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매우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알리는 문자를 발견했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짬을 낼 수 없는 오후 두 시. 강 건너 바라기만 할 시간대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문을 접었다. 깜깜한 그 틈새를 비집은 볕뉘가 날 비춘다. 차 열쇠를 집어 들고 백 미터 출발선에 선 단거리선수처럼 튀어 나간다.
긴급 호출한 내비게이션을 달고 고택을 향한다. 신호등이 눈치가 백 단이다. 가는 곳마다 녹색 불로 진두지휘하며 통과하라며 길을 터준다. 시골길로 접어든다. 길섶에 피어있는 하늘하늘한 코스모스가 가을이 왔음을 온몸을 흔들어 알려준다. 들녘은 어느새 황금으로 변신하고 있다. 땀이 흐르는 불쾌감은 걷어낸 따사로운 햇살이 길을 밝혀준다. 오늘 벌어질 프로그램에 들뜬 듯 풍만한 겹 맨드라미가 유난히 붉다.
고택은 독립운동가인 신형호 선생의 생가이다. 고종 18년에 건축되었으니 142년이 된 한옥이다. 무릇 고택이라 하면 일흔 살은 돼야 한다. 선친인 신정식은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독립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집 일부가 훼손되었다. 지금은 이 안채만 겨우 남아 영광스럽게도 방문할 수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이 프로그램을 위하여 문을 전부 개방하였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개방감으로 눌렸던 마음이 솟아오르는 기분이 든다.
교통 신호가 도와준다. 덕택에 고택을 둘러볼 시간이 주어졌다. 마당 오른쪽 담 옆을 터줏대감이 지키고 있다. 주렁주렁 모과를 매달고 있는 나무에 시선이 집중된다. 저 나무가 만약 담장 너머에 있었다면 이토록 반짝이는 나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을까 싶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적재적소에 있다는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있든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과한 욕망은 부리지 말자.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내가 힘들게 배운 국가 자격증은 겨우 오 년여 만에 책장 깊숙한 곳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경력단절 위기로 어렵게 취득했다. 조심스럽게 이력서를 낸 첫 기관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동기들보다 빨리 합격했기에 기쁨이 컸다. 그것도 잠시 약 한 달 동안 근무를 지연시켰다. 턱걸이 앓이가 시작된다. 그 한 달이 별거 아닐 거라고 위로했지만, 매번 발목을 잡았다.
뒤꼍으로 가 본다. 담 너머 붉은 지붕을 호박넝쿨이 차지하고 있다. 늙은 호박 몇 개가 가을 햇볕에 뒹굴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흥부와 놀부전에 나오는 박이 호박으로 둔갑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사진으로 남겨두려 버튼을 누른다. 맨눈을 렌즈 세 개가 따라오질 못한다. 디지털 혁명이라고는 하나 아날로그의 감성을 누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순탄치 않은 출발 테이프는 이어 붙이는 게 아니었다. 근무 여건이 열악하기 짝이 없거나 할 일이 아닌 일을 시키거나 수당을 떼어먹는 사업주의 횡포로 날마다 피폐해졌다. 일과 가정 양립의 선상에서 저녁은 건너뛰거나 잠들 시간에 먹어야 했다. 그러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대상포진을 시작으로 가을만 되면 봄까지 낫지 않는 몸살 후유증에 시달렸다. 아침에는 보톡스를 맞은 듯 빵빵하게 붓고 저녁이면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역 요요현상이 반복되었다.
앞마당 왼편으로 나와본다. 기름 냄새가 콧속을 찌른다. 프라이팬 두 개를 놓고 한창 부침개를 익히고 있다. 재료는 눈에 보이는 버섯, 부추, 호박, 미나리라고 한다. 감칠맛을 살려주는 양념간장에다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대접해 준다. 할머니의 솜씨는 일품이다.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둘이서 두 장을 뚝딱 해치우고 만다. 인심이 좋다. 더 먹어도 된다지만 이제 본연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많은 책이 마당에 누워 있다. 책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를 위한 배려이다. 비행기가 생각나는 저자의 얇은 책을 골랐다. ‘바다의 선물’이다. 통했다. 책날개를 읽어보니 경비행기와 연관된 그 린드버그의 아내이다. 옆에 자리한 시인님이 문구가 너무 맘에 와닿는다면서 보여 준다. '소명대로 산다는 건 세상에 시선을 두고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나에게 시선을 두고 내 안의 조근한 소리를 듣는 것이다.' 멍멍디노님이라고 쓰여있다.
풍광이 그림 같은 고택, 서로 소통하는 문에서 마주 부는 산들바람, 등허리에 따사로이 기대는 햇살,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 명상 음악, 모과 향이 오후를 편안하게 풀어준다. 일상의 찌듦에서 맴도는 두통을 몰아낸다. 오롯이 책 속에 빠져들게 한다. 고택에서 출발한 몸 명상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잡념을 걷어낸다.
세상 밖을 향해 줌아웃한 고택에서, 에너지를 잠시 식힌 고즈넉한 오후가 줌인한 날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12.2장)
첫댓글 고택 마당에 모과나무, 담장에 늙은 호박, 할머니가 구워주는 빈대떡, 나도 빈대떡 굽는 소당 옆에 같이 앉고 싶네요
가고 싶다고 후딱 길 수 있는 민 선생님 부럽습니다
사십년 넘게 가정에 충실했으니 이제는 절 위한 소확행을 누리려 합니다. 안에서 오래 있었으니 밖으로 나가야지요.
신형호 선생의 생가가 있었군요. 글을 읽으니 직접 가 보는 듯 생생합니다. 중간중간 민선생님의 과거 서사를 소환한 것이 수필의 맛을 살려주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번 가보고 싶네요.