보기 글쓴이: 孫昌完
삼국유사등 설화에 의하며 흥덕왕 때에 사람인데,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효도가
지극하였다.
어린아이 있어서 매양 어머니의 잡수실 것을 빼앗아 먹으니, 순이 그 아내에게
말하기 를, “아이가 어머니 잡수실 것을 빼앗아 먹으니,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구할 수 없다.” 하고는 아이를 지고 취산(醉山)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 하다가 홀연히 매우 기이하게 생긴 석종을 얻었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아내가 말하기를, “이 보물을 얻게 된 것은 아마
아이의 복입니다.
아이을 묻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순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곧 아이와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집 들보에 달아놓고 치니 소리가 왕궁(王宮)에 들리었다.
임금이 사람이 시켜 알아보니,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곽거(郭巨)는 아들을 묻으매 하늘이 황금 가마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으려하매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서로 부합된다.” 하고, 곧 집 한 채와 쌀 50석(石)을 하사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1권 慶尙道 慶州府 孝子 新羅 ≫
긍훈 : 밀양손씨의 중시조이시다
고려 태조 때 신기한 군공이 있어 광리군(広理君)에 봉해졌다. 응천과 광리가
밀양의 옛 명칭인 까닭에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이분은 신라의 국운이다
됨을 깨닫고 송도로 가서 왕건(王建)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후 후백제의 신검(神劔)이 아버지 견훤을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견훤이 탈출하여 왕견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때 손긍훈은 기병 1만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신검군을 대파하고 신검을 사로잡은 후 그 공으로 광리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고을 사람들이 밀양읍 동쪽 진화산 위에 사당을 세워 그를 제향했는데
그 후 난리가 있을 때면 영검을 나타내어 적을 섬멸하고 백성을 보호했다고 한다
형 : 고려 대제
광립 : 고려 예부상서
변 : 과거에 올라 고종 때에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사공(守司空)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하고 굳세며 행정의 실무에 능숙하여, 재결하는 것이 물 흐르는 것 같아서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9권 京畿 富平都護府 人物 高麗≫
판관(判官)에 등용되었는데, 정사를 가장 잘 하였으므로 승진하여 공역서승에
임명되었으며, 고종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15권 忠淸道 天安郡 名宦 高麗≫
효려 : 고려 평장사
광 : 고려 판도판서
을봉 : 조선 병조 참판
수령 : 조선 병조 판서
윤생 : 조선 관찰사
여성 : 조선 부사
흥제 : 조선 군수
기양 :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영천군수 창원부사 등을 지내다가 광해군 때 정치
가 어지러워지자 낙향했다. 성리학자로서 정구(鄭逑) 정경세(鄭経世) 조호익
(曺好益) 등 영남의 명유들과 교유했고, 만년에는 역학에 전심했다.
손빈은 충숙왕 때 여진을 물리쳐 은성(隠城)에 <정북대장군 손빈지비>라는
전승비가 세워졌고, 충혜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밀성군에 봉해졌다.
책(策)은 고려 말에 수주목사(樹州牧使)를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에 불복, 처형당했다. 그의 부인 이씨가 난을 피해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호남으로 내려와 맏이 검경(倹敬)은 나주에, 둘째 유경(有敬)은 보성에, 셋째 계경(季敬)은 정읍에 각각 정착케 하여 나주 보성 정읍의 파조가 되었다.
서륜(敍倫)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단종이 물러나자 그날로 낙향,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및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고 의사를 모집하다 발각되어 사형당했다. 입암(笠巌) 손비장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왕에게 <시무사조(時務四条)>를 건의했으며 서거정(徐居正)과 함께<동국통감(東国通鑑)>
을찬진하였다. 벼슬은 공조참의 장례원 판결사 예문관 직제학 등을 지냈다.
비장(比長) : 두 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명(文名)이 있으며, 벼슬은 좌부승지
(左副承旨)에 이르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6권 慶尙道 密陽都護府 人物 本朝≫
추천(鄒川) 영제는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예안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승 이황에게 학문과 정치를 물어 선정을 베풀고 도산서원 건립 때는 사재를 기울여 조력했다. 오한 손기양은 서조 때 문과에 급제, 영천군수 창원
부사 등을 지내다가 광해군 때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낙향했다. 성리학자로서 정구(鄭逑) 정경세(鄭経世) 조호익(曺好益) 등 영남의 명유들과 교유했고, 만년에는 역학에 전심했다.
기(琦) : 상인(商人) 출신.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에 이르렀으며 왕을 호종(扈從)한 공로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어 총부전서(摠部典書)를 거쳐 밀직사지사 때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이 되었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간신들이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왕으로 추대하려 획책
하자, 한사코 왕을 두호하여 충숙왕 복위 후 추성수의좌리공신(推誠守義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어 찬성사가 되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왕제(王弟) 강릉대군(江陵大君: 공민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 공민왕 즉위 년인 1351년 평해부원군(平海府院君)에 책봉되고 정승(政丞)으로 치사(致仕)
인갑(仁甲) : 성주(星州)에서 태어나 선조 때 무과에 급제, 북보만호(北堡萬戶)를 지냈으며, 1589년(선조 22) 비변사(備邊司) 이산해(李山海) 등의 천거로 가덕진 (加德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김면(金沔) ․박성(朴惺)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무계(茂溪)에서 왜군을 격파, 동래부사 (東萊府使)가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마진(馬津) 싸움에서 전사,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소(昭) : 경주의 인물란(人物欄)에 자세히 나온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4권 慶尙道 靑松都護府 寓居 本朝≫
과거에 급제하였다.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참여하여 계천군(雞川君)에 봉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1권 慶尙道 慶州府 人物 本朝≫
목사가 되어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8권 慶尙道 星州牧 名宦 本朝≫
목사였으며, 옥송(獄訟)을 잘 처결하고 정사가 너그러워서 백성이 애모
≪新增東國輿地勝覽 제30권 慶尙道 晋州牧 新增 名宦 本朝≫
부사를 지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4권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名宦 本朝≫
수경(守卿) :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가 있었다하여 1등공신으로
기록되었다. 또 충정왕(忠定王)을 받들고 원나라에 가기도 하였다. 즉위하자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의 호를 내렸다. 판삼사(判三司)로
제수되고,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32권 慶尙道 昌原都護府 人物 高麗≫
순효(舜孝) : 두 번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이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까지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질이 소탕(疎蕩)하고 세상 일에 둥한시
하였으며,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자호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45권 江原道 平海郡 人物 本朝≫
순흥(順興) : 성종 9년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구례(求禮) 백성 손순흥이
그의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모양을 그려 제사를 받들고 3일에 한 번씩
분묘에 찾아가서 제사지내어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이 벼슬을 주게 하여 그의
효성을 찬양하라.”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40권 全羅道 求禮縣 孝子
高麗≫
성종(成宗) 9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례(求禮) 사람 손순흥(孫順興)은 그
어머니가 죽자 화상을 그려 놓고 제사를 받들며 사흘에 한 번 묘지를 찾아가
공양하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으니, 벼슬을 주어서 효도를 표양하려
하노라.” 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39권 全羅道 南原都護府 孝子 高麗≫
승경 : (承憬․1540~1592)
본관 밀양(密陽) 자 사오(士悟) 호 초은(楚隱) 한림(翰林) 홍적(弘績)의 아들.
이일재(李一齋)의 문인(門人), 을사사화(乙巳士禍) 후 출세에 뜻을 버리고 어머니 를모시고 부안(扶安)에서 정읍으로 옮겨 초산(楚山)의 동쪽 석산(石山․龍山洞)에 은거했다. 선조왕(宣祖王)이 참봉(參奉)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宣祖 25)임진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王朝
實錄)을 내장산으로 옮기려던 차에 조 헌(趙憲)이 금산(錦山)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홍록(孫弘祿), 안 의(安義)에게 부탁하고 의병을 일으켜 출전하여 양성(陽城․경기도 安城)에서 9월 5일 전사하니 가동 차곡석(車曲石), 이오금
(李惡金)이 역시 순종했다. (정읍시사 제공)
홍록 : (孫弘祿․1537~1610) 본관 밀양(密陽) 자 경안(景安) 호 한계(寒溪)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七寶面 詩山里) 출생.이일재(李一齋)에 수학했다. 1592년(宣祖 25) 임진난(壬辰亂)에 안 의(安義)와 더불어 태조 영정과 조선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이해 6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서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과 은봉암(隱峯庵)으로 피란시켰다. 손홍록과 안의는 내장사 희묵(希黙) 선사와 장사 김홍무(金弘武)와 함께 1년 동안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해 7월 11일 왕명에 의하여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옮겨 갔으니 370일 만이었다.
그동안 손, 안 두사람이 함께 수직한 일수는 53일이요, 안의가 혼자서 수직한 일수는 174일 손홍록이 수직한 일수는 143일이었다.
7월 19일 아산현의 객사(客舍)에 안치하고 평양(平壤)으로 가서 선조왕(宣祖王)에게 중흥시무육책(中興時務六策)을 올리니 선무랑 사포서 별제(宣武郞司圃署別提)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7년(宣祖 30) 정유란이 일어나자 안의와 함께 가동 30여 명을 거느리고 아산현으로 달려가서 한춘(韓春)과 더불어 강화도(江華島)로 옮겼다.
이때 안의는 신병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손홍록은 1월 27일 강화에서 다시 해로로 해주(海州)를 거쳐 안주(安州)에 이르러 안전한 곳을 물색한 끝에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로 옮겨 봉안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해서 묘향산에서 보존된 것이다.
태조에서 명종(明宗)까지의 180년 동안의 역사기록을 보존하게 된 것은 오로지 두 의사의 공인 것이다.
1876년(肅宗 2) 남천사(藍川祠․七寶面 詩山里)에 배향되었다.
승선(承善) : 충민사(忠愍祠). 의병대장으로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선조 계사년 6월에 본주(本州)에서 전사하였다.
≪신증문헌비고 輿地考 사원 晋州牧≫
욱(旭) :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벌을 잘 받들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27권 慶尙道 慶山縣 名宦 本朝≫
유(宥) : 이 고을의 아전이다. 신우 4년에 왜구가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침입하였는데, 어린 아들딸들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으나 유는 돌아보지 않고
바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해를 면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15권 忠淸道 淸州牧 孝子 高麗≫
일선(日宣) : 부모상을 당해서 모두 3년 동안 여막에서 사니, 세종조 때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우고 서요직을 제수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27권 慶尙道 慶山縣 孝子 本朝≫
병희 : 동학군 지휘,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준장 수여
일민 :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 수여
정도 :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 수
첫댓글 우리함평손은 책 (수주목사}할아버님 후손중 첮째 검경할아버님 후손들임을 알기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